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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뿌리인 ‘10월 유신’ 40년:
‘1퍼센트의 꿈’을 위한 친위 쿠데타

올해 10월 17일은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 40년 되는 날이다. 이번 호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탄생과 과정, 몰락을 돌아보며 박근혜 정치의 본질을 살펴본다.

최근 박근혜의 ‘사과’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듯하다. 조갑제 같은 구제불능의 우익은 “아버지와 조국에 침을 뱉은 반역사적 사과”라고 흥분한 반면, 인혁당 유가족들은 “제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차라리 가만 있어 달라”고 일침을 놓았다.

사실, 박근혜의 ‘사과’는 뻔뻔한 ‘변명’에 가깝다.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아버지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만인 1972년에, 똑같은 이유로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지금은 역사관이 된 옛 서대문형무소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더욱 급속하게 자본을 축적하려고 박정희는 온 사회를 감옥으로 만들었다. ⓒ김현옥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체제는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된다. 경제는 위기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경제성장률은 1969년 13.8퍼센트였지만 이듬해에는 7.6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자명한 사실을 알리려 분신을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가혹한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노사분규’는 1970년 1백65건에서 1971년 1천6백56건으로 폭증했다. 베트남 파견 노동자들은 한진그룹 본사 빌딩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 버렸다.

참혹한 생활을 못 이긴 도시 빈민들의 울분은 광주대단지 폭동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국가 기구의 일부도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법관들은 이른바 사법파동을 일으켜 박정희에 공공연히 항명했다.

요컨대 박정희식 고속 축적 체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커져 가고 있었다. 대중은 변화를 원했고 이는 야당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1971년 대선에서 이런 변화의 바람이 절정에 올랐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후 그는 행방불명됐는데, 프랑스에서 박정희의 요원에게 암살된 뒤 양계장 분쇄기에 넣어져 사료로 쓰였다는 증언이 있다)은 당시 대선을 이렇게 묘사한다.

“김대중 유세에 모인 청중은 그 시각따라 예비군 동원이네 뭐네 하는 정부의 방해공작에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운집한 청중들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김대중 유세에 운집한 인파들이 내뿜는 열기와 분위기에 숨이 막힐 만큼 질려 버렸다. 민중은 분명히 김대중의 편이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야당은 기층 민중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맺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박정희식 경제 성장에 대한 야당의 포퓰리즘(민중주의)적 비판과 더불어 무엇보다 박정희 독재의 억압적이고 야만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어쨌든 박정희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백억∼7백억 원을 선거자금으로 썼는데, 이는 당시 정부 예산의 10퍼센트를 넘는 천문학적 규모였다. 게다가 이듬해 총선에서 사실상 여당이 패배한 사실은 박정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도미노”

무엇보다 박정희를 두렵게 만든 것은 국제 상황의 변화였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은 파국에 이르렀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은 사실상 항복선언인 셈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군을 감축하는 대신 힘의 공백을 대중국 유화정책으로 만회하려 했다.

박정희 같은 반공 독재자들에게 이는 악재였다. 언젠가 자신들도 남베트남의 독재자 티우처럼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대외정책 상의 극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남한은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마지막 도미노처럼 보였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의 명분으로 ‘국가 안보 위협’을 든 것은 일말의 진실이 있다. 즉 1인 독재에 기반한 고속 축적 체제가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억누르고 착취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돌파하려 한 것이다.

좀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유신 쿠데타는 베트남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 승리와 이에 고무된 저항 분위기에 맞서 국제적 차원(특히 아시아)에서 벌어진 반동적 대응, 즉 국제적 계급투쟁의 일부였다. 예를 들어 아시아에서만도 1970년 캄보디아의 우익 쿠데타, 1971년 타이 군부의 의회 해산과 계엄선포, 1972년 필리핀 마르코스의 군부 쿠데타 등이 연이어 벌어졌다.

어쨌든 박정희는 이런 ‘난국’을 돌파하려고 초권위주의적 억압을 강화했다. 1971년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사실상 모든 산업에서 쟁의행위를 금지했다. 전태일의 무덤에 침을 뱉는 짓이었다.

1972년 들어 남북대화 국면이 열렸을 때도 박정희는 이를 체제 단속에 이용했다. 예를 들어 박정희는 7·4 공동성명 직후 ‘유럽 간첩단 사건’ 등 각종 간첩 사건으로 수감된 정치범 30여 명을 싹쓸이 하듯이 처형해 버렸다. 그러고는 급기야 그해 10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고 만다. 이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민주주의의 껍데기마저 부숴 버리는 것이었다.

직전 대선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출마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더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는데, 그 공약은 이행한 셈이다. 유신체제에서는 국민들의 투표도, 번거롭게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박정희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자기 손으로 임명할 권한까지 얻었다.

긴급조치, 처형… 박정희식 민주주의

그런데도 불안했는지 그는 이른바 ‘긴급조치’를 남발해 저항을 억눌렀다. 심지어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긴급조치 위반이라며 탄압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일컬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그 민주주의는 처형과 고문, 납치 등으로 유지됐다. 인혁당 사건 처형, 장준하 암살(의혹), 김대중 납치 살해 기도가 대표적이다.

또한 유신 쿠데타와 더불어 이제는 중화학공업화와 수출 1백억 달러를 달성해야겠다며, 또다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급속한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위해 저임금 기조는 바꾸지 않았고, 노동시간과 산업재해는 급격히 늘어 갔다. 노동 규율과 통제는 더욱 엄혹해졌다. 유신체제는 한국 자본주의가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일종의 채찍이었다.

물론 이런 야만적 체제에서도 이득을 본 자들이 있다. 재벌은 유신체제 하에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진정한 재벌로 성장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말마따나 “현재 회사 이름으로나 회사 로고로 전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대기업들을 창출해 낸 것은 이런 ‘중공업 추진 정책’이었다.”

물론 이 과정은 정부의 막대한 특혜(해외 차관 지원, 국민 혈세 지원 등) 덕분에 가능했다. 이에 따라 1970년에서 1983년 기간 동안 현대그룹은 자산이 1천7백16만 달러에서 71억 5천8백78만 달러로, 대우는 8백39만 달러에서 53억 7천62만 달러로, 삼성은 1억 7천5백84만 달러에서 54억 2천84만 달러로 폭증했다.

결론적으로 유신 쿠데타는 북한 위협과 체제 경쟁을 빌미로 불만에 찬 노동자·민중에게 채찍을 가해, 위기에 빠진 경제를 다잡고 더욱 급속한 자본 축적을 도모하려는 반동 시도였다. 노동자·민중에게 이 체제는 영원히 제대할 수 없는 군 생활과 마찬가지였다.

박근혜는 사과랍시고 “과거가 아닌 미래로 국민대통합의 정치로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이것이 과거 유신 시절 박정희가 외친 “국민 총화 단결”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한국 자본주의가 또다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가 다시 등장해 5·16과 유신을 정당화하고 일부 지배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불길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기득권에 대한 불만, 지배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자본 축적에 매진하라는 점에서 두 부녀의 메시지는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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