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클라이먼 인터뷰:
“자본주의는 정의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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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클라이먼은 미국 페이스대학 교수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며 특히 ‘시점간단일체계해석’을 통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일관되게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원장 정성진)의 초청으로 6월 중순에 방한한 앤드루 클라이먼을 〈레프트21〉이 만나 현 경제 위기에 대한 분석과 전망, 대안 등을 인터뷰했다.
1. 곧 한국에서도 출판될 당신의 책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를 통해 당신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통해 현재 대불황을 설명하고 있다. 2008년 시작된 경제 위기와 불황이 최근 유로존 위기가 보여 주듯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이 대불황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유로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불황은 계속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불황이 아니지만 생산과 고용 면에서는 전혀 평상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미국의 불황은 2009년 중반에 끝났다. 거의 3년이 지났지만 경기가 이전 수준으로 전혀 회복되지 못했다.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불황이 시작된 지는 4년 반이 지났는데, 이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번 불황이 금융위기도 아니고 금융위기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이미 몇 년 동안 더는 위기에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즉, 뭔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본격적인 호황도 불가능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윤율 저하, 그리고 낮아진 이윤율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익성이 낮다보니 투자도 둔화되고, 산출량 증가율도 하락하고, 소득 증가율도 낮아지고, 결국 부채가 크게 불어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하에서 강력한 경기 반등이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몇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는 대공황과 비슷한 극심한 불황이다. 그런 깊은 불황이 도래하면 자본 가치가 대량으로 파괴되고 부실 채권이 손실 처리되는 등의 사태가 올 텐데, 이런 상황은 원리상으로는 본격적인 호황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파산한 기업을 헐값에 인수한 자본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이윤율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황이 도래하기 전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수도 있고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자본가들은 이런 사태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무관하게 그런 일[혁명이나 체제 붕괴]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더 유력한 시나리오는 자본가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해 온 일, 즉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여기 저기 빚 보증을 해 주고, 기존의 부채를 더 많은 부채로 돌려 막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극심한 경제 위기와 불황을 피하면서 경기 연착륙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실제로 연착륙에 성공해 왔다. 이 같은 최선의 시나리오가 유지된다면 그 대가로 세계경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제는 20년이 돼 가는)과 흡사한 10년 이상의 상대적 정체기를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룰 때마다 부채 위기와 금융 위기는 더욱 악화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갈수록 주변국이 아닌 핵심국이 위기의 중심에 놓이게 되고, 위기의 여파도 국지적이지 않고 일반화되는 경향이 보인다. 미국에서는 정부 부채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이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실 ‘신뢰를 회복한다’는 말은 대부자들에게 ‘최악의 경우에도 미국 정부가 당신들이 돌려받아야 할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보증해 줌으로써 대부자들이 안심하고 계속 대출하게 해 준다는 말이다. 문제는 대부자들의 신뢰라는 것이 결국 미국 정부의 빚 보증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부채가 계속 증가하면서 채권자들과 금융시장의 신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저들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룰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이와는 다른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바로 아랍 혁명과 위스콘신, 월가 점거 운동, 그리스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격변의 가능성이다.
2. 현재 대불황의 원인에 대해 주류 경제학에서는 어떠한 근본적인 분석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좌파들 사이에서는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다른데, 어떤 이들은 금융화가 문제라고 주장하거나 또 다른 이들은 실질임금 감소에 따른 소비저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잘못된 데이터에 근거한 주장들이라고 본다. 나는 원래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의 결론을 미리 예정하고 그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나 역시 경제 위기에 관한 좌파들의 통설적 설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몇 데이터의 오류를 발견했고 이에 관해 더 깊이 조사해 봤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통설적 설명이 실제 데이터와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좌파들의 통설적 설명은 사실 신자유주의·금융화론과 과소소비론의 조합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배계급이 노동자 임금을 낮춤으로써 이윤율을 회복시켰다는 것이 신자유주의론의 한 축이기도 하다. 과소소비론자들은 이 설명을 차용하면서 과소소비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이터를 충분히 모았고, 그 결과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들은 네 가지 상호 연관된 주장을 내세우는데, 넷 다 틀렸다.
