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영국 트랜스 여성 마르크스주의자 로라 마일스의 방한강연:
트랜스젠더·성소수자 차별과 해방

이 글은 2018년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마르크스주의 포럼 ‘맑시즘2018’에서 로라 마일스가 한 연설을 녹취한 것이다. 로라 마일스는 당시 영국 대학노조(UCU) 전국집행위원이었고,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이며, 트랜스젠더 해방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책갈피)이 있다. 사각 괄호([ ]) 안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추가한 것이다.

당시 로라 마일스의 연설과 한국어 순차 통역 영상은 여기서(클릭) 볼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삶도 아름답다”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자긍심 행진 ⓒ출처 Guy Smallman

이 자리에서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 차별과 해방에 대해 말씀드릴 기회를 갖게 돼 매우 영광입니다.

어떤 종류의 차별이든 그것을 둘러싼 조건과 상황을 먼저 봐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양극화가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반영해 어떤 나라에서는 성소수자 처지가 나아졌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악화했습니다.

예컨대 터키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자긍심 행진이 금지됐고 경찰에게 공격받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운전면허를 딸 수 없습니다. 정부가 트랜스젠더를 정신 질환자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헝가리에서는 몇 년 간 자긍심 행진이 경찰과 파시스트 정당인 요빅의 당원들에게 공격당해 왔습니다.

저는 영국 상황에 대해서 말씀 드릴 텐데, 있다가 여러분에게서 한국 상황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영국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범죄가 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나오미 허시입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최근에 살해당한 트랜스 여성으로, 두 달 전 런던의 호텔 방에서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많은 트랜스 여성들처럼 그녀도 유색인이었습니다. 살해당한 트랜스 여성 중에는 유독 유색인이 많습니다.

2018년 혐오 범죄로 살해 당한 트랜스 여성 나오미 허시 테니스와 초콜렛을 좋아한다던 그녀의 마지막 트윗은 유색인 트랜스 여성들을 상대로 한 살인과 범죄가 늘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나오미 허시 트위터

혐오 범죄로 목숨을 잃는 트랜스젠더들은 국제적으로도 많습니다. 예컨대, 2016년과 올해[2018년] 유엔 보고서는 트랜스젠더와 여타 성소수자의 처지가 세계 도처에서 악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위협받는 정권에게 성소수자들은 손쉬운 마녀사냥감입니다. 유엔 보고서를 보면 성소수자를 범죄시하거나 성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법을 유지하는 나라가 여전히 76곳이나 됩니다.

지난 2년 동안 트랜스젠더 살해는 해마다 늘었습니다. 영국의 주요 성소수자 단체인 스톤월의 보고서를 보면, 영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지난 4년 동안 80퍼센트 늘었습니다. 2016년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에는 혐오 범죄가 41퍼센트나 치솟았습니다. 2016~2017년 동안 성소수자 다섯 명 중 한 명 꼴로 혐오 범죄나 혐오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맑시즘2018에서 연설하는 로라 마일스 ⓒ이미진

최근 영국에서 성소수자 10만 8000명을 상대한 설문 조사가 실시됐는데,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성소수자 설문 조사였습니다. 이를 보면 응답자 40퍼센트가 지난해에 동성애혐오나 트랜스혐오를 경험했습니다. 또, 23퍼센트는 일터에서 성소수자이거나 성소수자로 보인다는 이유로 부정적이거나 불편한 시선이 섞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고작 450만 파운드[70억 원]밖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는 쓰나 마나한 금액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우선, 사회주의 운동은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싸운 오랜 전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역사가 너무 많이 잊혔기 때문입니다. 이는 1930년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때문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운동과 그 운동가들은 대개 사회주의 단체와 연관이 있거나 그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가였습니다. (당시에는 동성애 같은 성적 지향과 트랜스젠더를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도 유념해 주십시오. 20세기 초가 돼서야, 어쩌면 20세기 중엽이 돼서야 트랜스젠더가 성적 지향과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가장 먼저 소개드릴 인물은 에드워드 카펜터입니다. 그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동성애자의 권리를 요구한 활동가였습니다. 당시에 이것은 큰 이슈였습니다. 당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심각한 외설죄’로 2년 간 수감되고, 출소하고 얼마 안 돼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사회주의자였고 독립노동당 당원이었습니다.

