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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 ― 계승할 것이 못 된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지난 당대회에서 기존의 급진적 강령을 폐기하고, 이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인 바 있다.

예를 들어 새세상연구소는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를 펴냈고, 박경순 부소장은 〈진보정치〉에 연재 기사를 썼다. 당 게시판에서도 오한강 당원 등이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따지며, 그 계승을 주장하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교훈은 오히려 이를 계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해방 당시 조선의 ‘진보적 민주주의’론과 오늘날 당권파가 주창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론의 세세한 내용은 분명 차이가 있다. 사실, 오늘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 과거 공산당의 단계혁명론에 대당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기는 하다. 즉, 과거처럼 다음 단계로나마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전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보적 민주주의’론의 핵심적인 정신은 여전히 같은데, 그것은 바로 계급 협력과 우경 기회주의라는 점이다.

‘민중전선 노선의 기원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레닌은 1917년 ‘4월테제’ 전까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단계론을 유지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을 동맹 대상으로 삼고자 한 멘셰비키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 후 레닌은 이런 단계론조차 파기하고, 트로츠키가 주장한 연속혁명론과 다르지 않은 실천을 통해 혁명에 성공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기원은 코민테른 7차대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른바 ‘민중전선’ 전략이다. 당시 스탈린이 민중전선 전략을 제기한 것은 나치의 집권으로 자국의 안보가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동맹을 해서 나치를 견제하고자 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는데, 나치 집권 전에 공산당은 사민당이 ‘사회파시스트’라며 노동자 공동전선을 거부해 히틀러 집권에 일조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전선’은 소련의 외교적 이익에 각국 노동계급 운동을 종속, 또는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민중전선 전략 하에서 서방 진영에 속한 노동자 계급은 서방 지배자들을 위협할 언동을 해서는 안 됐다. 그러면 스탈린이 바라는 서방 지배자들과의 동맹은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에도 민중전선 전략은 유지됐다. 미국과의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이 끝나지 않은 이상 서방과 유화 국면은 한동안 유지돼야 했다. 이 때문에 각국 공산당은 종전 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각국의 노동계급 투쟁을 억제했다. 당시 준혁명적 상황은 자본주의적 질서로 대체됐고, 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은 이를 돕는 구실을 했다.

계급투쟁을 억제한 ‘진보적 민주주의’론

‘해방’ 직후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좌파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미국도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현단계 조선혁명의 국가건설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노선을 추구하였다.”

문제는 이 “현실노선”이 정작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다. 당시 ‘진보적 민주주의’는 계급연합을 수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향후 건설될 국가 권력을 “민족통일전선”으로 규정했다. 실제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했고, ‘반동적 민족자본가’ 김성수조차 교육부장(교육부 장관)에 추대한 바 있다.

이런 계급 타협 정책은 당시 노동자·농민의 급진적 진출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은 물론 조선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박헌영과 김일성 모두 이런 흐름을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좌경’이라며 억제했다. 심지어 공산당이 지도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쟁의부를 폐지하고 산업건설부를 신설해 ‘민족자본가’와 협력을 강조하고 쟁의를 억제했다. 마찬가지로 공산당은 빈농들의 토지 접수 시도도 좌절시켰다.

문제는 이런 아래로부터 투쟁을 억누른 채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라는 반식민, 반봉건이라도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친일·친미 반동 세력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해체와 노동자·빈농의 급진적 투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물리력 덕분에 토지개혁이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민들의 자발적 투쟁이 해방 직후보다 갑자기 고양해서 그런 것도, 농민들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핵심은 소련 점령지에서 자신의 체제와 유사한 친소 정권을 복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스탈린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서방의 지배자와 노동자들을 핵심으로 겨냥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소련이 점령한 점령지 자체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예컨대 ‘진보적 민주주의’의 ‘폭넓은 연대연합’에 따라 북한에서 조만식을 구색맞추기 식으로 연립정권에 참가시켰지만, 이 형식적 연립마저 붕괴되는 데는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소련 점령지에서 벌어진 스탈린주의적 국가자본주의화를 ‘진보적 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사회주의’ 발전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의의를 부여하려 시도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무의미한 공론일 뿐이다. 그 ‘발전 단계’는 계급투쟁의 양상에 따른 게 아니라,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험악해지는 정도, 그에 따라 소련 점령지가 소련식 체제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알려 주는 사후 합리화에 불과하다.

