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속의 적색 ― 성소수자 해방운동과 마르크스주의 ②:
동성애 억압의 뿌리와 자본주의 가족제도
〈노동자 연대〉 구독
〈레프트21〉은 성소수자 해방 운동에 연대하며 성소수자 해방의 쟁점을 연재한다. 연재 글에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반박하고, 억압의 뿌리를 파헤치고, 성소수자 해방의 전망을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진 않았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기에 동성애는 자연스럽게 용인됐다.
어떤 사회에서는 동성 간 성행위가 규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몇몇 성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성 정체성이나 성지향을 가진 사람의 집단을 고정적으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들어서였다. ‘동성애자’라는 말 자체가 처음 생긴 것이 1869년이다.
초기 인류 사회의 생활방식이 남아 있는 공동체들에서 동성애가 억압받지 않았다는 여러 증거들이 존재한다. 가령,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성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성의 행동을 선호하는 남성과 여성은 그가 원하는 성역할로 바꿀 수 있었고, 동성과의 성관계나 결혼도 용인됐다. 유럽 식민지배자들은 북아메리카에 처음 상륙했을 때 ‘여성처럼’ 행동하면서 남성과 결혼한 남성들을 발견했고, 이들이 그 공동체에서 높게 평가됐다고 기록했다. 또, “두 개의 영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식민 지배 이전 라틴 아메리카 여러 문명들에서 발견됐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절에도 남성 간 사랑을 찬양한 예술 작품들이 풍부하다. 철학자 플라톤은 남성 간의 사랑을 “천상의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동성 간 사랑이 평범한 삶의 일부였음을 보여 주는 수많은 이슬람의 예술, 문학, 설화, 시가 있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 지역의 다양한 얘기를 묶어놓은 《천일야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들도 성이 해방된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노예와 여성에 대한 지독한 차별이 존재했다. 그래서 이 사회의 여성 간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10대 소년과 성인 남성 간의 성행위가 용인됐지만, 그 사회의 성역할과 위계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랬다. 그래서 “능동적” 남성과 “수동적” 소년 간에 적절한 나이 차가 있어야 했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단지 주인의 재산일 뿐이었고 노예 강간이 허용됐다.
중세 ‘가톨릭의 시대’는 어땠을까? 가톨릭 성서들이 동성 간 성행위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오늘날 동성애 혐오와는 달랐다. ‘방탕한’ 특정 행위가 비난받은 것이지, 특수한 인간 유형이 비난받았던 게 아니다. 게다가 이성 간의 오럴섹스나 항문성교, 피임, 낙태 등 생식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든 성행위가 비난받았다.
중세에도 시기에 따라 억압의 정도는 달랐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직후 동성관계에 대한 특별한 박해는 없었으며, 이런 느슨한 완화기는 몇 세기 더 지속됐다. 8세기 무렵부터 12세기까지 서유럽에서 동성관계에 대한 특별한 반발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 동안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동성들 사이의 다정한 관계가 피어올랐다. 가톨릭 역사가들은 그것이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만일 당시 사회가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반감이 있었다면 이것을 너그럽게 봐 주진 않았을 것이다.
“천상의 사랑”
이런 사실들은 동성애 억압이 인류 사회에서 필연적인 것도, 초역사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어떤 시기에는 동성애 억압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어떤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성에 대한 태도가 사회 체제의 변화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를 봐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저작은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년)이다. 엥겔스는 매우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성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한 극소수 중 한 명이었다. 엥겔스는 이 책에서 여성 차별과 가족제도, 그에 따른 성 억압이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약 1만 년 전, 농업이 발전하기 전(인류 역사의 95퍼센트가 넘는 기간)에 인류는 수렵·채집으로 생활했다. 이 시기에 여성이나 동성애는 지금처럼 차별받지 않았다. 이 사실은 인류학자들이 19~20세기까지 살아남은 수렵·채집 사회들을 조사한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성의 채집 활동으로 공동체 식량의 절반 이상이 공급됐기 때문에 양성평등이 가능했다.
그러나 목축을 이용한 농업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잉여 생산물 ─ 하루하루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재화들 ─ 과 함께 재산 축적 가능성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 초기의 잉여는 극소수 지배계급 수중에 집중됐다.
이제 남성이 사회의 부를 대부분 생산하는 형태 ─ 경작과 목축 ─ 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쟁기를 끌거나 소를 모는 일이 어린 아이들을 젖 먹이고 돌보는 일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사회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 짝짓기와 집단적 육아 관행도 사라졌다.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배타적인 일부일처제 가족이 발전했다. 이런 가족 안에서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취급됐고, 하는 일도 집안일과 자신의 자녀만을 돌보는 것으로 국한됐다. 엥겔스는 이를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다. 이 과정은 생산력 발달의 특정 단계에서 수립된 생산관계가 성 억압을 낳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에서 특정한 성이 억압받는 이유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뿌리를 둔 가족제도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더는 가족은 생산의 단위가 아니다. 그러나 가족제도는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데서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본가 계급은 가족을 통해 그들이 착취하는 노동자들과 차세대 노동자들을 거의 공짜로 재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여성의 본분은 아이를 낳고 돌보는 일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은 가족에 대한 헌신을 강조함으로써 더 광범한 계급의 단결을 가로막는 협소한 보수적 세계관을 부추길 수 있다. 또, 가족제도를 통해 여성과 동성애자 등을 차별함으로써 이들을 더 낮은 임금으로 더 많이 착취하고, 노동계급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유지하고 분열하도록 부추긴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남성과 여성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성애적 가족만을 ‘정상 가족’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들은 ‘정상 가족’을 뿌리째 뒤흔드는 악으로 여겨지고 체계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는 동성애 억압이 줄어들 여지도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오래된 촌락 공동체가 붕괴했다. 젊은이들은 독자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가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도시는 익명의 삶을 보장했다. 이 모든 것이 동성애가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배자들에겐 성에 대한 제한이 훨씬 중요해졌다. 그들에겐 여전히 견고한 가족제도가 필요했고, 가족은 재확립됐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는 일련의 억압적 법률을 만들고 본보기가 될 만한 법정 사건들을 동원해 모든 ‘비정상적’ 성애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과학’을 동원해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까지 퍼트렸다.
동성애 혐오와 차별은 인간 본성이 아니고, 차별을 통해 유지되는 계급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적 관계를 폐지할 때만 성 억압도 없앨 수 있다는 뜻이다.
‘성소수자 해방을 위한 투쟁과 성 해방’에 관해 더 읽을거리로는 아래의 기사들을 추천합니다.
👉 영국 트랜스 여성 마르크스주의자 로라 마일스의 방한강연: 트랜스젠더·성소수자 차별과 해방 https://ws.or.kr/article/23516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3: 노동자 혁명은 성 해방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https://ws.or.kr/article/18983
👉 마르크스주의, 퀴어 이론, 트랜스젠더 정치 - 퀴어 이론과 그 정치 https://marx21.or.kr/article/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