또 다른 인물은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입니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에서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이었는데, 당시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습니다. 그는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을 동성애자와 구별해서 다룬 최초의 인물입니다. 또, 그는 처음으로 성적 지향을 연구하는 의학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그의 연구소에서는 이른바 ‘성전환 수술’을 최초로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레닌과 볼셰비키 당도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민족자결권, 여성과 모든 차별받는 자들의 권리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소수자 권리 보장에 기여한 역사를 오늘날 많은 성소수자 운동가들이 알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볼셰비키는 동성애를 금하는 법률을 모조리 폐지했습니다.

이외에도 차르(러시아 황제) 시절의 법들을 제거하고자 전반적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성관계 승낙 연령을 폐지하고, 이혼과 낙태를 합법화했습니다. 14개국 군대와 백군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기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이런 변화를 이뤄냈습니다.

1922년의 법률은 동성애든 이성애든, 상대방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모든 연인 관계를 인민의 권리로 보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 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권리에 기초한 법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트랜스젠더를 위한 연구소가 세계 최초로 생겼지만 이후 나치가 집권해서 파괴했다

이 사진은 1933년 독일 베를린에서 나치들이 히르슈펠트의 연구소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입니다. 히틀러는 히르슈펠트를 ‘독일에서 가장 위험한 유대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히르슈펠트 연구소는 폐쇄됐고 모든 책은 불태워졌습니다. 히르슈펠트가 목숨을 건진 것은 때마침 외국에 나가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33년 스탈린은 동성애를 도로 범죄화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급격한 산업화·집산화를 추진하고 이를 위해 인구를 늘리려 했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훈장까지 수여하며 출산을 장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나 통상적인 성별 표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조리 체제 전복적이고 퇴폐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는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성장한 동성애 클럽들을 파괴했습니다. 많게는 성소수자 5만 명이 강제수용소나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수가 서독의 감옥에 계속 갇혀 있었습니다. 동성애를 처벌하는 나치 시대 법을 서독 정부가 1950년대까지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1930년대의 경험 탓에 사회주의자들이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연관 맺었던 역사는 잊혔고 재발굴돼야 했습니다.

전쟁 이후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투쟁이 회복하는 과정은 느렸지만 중요했습니다. 결국 그 투쟁은 1960년대에 다시 크게 분출했습니다. 1960년대는 각종 저항과 투쟁이 크게 벌어진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그랬습니다.

당시 트랜스젠더들이 최초로 벌인 투쟁 하나가 196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콤프턴 식당 항쟁입니다.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교류 공간에 접근할 권리를 둘러싼 투쟁이었습니다. 젊은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들은 출입할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식당 앞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랜스젠더가 기본적인 시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1969년에 벌어질 스톤월 항쟁의 예고편이었습니다.

다음은 스톤월 반란을 가장 잘 다룬 마틴 듀버먼의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스톤월 항쟁을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으니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톤월은 뉴욕에서 마피아가 운영하던 클럽이었습니다. 경찰관들은 그곳을 찾은 성소수자들을 수시로 괴롭혔고, 결국 1969년 6월 어느 날 성소수자들이 반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동안 밤마다 전투가 벌어졌고 경찰이 결국 밀려났습니다.

자긍심 행진은 바로 이 스톤월 항쟁의 산물입니다. 처음으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들이 비참함과 무력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 맞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톤월 항쟁을 단지 동성애자들의 역사로만 서술합니다. 그러나 당시 투쟁을 이끈 사람들 중에는 트랜스젠더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실비아 리베라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시간을 내서 그녀에 대해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그녀는 ‘동성애자해방전선’ 창립 멤버였습니다. 그 조직은 분명하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본받아 전투적인 저항 조직을 표방했습니다.

리베라는 자신을 혁명가로 소개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급진 분자이자 혁명가였고 지금도 혁명가다. 스톤월 반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에 기쁘다. 당시 누군가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보며 ‘어머, 세상에! 혁명이 시작됐네, 혁명이 시작됐어!’ 하고 생각한 것이 기억난다.”

