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버스’가 보여 준 힘:
이제 노동자 단결과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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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여 명이 결집한 2차 ‘희망의 버스’는 기층에서 끓고 있는 불만과 단결의 염원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 줬다. 1천여 명이 모인 지 겨우 한 달 만에 그 열 배에 이르는 사람들이 “연대가 희망”이라고 외치며 부산에 모였던 것이다. 노엄 촘스키도 이것이 “경이로운 이야기”라고 찬양했다.
‘희망의 버스’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던 배경에는 2008년 이후 계속된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더 심화할 양극화가 자리잡고 있다. 노동자들이 하루 아침에 평생 일해 온 일터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쉰이 넘은 여성 노동자가 1백85일을 홀로 크레인 위에 올라가 싸우는 현실. 이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가진 자들의 비정함에 분노하고, 한진중공업 투쟁을 자신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이들은 〈한겨레〉의 지적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미쳐 가는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경이로운 이야기
이 같은 연대 확대를 두려워 한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광포한 폭력을 휘둘렀다. 물대포·최루액을 쏟아 붓고, 장애인·여성·청소년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그리고 조중동은 “외부 세력” 운운하며 ‘희망의 버스’가 보여 준 저항의 가능성이 커질까 봐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의 버스’ 기획단은 곧바로 3차 투쟁을 추진하고 있고, 보수 언론들도 얘기했듯이 이미 “판은 커졌다.”
이런 가능성을 더 확대하려면, 우선 연대의 초점인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굳건히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연대의 힘으로 한진중공업 회장 조남호를 무릎 꿇게 하자는, 그래서 김진숙 지도위원과 노동자들을 살려 보자는 대중의 기대가 꺾여서는 안 된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희망의 버스’가 보내 준 뜨거운 연대에 투쟁을 강화하는 것으로 화답해야 한다. ‘희망의 버스’가 노동자들 스스로의 투쟁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이미 대다수 노동자들이 공장 밖으로 밀려났고, 투쟁은 거의 크레인 위에서 온몸으로 싸우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여덟 노동자들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다.
더구나 매우 안타깝게도 파업에 동참했던 비해고자들은 채길용 한진중공업 노조 집행부의 배신 이후 업무에 복귀했다. 최근 사측이 배를 수주하고 조업 정상화에 착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고자와 비해고자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복귀자의 절반 이상이 현재 집회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최근 구성된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가 분명한 지도력을 제공해야 한다. 배신자 채길용 집행부를 제명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사측의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노동자들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점거파업과 같은 투쟁 전술을 세우고 건설해 나가야 한다.
사실, 한진중공업의 조직 노동자들은 ‘도와줘야 할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집단적 행동을 통해 이 나라의 기간산업을 마비시키고 지배자들을 쩔쩔매게 할 막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노조 지도자들의 자기제한적 전술과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주도한 계급연합 분위기 속에서 이런 잠재력이 억눌려 지금 같은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진중공업의 투사들은 이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희망의 버스’가 보여 준 연대의 힘은 한진중공업을 넘어 유성기업·현대차 비정규직·쌍용차 등으로 확대돼야 한다. 연대 투쟁을 애타게 바라고 함께하려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이런 힘을 모아 이명박 정부의 반노동 정책에 맞서야 한다.
반이명박 계급연합을 추구하느라 마지못해 제한적으로 투쟁하려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추동하면서, 투쟁과 단결을 발전시켜야 한다.
폭력적 본질을 드러낸 경찰
경찰이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에게 휘두른 무자비한 폭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경찰은 평화롭게 행진하던 맨몸의 시위대에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발사했다.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의 딸과 아내가 경찰에 끌려갔고, 경찰이 곤봉으로 연행자들을 집단 폭행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당시 집회에서 부상자들을 돌봤던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방패로 찍고 밀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수가 골절상, 타박상을 입었고 호흡 곤란과 구토 증상도 보였습니다. 1991년에 김귀정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토끼몰이식 진압이 떠올랐습니다.”
사회적 질타가 이어지자, 경찰은 ‘최루액이 인체에 무해한 새로운 물질’이라고 발표했다. 우석균 정책실장은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며 “경찰이 밝힌 최루액 ‘파바’는 피부와 눈에 접촉하거나 섭취할 경우 매우 유해하고, 과량에 노출될 경우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바의 주 성분인 노비나마이드가 합성 캡사이신임을 감안한다면, 그 유해성은 심각합니다. 캡사이신은 해골 표시가 붙어 있는 극히 위험한 농약입니다. 태아에 유해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으며, 발암 효과와 폐·간·신경 독성을 일으킬 수 있고, 돌연사를 부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에만 1백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교과서는 우리에게 경찰의 구실에 관해 이렇게 가르쳤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경찰이 결코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가진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피억압 계급의 저항을 탄압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경찰의 본질이다. 이것은 ‘무장한 인간들의 집단’으로서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찰이 중무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가 강력한 것은 아니다. 정부는 경찰력과 폭력에 의존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레임덕 신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