어쨌든 공산당이 계급투쟁을 자제시키고 ‘민족 자본가’와 협력을 강조하는 동안, 해방 직후 수세에 몰려 있던 친일·친미 반동 세력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좌익이 민족 단결을 설파하는 동안 노동자·농민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좌익에 유리했던 세력 균형추는 급격히 바뀌었다. 1948년 제주 4·3항쟁의 비극적 결말은 이때부터 씨가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과연 자주적 노선인가?

‘진보적 민주주의’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타협과 협력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주’와 거리가 멀었다. 당시 모든 좌파들이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라며 칭송했지만, 미국은 인민위원회, 노동운동, 농민 운동, 좌익 정치 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했다. 조선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이런 탄압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의 태도는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며 바뀌지만, 이것이 전면적인 반미·반제국주의 항쟁에 돌입했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신전술’은 스탈린·김일성·박헌영 회담의 결과였고 스탈린의 대미 정책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미소공동위원회는 아직 최종 파탄나지 않은 상태였다. 신전술과 그에 따른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은 본질적으로 결렬된 1차 공위를 재개하라는 압력 수단이었다.

바꿔 말해 미국은 여전히 공위의 주체였고, 공위 결과에 따라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기 때문에 당시 신전술의 ‘반미’는 반쪽짜리 ‘반미’였다. 실제로 항쟁 과정에서 공산당은 미군과 충돌을 극력 회피했다. 그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은 정치적으로 출구가 없는 투쟁이었던 셈이다. 실질적 지배자와 충돌을 회피하는 투쟁이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1946년 1월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좌파는 식민지 민중의 자존심을 짓밟은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의 모든 좌파들이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에 맞서 투쟁한 게 아니라,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리고 이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협상으로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이 때문에 좌익은 식민지 민중의 자존심을 짓밟은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말았다.

박헌영, 김일성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를 찬성했다. 여운형도 마찬가지로 찬성했다. 신탁 찬성, 즉 제국주의 열강 간 협상으로 통일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략 자체에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탁 통치를 전제하면서, 즉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적 정책에 맞서지 않으면서 ‘자주’를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당시 조선 민중의 역량상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루스벨트가 신탁통치를 합리화한 논리가 바로 ‘자치능력 없는 국민’이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힘을 기르자는 ‘현실론’은 결국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막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베트남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한 반제 자주의 사례로 여기기 어렵다. 7차 코민테른의 민중전선 노선은 서방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식민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 민중전선 노선이 적용된 결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민족해방투쟁은 억제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제국주의 타도’ 같은 슬로건을 내걸지 못했고, 식민 당국에 ‘유화적 태도’를 취해야 했다. (물론 스탈린·히틀러 협약 이후 사태는 또 달라진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의 패망으로 베트남에서 권력은 공산당에게 넘어갈 듯 보였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은 소련의 지침에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영국의 주둔을 환영했다. 이를 위해 호치민은 트로츠키주의자와 각종 민족주의 그룹이 이끈 반영국 봉기를 진압했다. 이는 남부 베트남에 제국주의의 교두보를 허용한 꼴이었다. 결국 베트남 민중은 30년간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진보당, 민중당,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조봉암의 진보당과 1990년대 민중당과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다. 결정적으로 진보당과 민중당에게는 진정한 노동계급적 기반이 없었다. 이 정당들이 실패한 프로젝트로 끝난 데는 이런 계급적 기반의 부재가 큰 몫을 했다.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진보당과 민중당에 비해 비할 바 없는 질적 발전이다. 그런데 왜 당권파는 이런 발전을 다시, 심지어 1950년대 진보당 수준으로 되돌리려는가? 백번 양보해 진보당의 다계급적 ‘민중주의 강령’은 지극히 후진적이던 남한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운동이 궤멸해 존재감이 없던 당시 상황의 한계에서 나왔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 그런 상황인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사회주의 강령을 병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 논쟁의 맥락에서 두 강령의 정신은 절충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쪽은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계급 독립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쪽은 사회의 지배적 편견에 굴복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그 편견을 극복하며 전진하자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앞으로 통합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삭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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