한 가지 단서를 달자면, 내가 언급하고 문제 삼는 모든 데이터는 미국에 한정된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기업의 총 산출량에서 노동자 소득 비중이 하락한 곳도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 영국과 아일랜드처럼 인접한 나라들 간에도 사정이 각각 다르다.
첫째, 신자유주의·금융화·과소소비론자들은 레이건과 대처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한 1980년대가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임금을 하락시켜 이윤율을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 보니 미국에서는 1970년대가 전환점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관찰된 모든 추세가 1970년대에 시작됐다. 저성장, 부채 증가, 불평등 확대 등. 그러니까 신자유주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대응이었다.
둘째,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이윤율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윤율’을 나 자신과 기업주들, 회계사들, 투자자들,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해하듯 ‘투자에 대한 수익률’로 이해한다면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기업들의 투자 수익률은 이윤을 얼마나 넓게 또는 좁게 집계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하락했거나 정체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모든 것을 이윤에 포함시킬 경우 이윤율은 계속 하락한 것으로 나온다.
주류 좌파들이 이윤율이 상승했다고 보는 이유는 이윤율을 ‘실제 투자된 돈에 대한 수익률’이라는 통상적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금융화론도 미국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 금융화론자들은 이윤을 실물 투자가 아닌 금융 투기나 배당금 지급 등의 용도로 새나가도록 장려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축적률이 낮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축적률의 저하는 이윤율 저하의 결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나는 또한 이윤이 생산에서 금융으로 새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윤 대비 배당금 지급, M&A 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산적 투자가 하락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윤을 재투자하는 것 말고도 기업들이 투자에 쓸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산업이 금융화 시대에 크게 성장했다. 기업의 배당금 지급 액수와 증권 투자가 대폭 늘어난 것도 차입 덕분에 가능했다. 이윤 대비 생산적 투자 비중은 낮아지기능커녕 높아졌다. 1947∼80년에 비해 1981∼2001년 사이에 더 높아졌다. 그러므로 축적률과 생산적 투자의 하락을 설명해주는 것은 신자유주의나 금융화가 아니라 이윤율이다.
마지막으로, 그들 중 특히 과소소비론자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 착취율이 높아진 결과 이윤율이 회복됐다고 말한다. 물론 미국에서도 실질임금이 형식적으로 하락하기는 했다. 그러나 임금은 노동자들이 받는 급여의 일부분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기업 연금, 의료보험 등의 혜택도 받는다. 많은 경우 사용자들이 공적 연금 보험료를 세금으로 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합해 보면 노동자들의 실질 급여는 지난 수십 년간 증가했고, 기업 부문의 총 산출량에서 피고용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1970년 이래 변함이 없었다. 미국 경제 전체를 보더라도, 미국 노동 인구의 소득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이래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이때 노동자들의 소득에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직·간접적 급여뿐 아니라 실업자, 복지 수급자, 은퇴 인구 등의 사회적 임금도 모두 포함된다(과소소비가 문제라고 주장하려면 이 모든 사람들의 소비를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3. 당신은 마르크스 가치론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에서 시점간단일체계라는 새로운 해석을 통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옹호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 가치론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내가 시점간단일체계해석(TSSI)을 발견하기 몇 년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견했기 때문에 나의 업적이라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연구자들이 상호 독자적으로 동일한 발견에 이르는 일은 과학사에서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기 때문인데, TSSI의 경우 연구자들을 괴롭힌 동일한 문제는 스라파 식의 정설적 마르크스 해석이 마르크스 자신의 해석과 명백히 배치되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들을 파고들다 보면 TSSI가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TSSI의 의의는 마르크스 가치론이 내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 준다는 데 있다. 내적으로 일관성 없는 이론은 우연히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어도 옳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TSSI는 마르크스 가치론을 그런 혐의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단지 마르크스 가치론이 내적으로 일관성 없다는 ‘증명’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 줄 뿐, 그 밖에 어떤 식으로도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해 주지는 않는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이래서 옳고, 따라서 누구나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이론적 측면에서 나는 다원주의자다. 절충주의자는 아니지만,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의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마르크스 가치론이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가치 법칙은 자본주의의 탄생부터 종말까지,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에서도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단지 물질적 상품만을 생산하는 체제가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는 체제다. 자본주의 생산의 목표는 처음 투입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 내는 데 있다. 그래서 일단 가치 자체가 자본주의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또 우리는 자본가들이 어떻게 당초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시한 답이 옳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라는 잉여가치 이론 말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마르크스 가치론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세계경제 위기와 관련해서다. 마르크스 가치론이야말로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 2차 대전 이후 시기를 통해 드러났고, 거기서 비롯한 부채 누적과 저성장이 결국 최근의 대불황을 불러왔으며, 그것이 각국 정부가 아직 불황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의 원인이 생산성 증대에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로버트 브레너를 포함한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 명제는 결국 가치와 연결돼 있다. 생산성이 오르면 물리적 산출량도 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단위 상품의 가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가격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이윤율에 하향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다수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조차 놓치고 있다.