리베라는 10여 년 전[2002년]에 52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로,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트랜스 혐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스톤월 항쟁 1년 후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자긍심 행진을 준비한 일원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도시, 많은 나라에서 자긍심 행진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자긍심 행진이 온건한 기업 행사가 돼 버렸습니다.

저희는 영국에서 자긍심 행진을 그저 자축하고 사회적 합의주의를 고취하는 행사가 아닌 정치적 항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진행 중인 또 다른 투쟁은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성별 자기 결정권에 대한 것입니다. 한국에도 같은 쟁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국의 성별인정법은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받으면 출생 증명서의 성별을 고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절차는 아주 지난하고 관료적이며 의학적 검사를 요합니다. 정신 의료 기관에서 ‘성별 위화감’ 진단을 받아야 하고, 2년 동안 해당 성별로 생활한 후 그 증거를 심사위원회에 제출해야 합니다.

2년 전[2016년],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검토한 영국 정부는 이런 절차를 간소화해서 자기 의사만으로 성별 전환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몇몇 다른 나라, 예컨대 아일랜드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표가 나자 대단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우파와 극우, 일부 신자들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인간이 성별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를 법이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페미니스트들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본질주의[여성임이나 남성임을 규정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속성이 있다는 관점]가 깔려 있습니다. 즉, 트랜스 여성도 여전히 남성이며, 모든 남성은 잠재적 성폭력범이고 폭력적이니, 여성만의 공간(여자 화장실, 가정폭력 피해 여성 쉼터, 여성 병동 등)에 출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성만의 안전한 공간이 위협받는다는 주장에 안타깝게도 소수 좌파 인사들도 동조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노동당과 노동조합 안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우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트랜스젠더는 차별받는 집단이고 사회주의자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좌파가 이 문제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좌파적 수사로 치장한 우파적 주장에 타협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논바이너리[남녀 이분법적 성별 규정을 벗어나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는 사람들]로 규정하든, 생물학적 성과 다른 성별을 택하고자 하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는 이를 문제 삼아선 안 됩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이 하는 구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성소수자들이 언제나 차별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여성 차별과 마찬가지로 성소수자 차별은 계급 사회의 등장과 핵가족의 구실과 연관돼 있습니다.

고고학계에서 수집한 역사적 증거나 현대에 남아 있는 전통 사회와의 비교 연구에서 수집한 비교 증거를 보면, 아주 오래 전에는 성별 구분을 뛰어넘는 행동이나 동성애에 사회가 더 관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은 달랐을 수 있습니다. 여성에게 출산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역할에 부여된 사회적 가치가 곧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생산력, 즉 재화를 생산하는 도구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농경과 농업 기술이 등장하고, 소수 사람들이 부와 재화를 축적하게 됐습니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면서 지배계급이 등장했고, 지배계급은 가족이나 자손을 통해 잉여 생산물을 계속해서 확실하게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단속해야 했습니다. 또, 이성애를 벗어나거나, 신생 계급 사회의 성별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금지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가족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여성과 성별 규범을 단속하는 일은 단지 자본주의가 아니라 계급 사회 일반과 함께 등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수자의 권리, 더 정확히는 성소수자의 권리 부재는 우리가 사는 [또 다른 계급 사회인] 자본주의 체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 내에서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 싸울 수는 있지만 성소수자 차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평등권을 인정하는 법률이 언제든 도로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역사를 보면 일부 권리가 인정됐다가 이후 도로 후퇴한 사례가 숱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변혁할 때에만 모든 차별받는 집단의 해방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견도 많습니다. 많은 성소수자 활동가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소수자 활동가 다수는 이런저런 종류의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교차성 이론, 특권 이론, 퀴어 이론 등은 모두 정체성 정치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그런 관점을 최소한 공유하면서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차별에 맞서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과 같은 정체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활동할 때는 매우 사려 깊어야 합니다. 우리는 차별에 대한 분노라는 출발점을 그들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의 근저에 있는 것을 보려 합니다. 즉, 차별이 계급 사회와 가족의 성격, 재생산 구조에 뿌리를 내리고 존립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도, 정체성 정치가 왜 틀렸는지 논쟁해야 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계급을 차별 문제의 핵심 측면으로 보지 않고, 계급을 핵심 축으로 보지 않으며, 계급 투쟁을 사회를 변혁할 방법으로 보지 않고, 노동계급을 그런 변혁의 주체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해 맑시즘에서는 1980년대에 계급 투쟁이 후퇴하고 포스트모던 사상이 유행한 것을 다룬 워크숍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물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성소수자들이 트럼프 반대 시위에 동참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그들에게 좌파가 오랫동안 훌륭하게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투쟁에 함께해 왔음을 보여주고, 정체성별로 나뉘어 투쟁하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싸우자고, 계급 투쟁이라는 방식으로 사회를 바꾸고 삶의 방식 전반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트랜스젠더 차별 문제를 개척한 레슬리 파인버그

