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체제’가 진보의 갈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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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친민주당 지식인들과 진보진영 일부에서 ‘2013년 체제론’을 주장하고 있다.
2013년 체제는 백낙청 교수가 처음 주창한 개념이다. 백낙청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을 ‘87년 체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하듯이, 2013년 이후의 세상 또한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또 한번 크게 바꿔 보자”고 주장한다.
‘의회·행정 권력을 교체해서 남북 평화, 보편적 복지, 정의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평화·정의를 파괴해 온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2013년 체제론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김종엽 교수는 “총선과 대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승리가 아니라 양대 선거 모두의 승리가 더욱 필수적”이며 “새로운 체제 수립의 관건은 … 연합정치 성과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백낙청 교수를 중심으로 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는 4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2013년 체제론은 곧장 이런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이미 앞서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평화, 복지,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는데 과연 이번에는 민주당 중심의 정권 교체가 ‘체제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민주당 정권 10년은 평화, 복지, 정의에 가까워지는 과정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세계 평화를 망쳐 놓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파병을 적극 밀어붙였다.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해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했다. 제주 해군기지 역시 민주당 정부가 적극 추진한 사업이었다.
정리해고제를 통과시켰고 비정규직 악법을 만들었으며, 한미FTA 체결, 대학 등록금 폭등이 이뤄진 ‘민주정부’ 10년은 복지와도 거리가 멀었다.
입으로는 ‘특권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외쳤지만 ‘삼성X파일’의 비리 왕초 이건희도 조사·처벌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무현은 자서전에서 스스로 “민주주의·진보·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토로했다.
민주당의 배신이 낳은 대중적 환멸 덕분에 이명박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전여옥은 “한나라당을 제1당으로 만드는 데 최고의 공을 세운 것은 바로 노 대통령”이라고 했다.
민주당의 맨얼굴
이 때문에 2013년 체제론을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민주당의 ‘혁신’을 주문했다. 백낙청 교수는 “철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엄정한 ‘복기’를 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지난해 말 민주당이 NGO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고 무상의료·무상교육 등을 내걸고 “좌클릭”을 할 때는 잠깐이나마 혁신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민주당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총선에서 김진표 같은 대표적 ‘새누리당 X맨’들을 공천했고 한미FTA, 민간인 사찰, 제주 해군기지 등 중요한 쟁점마다 오락가락하며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
이처럼 믿지 못할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4월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총선 패배의 탓을 “좌클릭”으로 돌리며 그나마 내뱉었던 개혁적 언사들을 철회하기에 급급했다.
이것은 민주당이 비록 포퓰리즘적 기반을 갖고 있으나 주로 기업주들의 돈과 인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근본에서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는 부르주아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새누리당 후원금은 67억 원, 민주당 후원금은 45억 원으로 엇비슷했다(통합진보당은 1억 3천여만 원). 이 때문에 민주당의 ‘혁신’은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와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매번 실패와 배신으로 끝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2013년 체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당과 ‘혁신’의 한계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변호하는 태도를 취한다. 예컨대 김종엽 교수는 “대의를 위해 묵은 감정적 앙금을 털어낼 대범함”이 필요하다며 “이전의 정책이나 입장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다, 않다는 식의 과거지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에 대한 온당한 불신과 비판을 “감정적 앙금”이나 “과거지향적 태도”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심지어 민주당 정부의 실패를 ‘진보진영이 민주당과 협력하지 않고 비판·반대만 한 것’에서 찾기까지 한다. 김기원 교수는 “선거에서뿐 아니라 집권 후 통치에서도 연대가 필수적인데, 이게 제대로 안 된 것이 민주정부 10년을 헤매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다.
백낙청 교수도 “이념적 순수성을 다소 희생하면서 현실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거나 “소수당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거창한 주장만 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를 내세[웠다]”며 진보진영과 진보정당을 비판한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노동당 등은 민주당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었다. 독립적인 대안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우파에 맞서야 한다는 이유로 민주당과 무비판적 동맹을 맺곤 했다.
적반하장
이런 악순환은 이번 총선에서도 반복됐다. 민주당과의 연대를 최상의 과제로 삼으면서 진보정당의 독자적 정체성은 약화됐다. 공동 공약에서 핵발전소 ‘폐쇄’는 핵발전 정책 ‘재검토’로 약화됐고, 한미·한EU FTA ‘반대’는 ‘재협상’으로,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도 ‘재검토’로 후퇴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진보 염원 대중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고, 반면 이명박과 박근혜는 제주 해군기지, 한미FTA 등을 밀어붙이며 우파를 결집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이명박과 박근혜는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박근혜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럼에도 2013년 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선에서 졌더라도 대선에서 승리하면 2013년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며 ‘묻지마 야권연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민주당과 무비판적인 동맹을 맺어서 설사 대선에서 야권이 승리하더라도 진정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세계경제 위기가 깊어질수록 집권 세력이 자본주의 경제의 구원투수로 나서야 한다는 압력은 강해질 것이다. 유럽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으로 복지삭감, 정리해고 등 노동자의 삶을 공격하려 들 것이다.
이미 프랑스 사회당 올랑드 정부는 경제 위기 압력 속에 대선 핵심 공약이었던 부유세도 유명무실화하며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도 집권 직후 IMF 위기 탈출을 이유로 구조조정, 대량해고 등 개악을 벌였다.
2013년 체제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다. 백낙청 교수는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집권 세력의 책무다 … 국가경영의 책임을 맡는 순간 사정은 달라진다”고 말한다.
김기원 교수 역시 “국가의 효율화나 사회적 신뢰문제를 도외시해선 곤란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정리해고가 없을 수 없”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 아예 틀린 구호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2013년 체제론’이 ‘같이 정권을 만들었으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로 평화·복지·정의를 이룰 수 있는 진정한 동력인 진보진영의 독립적 투쟁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의회와 정부를 장악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체제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기를 이룬 ‘87년 체제’에서 변화의 진정한 동력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대중 투쟁이었다.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청년 들이 주역이 된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고 뒤이어 벌어진 7,8,9월 노동자 투쟁은 민주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
‘이명박근혜’를 패퇴시키고 평화, 복지, 정의를 쟁취하고픈 광범한 염원을 실현하려면 오락가락하는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이 아니라 이런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을 핵심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또 평화를 가로막는 제국주의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의를 파괴하는 고장 난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진보진영이 우파에 반대할 뿐 아니라 민주당도 비판하며 이런 급진적 주장과 대안을 제시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투쟁을 더한층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