영국 노동당의 역사에 배운다:
연립정부가 낳은 재앙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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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 선거연합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병천 진보신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은 영국 노동당 사례를 들어 이런 노선을 정당화한다.
“영국 노동당도 원래 만년 1~3석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06년 맥도널드(노동당)·글래드스톤(자유당) 선거연합을 분기점으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영국적 사례를 한국적 현실에 맞게 변용한 것이 ‘복지국가’ 노선을 선명히 한 상태에서, ‘사민주의-진보적 자유주의의 연립정당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국 노동당은 1906년 총선에서 29석을 얻었다. 이 가운데 24명은 자유당 후보와 대결하지 않은 덕에 당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자유당에 종속되는 대가를 치렀다.
1906~1908년에 노동당은 모든 의회 표결의 86퍼센트에서 자유당 정부를 지지했다.
1910년 노동당은 의원이 42명으로 늘어났지만 자유당 정부에 노동자들의 요구와 압력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유당 정부를 지지하라는 압력을 노동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노동당 의원들은 사안의 옳고 그름에 따라 표결하지 않고 자유당 정부의 존속을 위해 표결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정부가 공무원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정부 불신임안이 제출됐을 때도 일부 노동당 의원들은 자유당 정부가 무너질까 봐 그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잘 훈련된 푸들
부르주아 언론조차 “노동당원들은 거리의 연단에서 노동당의 독자성을 씩씩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의회에서는 잘 훈련된 푸들처럼 고분고분하고 우파의 로비에 순순히 굴복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계급연합 노선 때문에 자유당의 눈치를 보느라 노동당은 ‘도약’이 가져다 준 기회를 엉뚱하게 활용했다.
영국에서 1910~1914년에 벌어진 노동자 투쟁으로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로 강력하게 복귀했다. 광원·항만·철도 노동자의 파업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노동조합원 수가 갑절로 늘었고, 파업일 수는 네 배로 늘었다.
진보정당이라면 이런 투쟁이 더 전진할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동당은 노동자 투쟁을 의회 활동으로 대체하려 했다. 노동당 창립자 키어 하디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성공할 때조차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손실은 없고 성과만 있는 파업 형태는 정치 파업뿐이다” 하고 말했다. 하디가 말하는 ‘정치 파업’이란 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이었다.
구원 투수
한술 더 떠서 노동당은 사력을 다해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한하려 했다. 노동당 의원들은 보수당에게나 어울릴 만한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조정위원회를 먼저 거치지 않은 파업을 불법화했고, 이를 어기고 파업하거나 파업을 지속하도록 선동하고 지원하는 사람을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벌금액도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주급이 1파운드였는데 ‘불법 파업’을 하는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은 하루(!)에 2~10파운드였고, 파업을 선동하고 연대하는 사람이 내야 하는 벌금은 더 가혹해 하루에 10~2백 파운드였다.
선진 노동자들은 노동자 투쟁을 가로막는 노동당에 크게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1910~1914년에 노동당은 네 석을 잃었고, 다른 열두 곳의 재보선에서 노동당 지지율은 바닥이었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노동당은 아예 자유당이 이끄는 연립정부에 들어갔다.
노동당은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가장 큰 위협은 독일의 군사력이 아니라 국내 산업 현장의 불안”이라는 지배계급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노동당 당수 헨더슨은 파업권을 제한하는 재무협정에 서명했고, 노동당 의원들과 노조 간부들은 생산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게다가 독립노동당의 반전평화주의자들을 색출해서 감옥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노동당과 노조 간부들의 이런 구실 덕분에 영국 지배계급은 1차세계대전이 낳은 노동계급의 불만 증대와 급진화 속에서 별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노동당은 이번에는 보수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당시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하려고 개입했고, 1926년 영국 총파업을 악랄하게 탄압한 윈스턴 처칠이 총리였는데도 말이다.
노동당은 또다시 국내의 계급투쟁을 억누르는 구실을 했다. 노동부 장관이 된 영국노총 위원장 출신 어니스트 베빈은 파업을 막는 법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이 독자적으로 이 법안을 추진했다면 광범한 반발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이 방패막이 구실을 톡톡히 해 준 결과, 이 법안은 수정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렇듯 계급연합에 목을 맨 영국 노동당은 지배계급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원 투수를 자처했고, 노동계급이 투쟁에 나설 때마다 방해꾼을 자임했다.
기억상실증이 아니라면 이런 역사적 경험을 모르는 척하면서 계급연합과 연립정부를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국 노동당의 경험은 진보정당이 민주당을 견인해 복지국가를 이루겠다는 것이 허황된 꿈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 추천도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공저,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