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범죄와의 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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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들은 연일 흉악 범죄를 경쟁적으로 보도하면서 바로 우리 곁에 살인범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고조시킨다. 〈조선일보〉가 평범한 청년의 사진을 ‘나주 성폭행 사건’ 범인이라며 1면에 싣는 오보를 터뜨린 것은 언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비극적인 사건들을 얼마나 이용하고 싶어 안달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처럼 언론, 정부, 보수 정치인, 경찰과 검찰 등 지배자들은 범죄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한껏 이용한다.
지배자들이 범죄를 부각시키며 얻는 가장 큰 이득은 범죄에 강력하게 대처하는 태도를 보일 때마다 ‘반사회적 분자들에 맞서 약자를 보호한다’는 자신들의 거짓을 광범한 사람들에게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위축시키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대선이 다가올 때마다 우익들이 강력범죄 소탕을 단골 메뉴로 사용하는 것은 강력범이라는 ‘공공의 적’에 맞서 싸울 테니 자신들에게 권력을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범죄자가 우리 주변에 살고 있어서 ‘범죄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것일까? 경찰청이 발표한 지난해 범죄 통계를 보면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전체 인구의 0.048퍼센트이고, 이 가운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0.00087퍼센트다.
사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흉악 범죄보다 실업, 해고, 복지 삭감, 파산, 연금 고갈, 건강 등의 문제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산다.
공생
‘범죄와의 전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90년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이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대대적으로 홍보한 ‘범죄와의 전쟁’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조직 폭력배가 아니라 정권 위기 상황 모면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3년 전, 19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은 군부독재를 물러서게 만들고 임금과 노동조건을 비약적으로 개선하고 노동운동을 발전시켰다.
당시 지배자들은 걱정에 휩싸이긴 했지만 높은 이윤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1989년 상반기에 접어들면서 고도성장의 배경이 됐던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이 끝났고, 국제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고 경기는 급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경제 상황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압력에 밀려 부분적 양보를 통해 노동자 투쟁을 체재 내로 흡수하려던 노태우 정권의 초기 의도를 좌절시켰다.
노태우는 이때부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고, 1989년 봄 ‘좌익 폭력 세력 척결’을 앞세운 ‘공안 합수부’를 구성해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등에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투입했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22일 김종필과 김영삼을 끌어들여 이른바 ‘3당 합당’을 해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국회를 여대야소로 바꿨고, 즉시 ‘민주화’ 조처들을 하나씩 거둬들였다.
1990년 들어 보안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있다는 것을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것을 계기로 대규모 저항 운동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수만 명이 모여 보안사 사찰 규탄 집회를 하던 바로 그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즉시 대학과 노조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모든 외근 경찰관에게 총기를 휴대케 해 총기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잇달았다.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한답시고 헌병 8백70명을 동원해 서울 시내 20개 지역에서 M16 소총을 지닌 채 순찰 활동을 벌인 결과는 조직 폭력배 소탕이 아니라 시위에 참가한 명지대생 강경대를 쇠파이프로 때려 죽인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감히 노태우처럼 군대까지 동원해 공격할 수는 없었다. 우리 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를 이용해 정치 위기를 상쇄하려는 의도는 매한가지였다.
이명박 정권은 2009년 1월 용산에 가난한 철거민들의 허름한 망루를 경찰 1천4백 명과 경찰 특공대, 헬기까지 동원해 공격했다. 전쟁을 방불케 한 진압 작전으로 결국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즉시 항의 운동이 시작됐고 정권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용산 참사 나흘 후 군포 연쇄살인의 범인 강호순이 잡혔다. 정권은 즉시 이 흉악한 범죄를 자신들의 위기를 벗어나는 데 이용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이 경찰청에 보낸 공문은 “촛불 시위를 확산하려는 반정부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용산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주문했다.
약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신창원이 탈옥했을 때 이를 빌미로 전국에 대대적인 검문 검색을 강화했고 그 결과 신창원뿐 아니라 당시 민주노총 총파업을 이끌었던 활동가 수십 명을 구속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강력 범죄 소탕 1백일 작전’을 선포하고, 조직 폭력배를 소탕하기 위한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노태우 정권에 이어 13년 만에 다시 만들었다. 노무현이 ‘조폭 검거령’을 내린 것과 같은 시기에 ‘전국 경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는 “그동안 시위 현장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며 시위대가 30분 이상 도로를 점거할 경우 곧바로 진압부대를 투입한다는 결정을 발표하기도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 우익들은 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을 통해 승리하는 고전적 방법을 다시 들고 나온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 세력은 자신들이 정권을 쥐고 있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학교 폭력 문제를 크게 부각했다. 당시 검찰은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올해 4월 총선 직전 학교 폭력이 부각됐을 때 다시 이 ‘운동’이 등장했다)에 앞장섰다. 이른바 ‘일진’이란 말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것도 이때였으며, 청소년 보호법을 악용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진보적 매체들까지 청소년 유해 매체로 공격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나라당 세력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지금 이명박과 우파가 처한 위기와 모순도 깊어서 그들이 외치는 ‘범죄와의 전쟁’의 약발이 얼마나 통할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