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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 논쟁:
어떤 ‘노동 중심’이 돼야 하는가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파산 속에서 새로운 진보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백가쟁명 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너도나도 ‘노동 중심’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인 공통점이다. 통합진보혁신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유시민과 참여계 지도자들조차 ‘노동 중심’ 진보정당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시민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이제 와서 노동 중심을 말하는 데에서는 진정성을 느낄 수가 없다. 사실 유시민은 민주당 정부 고위직에 있을 때 노동자 투쟁을 비난하고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선거 도전이 결국 한나라당 좋은 일만 시킨다며 ‘사표론’을 펴 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노동자들은 진보적 과제를 수행할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을 발휘하도록 투쟁을 고무하고 조직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구실이 돼야 한다. ⓒ사진 출처 민주노동당

지금도 그는 “민주노총과 민주당의 전면적 결합”을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있다.

결국 유시민 등이 말하는 ‘노동 중심’은 노동자들을 득표와 재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뜻이 강하게 보인다.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 인사들이 ‘노동 중심’을 얘기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이들이 추진한 참여당과의 통합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노동 중심성을 크게 약화시킨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유시민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친자본주의 정당과의 통합이 노동 중심성을 훼손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묻지마 통합’을 위해 민주노동당 당권파 지도부는 강령과 정책, 당 구조 등에서 ‘노동 중심’이라는 정체성을 약화시켰다.

민주노동당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시작된 ‘민주노조 운동’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파업 등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조직화한 노동자들이 기성정당과 독립적인 진보 정당 건설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IMF 경제 위기 이후 노동조합 운동이 위기를 맞으며 민주노동당도 위기를 겪었다. 위기의 핵심은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협상이나 부문적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전략 즉, 개혁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지만 그 양상은 다양했다.

주류 언론과 지배자들은 이런 위기를 노동조합 운동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마녀사냥과 공격의 기회로 활용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과 진보진영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조합 운동과 조직 노동자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이라는 모델과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이끈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당’이라고 비판하며 ‘국민정당화’하려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민주노총당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당의 주도권을 차지한 자민통 경향 지도부의 전략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 내 경쟁에서 벗어난 당권파 지도부는 자본가 정당과의 동맹을 통한 집권이라는 자신들의 전략을 거침없이 추진했고 참여당과의 통합은 노동 중심성을 더한층 후퇴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총 특별위원회’(이하 새정치특위)가 새로운 노동 중심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고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노동 중심 진보정당은 “강령과 목표에서 자본주의 극복의 가치와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천강령에서도 노동 중심의 가치가 실현돼야 한다”는 새정치특위의 지적도 전적으로 옳다.

양경규 전 공공연맹 위원장이 주도하는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 모임’이 제시한 원칙 - 반자본주의, 참여당계와의 통합 반대, 연립정부 참여 반대 - 도 이런 취지와 통하는 점이 있다.

노동자 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중심성을 일관되게 지키려면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자본가들과는 독립적인 정당이 필요하다. 비록 개혁주의 정당의 노동계급 기반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을 매개로 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말이다.

한편 진보신당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거대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리정치기구에 불과한 … 진보정치는 … 다른 낡은 정치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한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직 노동’과 ‘미조직 노동’을 대립시키는 이런 이분법은 옳지 않다.

따라서 이런 주장에는 비정규직화·정리해고에 맞서 “거대 조직노동 운동이 수행한 96~97 총파업과 2003 비정규직 철폐 요구 및 열사 정국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에스제이엠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은 억압적 ‘거대 조직노동’과 저 애처로운 ‘배제된 노동’ 중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박가분, 〈한겨레〉) 하는 비판은 타당하다.

진보정당에 ‘노동 중심’이 필요한 까닭은 단순히 그들이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고 노동자들이 늘 가장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진보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거대한 작업장으로 끌어 모으고, 그들을 전국적으로, 국제적으로 연결시키고, 도시로 집중시킨다. 무엇보다 그들이 일손을 놓으면 자본가들은 이윤에 타격을 입는다. 이는 노동계급에게 엄청난 정치적 잠재력을 부여한다. 마르크스가 사회 변혁을 위한 그의 정치에서 기본으로 삼은 것은 노동계급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힘이었다.

이 잠재력은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과 자본가들에 스스로 맞서 싸울 때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투쟁을 고무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노동 중심’을 구현하는 올바른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