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범죄와의 전쟁’:
검찰·경찰 권력을 강화하려는 우파 정부의 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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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조직폭력과 마약을 명분으로 신판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지난해 12월 윤석열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정부는 16일 검찰청법 시행령을 개정해 ‘조직범죄’와 ‘마약 범죄’를 검찰의 수사 가능 범죄에 포함시킨다고 공표했다. 민주당이 법을 개정해 검찰 수사 범죄를 ‘부패 범죄’와 ‘경제 범죄’로 한정한 바 있는데, 법무부는 두 범죄를 경제 범죄에 포함시켰다.
같은 날,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이 전국 6대 지검 마약·조직범죄 전담 부장검사 등을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두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전담 검사, 경찰청·관세청·해양경찰청·국가정보원 등과 수사 공조(협의체) 추진 등을 결정했다.
법무부 장관 한동훈은 “서민 괴롭히는 깡패 수사, 마약 밀매 수사, 보이스피싱 수사, 공직을 이용한 갑질 수사 등이 ‘진짜 민생’을 챙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밝히기를, 최근 한국은 마약 범죄가 급증해 마약 청정국 지위를 잃었으며, 마약유통사범이 급증했다. 반면, 조직폭력과 보이스피싱 등의 조직범죄는 최근 처벌 인원이 급격히 줄었다.
검찰의 직접 수사권 축소로 범죄 조직들에 대한 수사 역량이 약해졌기 때문에 상황이 악화됐다는 주장인데, 이는 문재인의 검찰 수사권 약화가 반민생적이었다는 암시이다.
신임 경찰청장도 경찰 우선 과제로 마약 범죄와 조직적 사기 범죄 단속을 강조했다. 이는 경찰 수사력을 에둘러 깎아내린 검찰에 대한 반박 성격도 있겠지만, 한편에선 검·경의 협력 가능성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찰도 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경찰력과 경찰권 행사를 강화하기를 바란다.
윤석열도 올해 7월 말 서울 신촌의 파출소를 방문해, 일선 경찰들에 대한 총기 지급과 사용 강화를 지시했다.
보수 정부들이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우는 이유
윤석열이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이유는 지배계급이 겪고 있는 경제·안보 위기 때문이다. 특히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상황이 심각하다. 게다가 지금의 위기는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로 인한 위기이기 때문에 한층 해결이 까다롭다.
사용자들은 물가 급등과 생계비 위기를 배경으로 임금 인상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될까 봐 걱정한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위기 대응은 체제 수호(보안)라는 성격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흉악 범죄와 그 피해를 부각시켜서, 체제 실패의 책임을 지엽말단 문제로 전가하고 국가가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등 민생 범죄를 강조하는 이유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쿠데타 직후 범죄 소탕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또한 우파 정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개방·연대·관용보다는 위축·불신·무관용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개인들이 국가에 의존하게 되고, 경찰력 강화가 정당화되며, 기성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고립·위축시키기 쉽다.
윤석열 정부는 법질서 수호자로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고, 범죄 수사와 처벌 강화뿐 아니라 범죄 예방을 핑계로 경찰 무장을 강화하려 한다.
윤석열은 전 뉴욕시장 줄리아니의 강한 경찰을 모델로 얘기하는데, 이런 언행은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는 효과를 누릴 수는 없다. 범죄는 자본주의, 특히 부패가 심해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필연적으로 달라붙는 기생충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노태우 정권 때만큼 첨예하지 않아서 지배자들도 권위주의적 방식보다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타협 기제들을 이용하는 게 좀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위기가 더 깊은 수준이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은 어땠나
노태우는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조직폭력과 마약 등 흉악 범죄를 소탕해 “민생 치안”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찰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됐고, 일선 파출소에까지 M16 소총이 지급됐다. 그 결과, 정부는 폭력범 2만여 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적 압박에 쫓긴 경찰들이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거나 고문 수사하는 등 경찰의 가혹 행위가 늘어났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도 범죄 예방을 빙자한 자유 억압과 폭행, 고문 등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1991년 9월에는 시위 진압에 총기가 쓰이면서 시위 참가자가 아닌 귀가하던 시민(당시 서울대 대학원생 한국원 씨)이 경찰 실탄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이 생겼다.
1980년대에 이미 사용자들이나 정부는 구사대나 철거반 등의 용도로 조직폭력배들을 이용해 왔다. 그래서 적지 않은 조폭 검거는 경찰과의 거래 속에서 이뤄졌다는 평도 많다. 이후 조폭의 수익 사업은 합법을 가장한 기업형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직접적인 계기는 그 일주일 전, 군내 방첩기관인 국군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 폭로된 사건이었다. 김대중·노무현 등 야당 정치인들부터 노동·학생 등 재야 사회운동가들까지 감시 대상이었고, 개인별 사찰 카드엔 유사시(계엄 선포 등) 감시 대상들을 즉시 검거할 목적의 정보들도 기록돼 있었다.
정권을 향한 비난과 항의가 커졌다. 전두환의 후임으로 그 자신이 보안사령관을 지냈던 노태우의 대답은 범죄와의 전쟁 선포와 기만적인 보안사령부의 명칭 변경(기무사령부)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이른바 ‘3저(환율·금리·유가) 호황’이 1989년경에 끝나면서 심각한 경제 불안정이 오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또한 1987년 이후 등장한 조직 노동계급의 전투적 저항을 억눌러야 했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3월 검·경·안기부·보안사 등의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본격적으로 ‘공안정국’(보편적인 국가 탄압을 가리키는 당시 용어)을 조성했다. 1990년 초에는 3당 합당으로 국회의원 216석의 ‘보수대연합’ 정부를 꾸렸다.
그러고도 정치적 위기를 막지 못하자, 그해 가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경찰력 강화, 검문·검색 강화, 대대적인 검거 선풍(60여만 명 넘게 검거) 등을 벌인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조폭과의 전쟁은 노동자 투쟁 탄압이나 좌파 검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1989년 공안정국은 이듬해 범죄와의 전쟁을 거쳐 1991년 봄 ‘분신 정국’으로 불리는 폭력적 시위 진압으로 이어졌다. 그 시기에 국가보안법이 개악됐고, 경찰청이 출범했으며, 수백 명의 정치적 구속자가 생겼다.
어느 누구도 윤석열 정부가 선의로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실제로 질 나쁜 범죄를 상당 정도로 없앨 것이라고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