4. 대불황 시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그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고장 났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압도 다수 인구에게 이익이 안 됐고 앞으로도 이익이 안 될 것이다. 본디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에 기초한 체제인 만큼 태생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익과는 대립하는 체제다. 그런데 ‘사회주의’라는 말은 스탈린주의 등에 의해 끔찍하게 왜곡된 용어인 만큼 그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공동체적이고 민주적인 체제여야 한다. ‘민주적’이라 함은 직접 생산자들이 권력을 지닌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공장 노동자뿐 아니라 사무실, 가게, 농장 노동자 등등이 다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자본주의 체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포기한 많은 좌파들이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그러나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를 대안으로 여긴다. 마르크스는 그런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자본》 3권에서 마르크스는 협동조합을 논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한편으로 협동조합은 사회주의적 미래상을 힐끗 보여주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을 재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협력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가 필요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기초 위에 사회를 건설하는 것도 필요하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가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
가치 법칙의 핵심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임금도, 복지 혜택도, 환경 보호도 최소화해야 한다. 왜 이런 법칙이 작동하는가?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장 경쟁의 형태를 띠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국가간 패권 경쟁의 형태를 띠든 간에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어디서나 경쟁이 있기 마련이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압력은 모든 자본가들을 옥죈다. 이런 압력은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가치 법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체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원칙일까? 마르크스 자신이 〈고타 강령 비판〉에서 자본주의 직후의 사회주의(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적용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가치도 없고, 상품도 없으며,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게 된다. 그가 말한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이란 한 노동자의 1시간 노동은 다른 노동자의 1시간 노동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와 통제는 직접 생산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을 단지 권력 행사를 통해, 혹은 투표행위를 통해 관철시킬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노동이 동등하다거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해야 한다거나, 직접 생산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한다는 것을 그저 선포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제 현실이 그런 원칙의 관철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다.
정치가 경제 관계를 좌우한다는 관념이 너무 팽배하다. 정치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마오쩌둥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은 현실에서 그다지 잘 먹히지 않았다. 경제적 토대가 현실을 우선적으로 규정하며 정치, 이데올로기, 법률 등이 거기에 조응한다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또한 마르크스 이론을 출발점 삼아 현대 사회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를 탈피해서 운영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가 자본주의로 퇴행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 같은 지적 작업은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뿐 아니라 변혁적 사회 운동을 고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다. 사회주의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비쳐져야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붕괴하고 대처가 ‘대안은 없다’고 선언한 뒤로 사회주의가 과연 현실적인 대안이냐는 물음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는 사회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당장의 활동을 가로막지는 않을지라도 각각의 운동이 총체적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것은 가로막는다. 총체적 사회변혁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식인들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말해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 체제에 관한 연구는 중요하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운동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이미 부족하지 않다. 튀니지 혁명 이후로 그리스,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투쟁이 분출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은 커다란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주류 정치 세력들의 해결책이 무엇 하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좌우를 막론하고 집권 정부들이 곳곳에서 교체되고 있다.
이 와중에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매우 위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주류 정치의 해결책이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대안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현재 주류 정치권 바깥에서 가장 유력하게 비쳐지는 대안은 파시즘인 것이다. 대다수 좌파들은 사회 변혁을 포기한 탓에 자본주의에 이런저런 성형 수술을 가해서 좀 더 정의롭게 만들어 보려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결국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파시즘에 길을 내주기 십상이다. 너무 종말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1930년대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분명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
인터뷰 최용찬·천경록
녹취·번역 천경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