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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MBC 파업의 교훈

3월 21일, MBC 노동자 파업이 51일째를 맞았다. 그동안 MBC 역사상 최장기 파업인 1992년 9~10월의 50일간 파업을 갱신한 것이다.

지금의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당시 노태우도 언론 장악에 혈안이 돼 있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 후 언론의 여권 편향이 더 노골화됐다. 그해 7월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넘는 여당이 방송관계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9월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는 농민대회를 며칠 앞두고 〈PD수첩〉 방영이 갑자기 연기됐고, 이에 항의한 MBC 노조 간부들이 전격 해고됐다. 이듬해 초엔 빈부격차를 다룬 대하드라마 ‘땅’이 강제 종영됐다.

MBC 노동자들은 1988~89년 투쟁의 성과로 ‘공정방송 협의회’와 ‘보도·편성·TV기술국장 등의 노조 추천제’를 단협에 명시해 뒀지만, 기고만장해진 사측은 1991년 6월부터 이를 공격하더니 급기야 조항 삭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언론의 친정권 편향이 갈수록 노골화되고 정권의 무능·부패가 반복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불만을 쌓아 갔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 말기의 레임덕 상황을 이용해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1992년 MBC 파업 당시 언론노보

노태우 정권이 하수인 사장 최창봉을 유임시키려고 했던 것이 파업의 도화선이 됐다. 19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당시, 노동자들은 MBC 로비를 점거하고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 대열은 점차 늘어났고, 그 효과는 상당했다. 특히 당시엔 프로그램의 외주 제작이 없었고, 방송사들도 적었던 터라 MBC 파업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훨씬 컸다.

최창봉이 대량 징계를 강행하고 노태우가 파업 한 달 만에 MBC 농성장에 경찰력을 투입해 약 2백 명을 연행했지만, 이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초기에 일손을 놓지 않았던 시설직과 송출직도 파업에 합류하면서 정상적인 방송은 불가능해졌다. 파업 효과는 극대화됐다.

연대도 강력했다. 59개 시민·사회 단체들이 ‘MBC 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범국민 대책회의’를 결성하고 시청 거부 운동과 광고주 상품 불매 운동 등을 벌였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중요했다. 방송사 쌍두마차의 한 축인 KBS에서 노동자 78퍼센트가 연대 파업 투표에 찬성했고, 언론노련이 대규모 연대 집회를 개최했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은 MBC 파업을 지지하는 전국 노조 대표자 결의대회를 소집했다.

이렇게 투쟁이 광범한 노동자 연대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노태우 정권은 실질적인 압력을 받았다. 정권 말기 반노태우 정서가 확산되는 속에서, 여기서 더 몰아붙였다가는 더 큰 투쟁으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지배자들의 위기감도 커졌다.

마침내 MBC 노동자들은 파업 50일 만에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 국장추천제를 폐지하는 대신 국장 해임 건의제를 도입하고, 해고자 문제는 복직을 적극 검토하며, 파업에 따른 민형사상·사규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연임을 노렸던 사장 최창봉은 이듬해 3월 사퇴했다.

더 중요한 것은, 무력감과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노동자들이 한 번 강력한 투쟁에 나선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보여 줬다는 점이다.

오늘 또다시 ‘공정방송 쟁취’를 내건 MBC 파업은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방송 통제에 집착하는 이명박 정부를 겨냥해야 한다. 20년 전에 그랬듯이 단호한 파업과 강력한 연대를 결합시켜서 승리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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