이제 발표를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분은 레슬리 파인버그입니다. 그녀는 1996년에 《트랜스젠더 투사》[국내 미번역, 링크는 영어 원서]라는 대단히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돼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추천합니다.

그녀는 미국인 마르크스주의자, 정확히는 트로츠키주의자였고 트랜스젠더이자 레즈비언이었고 수십 년 동안 전투적인 노동운동 투사였습니다.

이 책에는 엥겔스의 고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거기서 파인버그는 혁명 이후 사회가 성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질지 서술합니다.

“모든 일하는 인민의 필요를 충족하는 경제 체제를 세우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트랜스젠더인 우리가 해방되려면, 증오·불의·편견을 조장해 득을 보는 계급이 없고 성과 젠더와 사랑을 제약하는 법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회를 위해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토론 정리 발언

흥미로운 질문과 주장으로 기여해 주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 드릴 말씀이 많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다만, 여기 오기 전에 갓 집필을 끝낸 제 책이 오늘 제기된 많은 논점들을 다룬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목은 《트랜스젠더 저항》[국내 미번역, 링크는 영어 원서]입니다.

교차성 이론의 문제점에 대해 발언해 주신 정진희 동지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가 시간을 벌었네요.

말씀하셨다시피 교차성 이론은 원래 다중적 차별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처음 등장했던 시점에는 일보 전진이었습니다. 이 이론은 특히 백인 중심인 미국 부르주아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흑인 여성이 겪는 차별을 다루려는 시도로 출발했습니다. 미국 부르주아 페미니즘 운동은 대체로 백인 위주였고 백인 여성들이 마치 흑인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하는 문제가 있었죠.

교차성 이론은 다중적 차별의 존재를 꽤 잘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중첩되고 또 그 연원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합니다.

성소수자 운동이나 여성 운동 내 많은 활동가들이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것이 그저 현실을 묘사하는 용어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차성 이론이 마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제시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동지들께서 제기하신 다른 쟁점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의 성전환 수술에 대해 한 동지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영국에도 아주 비슷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당장 성별 정체성 클리닉이 별로 없습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시설은 한 곳뿐입니다.

반면 관련 의사나 클리닉을 찾는 트렌스젠더는 최근 크게 늘었고 특히 청소년 이하 연령대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긴축 기조 속에서 관련 예산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첫 의사 접견까지 적어도 2년을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방을 받기까지는 더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성별 전환 비용을 모두 지원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성형이나 제모 수술 비용을 대기 어렵습니다.

그뿐 아니라 트랜스젠더들은 일반적인 진료나 도움을 받으러 병원에 가도 차별을 경험합니다. 근무자들이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영국의 성별인정법에는 결혼한 사람이 성별 정정을 하려고 할 경우, 배우자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성기 수술이 성별 정정 신청 요건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많은 요건들도 없애려고 합니다. 이는 저희가 노동조합 운동에서 제기하고 있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한 동지께서 아일랜드의 성별인정법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에 대해 답해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이고 과거에 대단히 보수적인 나라였다고 그 동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4~5년 동안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가 실시돼 2015년에 동성결혼이 허용됐고, 같은 해 성별인정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최근에는 낙태권 운동이 대단히 활력 있게 벌어져 국민투표에서 3분의 2의 지지로 낙태를 금지하던 헌법이 개정됐습니다.

