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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금융수탈체제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경제 위기는 지난 30여 년간 금융이 엄청나게 성장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례 없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다. 게다가 2008~09년에 여러 나라의 금융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이번 위기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됐다.

이 때문에 이미 위기 전부터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진보진영에서 신자유주의와 금융부문의 확대에 대한 분석이 있었고, 이 중 꽤 많은 사람들은 ‘금융화론’을 주장했다.

이런 금융화론들은 논자들마다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모두 ‘금융’의 ‘지배’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변화시켰다는 주장을 공유한다.

한국에서 이런 류의 주장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하준 교수가 주장한 ‘주주 자본주의론’일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주주 자본의 권력이 강화된 것으로 본다.

주주들이 기업들로부터 더 많은 배당을 받아감으로써 기업 투자는 정체되고, 임금 삭감과 해고와 같은 노동유연화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 시대는 그전보다 경제성장률은 낮아지고 주식·부동산 시장 거품이 연달아 발생했다가 터지는 경제 위기의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론의 가장 큰 약점은 기업의 배당금 지출 확대가 반드시 투자 수준을 낮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주들이 설사 기업들로부터 많은 배당을 받아냈다고 하더라도 높은 수익을 거둘 만한 부문이 있다면, 투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닷컴 호황 때 금융자본이 너도나도 IT 기업들로 향한 것은 IT 기업들이 높은 수익을 거두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IT 부문에 대한 과도한 투자가 결국 거품 붕괴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인 투자 감소나 저성장은 기업들의 고배당 같은 금융화 때문이 아니라 실물경제 자체의 수익성 하락이 근본 원인인 것이다.

수탈경제

금융자본이 ‘수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돼야 한다. 그래서 착취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윤선

기본소득네트워크나 좌파노동자회는 또 다른 형태의 금융화론을 주장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을 “신자유주의적 수탈경제” 또는 “금융수탈체제”라고 규정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수탈’로 규정한다. 수탈은 “착취와는 달리 직접적인 노동 밖의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빼앗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곽노완 기본소득네트워크 학술위원장). 그러면서 여러 수탈의 사례를 언급한다.

주택담보대출, 등록금 대출 등 가계대출 확대로 이자를 수취하는 것, 생물자원에 대한 지적재산권, 공기업·공유지의 사유화, 거대 자본을 지원하는 공적자금, 환율 인상으로 수출기업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것 등이다. 또, 달러화를 마구 발행해 무역수지 적자를 확대하면서도 달러화 하락 내지 인플레이션 압력을 거의 겪지 않는 ‘달러지배체제’도 미국이 국제적 수탈을 하고 있는 사례라고 본다.

열거한 사례들에서 보듯,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약탈을 통한 축적’이라고 규정한 데이비드 하비나, 금융기관들이 가계대출을 늘려 소비자를 직접 착취하는 “금융적 수탈”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는 코스타스 라파비챠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노동 착취를 통한 축적보다 수탈을 통한 축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잉여노동시간의 착취를 통해 이윤을 확보했던 본연의 축적 방식과 달리 지난 35년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자본축적은 다른 자본가의 이윤을 금융적 방식에 의해 수탈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금민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결국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생산현장에서의 착취보다 수탈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적절한 요구가 된다.

또, 실천에서는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투쟁보다 ‘점거하라’ 운동 같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거리 운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나선 좌파노동자회의 허영구 후보가 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종종 불신을 드러내거나,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돈을 대는 정도의 구실로 한정하는 것도 분명 이런 관점과 관련 있을 것이다.(이에 관한 더 자세한 분석은 지난 호에 실린 “민주노총 혁신 과제의 문제점” 기사를 참고하시오.)

금민도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가 “보편적 해방의 주체”가 되려면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을 연동된 프로그램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정규직 노동자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대상으로만 설명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통한 축적’을 강조하는 데이비드 하비도 최근 발간된 책 《자본의 17가지 모순》에서 “노동시장과 작업장을 계급투쟁의 쌍두마차로 특권화하는 경향”에 반대했다.

자본주의의 성격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수탈 메커니즘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성격을 바꿨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일부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을 ‘약탈’하는 짓이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생산 현장에서 착취할 뿐 아니라 이런저런 추가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갈취하는 짓은 자본주의에서 늘 있었던 일이다.(이 지점에서 기본소득네트워크 내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금민은 수탈경제가 신자유주의의 “시기규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데 강조점을 두는 반면, 곽노완은 수탈이 자본주의 일반적 특징인 듯 서술한다.)

이미 마르크스는 19세기에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로 주택을 빌리는 상황을 두고 《자본론》 3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 계급이 이 형태에서도 크게 기만을 당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짓은 노동자 계급에게 생활수단을 공급하는 소매상들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이것은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제1차적인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는 제2차적인 착취이다. 여기에서는 판매와 대부 사이의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형식적 차이인데, 실제 맥락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나 본질적 차이로 보인다.”

금융자본은 가계대출을 늘려 노동자의 미래 소득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이자로 가져갈 수 있다. 노동자가 사용자에게서 임금 인상을 따내지 않는 이상 이것은 사실상 임금을 삭감해 착취율을 높인 것과 같고, 이렇게 해서 늘어난 잉여가치를 금융자본이 가져간 셈이 된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따내는 경우 고용주가 자신의 잉여가치 하락을 감수하고 노동자의 빚에 부과된 이자를 대신 지불해 주는 셈이다. 빵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렸을 때 임금도 따라 오른다면 그만큼의 잉여가치가 제빵업 자본가에게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처럼 노동자에 대한 수탈을 2차적 착취로 보면,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잉여가치 창출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돼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라도 그렇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에 수탈이 강화됐다 하더라도 생산 현장에서 착취에 맞선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은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킨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그 힘을 이용해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같은 전 사회적 요구를 내걸고 싸우도록 고무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끝으로, 기본소득네트워크나 좌파노동자회는 신자유주의를 ‘수탈경제’라고 규정해야만 보편적 기본소득이 정당화된다고 보는 듯하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노동자 계급의 당면한 핵심 요구는 아니지만, 이들의 분석과 실천적 약점은 오히려 자신들의 핵심 요구를 성취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의미를 찾자면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섭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아 노동자들을 자본의 독재에서 해방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만 주체로 보며 정규직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적대한다면 자본의 이윤에 큰 타격을 줄 힘을 포기하는 것으로, 오히려 기본소득 도입을 더 요원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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