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익히는 마르크스주의 기초 개념:
‘토대와 상부구조’로 세계를 해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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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매우 첨예해지고 있음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경제 위기와 계급 투쟁이라는 ‘토대’의 상태가 ‘상부구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에스텔 쿠치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의 비유를 소개하고, 그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 또 세계를 변화시키는 역사적 과정을 제시한다.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라면 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에 속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의 패턴을 찾아내려 애썼고, 1859년에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비유를 발전시켰다. 이 비유는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설명해 준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 구조가 법적·정치적 상부구조 형성에 필요한 진정한 바탕이 된다” 하고 썼다.
다시 말해, 흔히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예컨대 종교, 정치, 문화, 또 이것을 재생산하는 제도 등을 이해하려면, 우선 이들이 발 딛고 있는 기반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반이란 노동과 생산을 관장하는 경제를 말한다.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이자 조력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역사 이해에 기여한 바는, 찰스 다윈이 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만큼이나 혁명적이었다’고 썼다.
그것은 바로 “지금껏 이데올로기의 과잉으로 은폐된 단순한 사실, 즉 인간은 무엇보다 먹고 마시고 의복과 주거지를 확보한 뒤에야 정치, 과학, 예술, 종교 등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력 토대의 발전이 사회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어떤 시기든 두 가지 요소, 즉 인류가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또 계급 투쟁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면 인류 역사의 모든 것을 추적할 수 있다고 봤다.
생산관계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생산력이란 사회 운영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스위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컴퓨터부터 맥도날드의 감자튀김 냄비까지 온갖 것들이 생산력의 일부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생산력”의 나머지 일부는 자주 잊혀지곤 한다. 컴퓨터든 감자튀김 냄비든 노동하는 인간이 없으면 제 기능을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생산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지식이 발견되고 축적되면서 생산력 또한 점차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싯돌을 쓰다 어느 날 갑자기 플래시 메모리 드라이브를 사용할 수 없듯, 이 과정은 결코 부드럽고 완만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토대의 둘째 요소, 즉 생산관계가 부각된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로 일하는지,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지, 사무실에서 일하는지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 즉 노동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관계다.
예를 들어 보자. 수렵·채집 사회가 음식을 저장하고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즉, 인간 집단이 최초로 이동 생활을 청산하고 한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생산 방식이 급격히 바뀌었다. 작물 생산량이 늘면서 잉여 생산물도 많아졌다.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그 생산물을 통제하는 집단이 생겨났고, 오랜 시간이 흐르며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으로 토대가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갈등이다. 생산력이 점차 발전하면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을 고무한다. 그러나 생산관계는 일정 시기 동안만 생산력을 자극할 뿐이다.
생산관계는 결국 혁신을 가로막거나 사회의 생산 능력을 저하시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생산관계가 족쇄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족쇄를 내던질 때, “사회 혁명의 시대가 열린다.”
그렇다면, 상부구조란 무엇인가? 주요 갈등이 토대에서 벌어진다면, 상부구조는 어떤 구실을 하는가? 몇몇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든 일을 정치와 상관없이 경제로 환원해 버린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맷돌이 우리에게 봉건 사회를 가져다 준 것처럼, 증기기관은 우리에게 산업 자본주의를 가져다 줬다”고 주장한 대목을 지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상부구조가 토대를 “동결”시키고 사회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상부구조는 국가, 정치, 교육, 종교 등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포괄한다. 이 요소들은 모두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자들의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토대가 사회적 갈등의 뿌리라면, 상부구조는 수없이 많은 모순들이 터져 나오는 영역이다. 즉, 경제적 갈등이 정치적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집약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인간이 이 갈등을 인식하고 전투를 벌이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한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정치는 경제의 집약된 표현”이라고 했다.
그래서 경제에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첨예한 정치 위기와 이데올로기 투쟁이 펼쳐지고, 혁명가들은 이 논쟁에 적극 뛰어들어 개입하곤 한다.
마르크스는 그 결과가 결정돼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옛 생산관계가 약화하다 특정 시점에 전복돼 버릴 수 있고, 실제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반대로 기존 질서가 강력해서 무너지지 않고 도전자들을 물리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체제의 침체, 더 나아가 붕괴까지 일어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한때 안정적으로 보였던 선진 문명들이 거듭거듭 무너졌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를 두고 “경쟁하는 계급의 공멸”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붕괴한 사회들을 돌아보며 그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비웃기는 쉽다. 스스로 존재 수단을 파괴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깨닫지 못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기후변화가 바로 그런 위협이다.
우리가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과 자원은 존재한다. 그러나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도록 추동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속가능한 삶을 어렵게 만든다. 전 세계 정치인들이 기후변화 회의에서 보이는 멍청한 짓거리들을 보라.
마르크스는 사회를 변화시킬 방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이해하려 애썼다. 사회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진 지금, 토대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비유는 여전히 우리가 쥔 무기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