이 모든 성과는 고위 성직자들과 기득권층의 반대를 물리치고 쟁취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지난 몇 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투쟁 수준이 매우 높았던 덕분입니다.

예컨대 정부의 수도세 징수에 반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단결해서 지역 사회와 노동조합에 깊숙이 들어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환멸이 결합됐습니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가 여성과 아동을 학대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입니다. 이런 요인 덕분에 교회와 보수적 기득권 층의 영향력은 줄고 노동계급의 자신감은 높아졌습니다.

아일랜드 사례는 아주 보수적인 나라도 몇 년만에 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일랜드의 성별인정법은 자신의 의사만으로 성별을 바꿀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국보다 진일보한 것입니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냥 성별 정정을 법적으로 선언하고 남은 생애를 새 성별로 살면 됩니다.

이후 화장실에서 생물학적 여성이 공격 당했다는 얘기도 없었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를 보면 성별 자기 결정권을 반대하는 온갖 주장은 공연히 공포를 부추기는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동지께서 한국 군대에서 자행되는 성소수자 마녀사냥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들으면서 미국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트럼프는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는 미군에 들이지 않겠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시위가 벌어지고 법정 다툼도 있었지만 제가 알기로 트럼프 정부는 이런 방침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군대라는 살상 집단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가 혹시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조처는 명백히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일부 동지들께서 말씀하신 계급 투쟁 수준에 대해서도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을 예로 들면 영국에서 계급투쟁 수준이 더 높았더라면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주장들이 지금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해[2018년] 영국에서는 대학강사 파업을 제외하면 전국적 파업이 없었고 파업 건수도 매우 낮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을 둘러싼 분쟁에 탄력이 붙기 쉽습니다. 예컨대, 영국에서 우익들은 [좌파적인] 노동당 지도부에게 유대인 혐오적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비방을 퍼붓고 있습니다. 수년 전만 해도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렇게까지 전면화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두세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동지께서 차별받는 집단들 사이의 단결은 자동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적지 않은 성소수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은 슬픈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적지 않은 성소수자들이 [파시스트인] 마린 르펜과 국민전선을 지지했죠.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무슬림혐오가 부상하고, 일부 성소수자들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작은 성소수자 집단이 파시스트 조직인 영국수호연맹(EDL)을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그랬던 이유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차별받는 집단들이 저절로 단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단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두 노동자이고 착취당한다는 사실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력을 판매해서 먹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중간이든 뭐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착취와 지배계급에 맞서는 저항에서 단결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한 동지께서 성소수자 권리의 정의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제가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려는 권리는 나답게 살 권리, 자기 의사대로 스스로를 표현할 권리, 차별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만약 이에 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저도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한 동지께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성소수자들과 연관 맺는 법에 관해 가장 좋은 지침은 제가 앞서 말씀드린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성소수자 권리와 연관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말입니다.

성소수자 운동이 19세기 말에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동성 간 성행위가 동성애라는 개념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동성애에 대한 적대가 부쩍 심해졌습니다. 이는 지배자들이 가족을 재확립하고 부르주아적 가족 개념에 기반을 둔 핵가족 모델을 확립하려 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사회주의자들이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재확립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로라 마일스 외 지음 | 정진희 엮음| 책갈피 | 2018년 |184쪽|9000원

영국에서는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사회와 노조에서 자긍심 행진이 정치적 항의 시위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핑크 워싱’[기업이나 주류 정치인들이 돈벌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소수자 친화적 언사를 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고 한 동지께서 지적해 주신 것에도 저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규제 완화 등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사회자유주의적 요소도 품고 있어서 특정 시기에는 약간의 알량한 권리를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우리를 더 잘 착취하기 위해 ‘핑크 워싱’을 합니다.

차별받는 집단들이 저절로 단결하지는 않지만, 몇 달이나 몇 년 안에 닥쳐올 공격에 맞설 공동전선을 위해 우리는 분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제
이메일 구독, 앱과 알림 설치
‘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매일 아침 7시 30분에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빠짐없이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