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천의봉의 철탑 일기 ⑥:
“물방울이 바위를 못 뚫을 거 같으냐”
〈노동자 연대〉 구독
현대차 비정규직 천의봉, 최병승 동지가 15만 4천 볼트 전기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비와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목숨을 건 철탑 고공 농성을 2백 일 가까이 이어가고 있고, 벌써 계절이 한번 바뀌었다. 다음은 천의봉 사무국장이 지난 4월에 쓴 일기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현대차 천의봉의 철탑 일기 ⑤: “당당히 부당함을 알리며 싸워서 정규직이 되자””를 읽으시오.
4월 23일
잠깐만 내리고 그치겠지 하던 비가 내 예상을 깨고 밤까지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다. 어제부터 앙재동 상경 투쟁을 진행 중인 동지들이 걱정된다. 달랑 비닐우의 한 개 입고 쫄딱 비를 맞고 있는 동지들이 훤하게 보인다. 참 우리 투쟁과 계절은 운발이 안 맞나 보다. 우리가 마음만 서울 상경 투쟁 하는 날에는 내 기억 속에는 항상 비나 눈이 내렸던 것 같다. 이번에도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로 나타나고 있다.
어제 올라가는 해고자 동지들한테 장난삼아 정몽구랑 끝장 보고 내려오라고, 그전에는 올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나의 말들이 후회스럽게 느껴진다. 서초구청 공무원들과 경찰은 마치 신을 모시기라도 한 것처럼 정몽구를 근접 경호해 주고 있다. 그런 반면에 우리 동지들은 비를 피할 비닐조차 못 내리게 하고 있다. 불법 집회 운운하면서 말이다.
더 큰 불법을 저지른 이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불법파견 사람 장사로 10년간 기업을 운영한 이는 한국에서 두 번째 재벌이 되었고 정부의 찬사를 받고 있고, 법 지키라고 노숙 농성에 길거리에서 온갖 인격 모독을 당해가면서 추위와 비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최근 주가 하락세도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생산 차질이니 경제 위기니 하면서 공정 보도를 해야 할 언론이 사측의 눈이 되어 노동자들의 생떼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 노숙 투쟁하고 있는 해고자 동지들도 비장한 각오다. 절대 한발도 물러설 수 없다며 밥도 제자리에서 먹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차라리 연행이나 돼서 비는 피했으면 좋겠건만 견찰들은 길바닥에서 비 맞고 빨리 지치길 방치해 두고 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지들 사진이 가슴이 아려 온다. 잠 못 드는 이 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더욱더 구슬프게 내리고 있다. 안정적인 생활 공간에서 그나마 비도 피하고 침낭 안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비를 맞고 길거리에서 뜬눈으로 보내고 있을 동지들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그나마 여기 있는 게 좀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떻게든 이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이번 주부터 현장에서 생산을 멈추는 현장파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26일에는 현대기아에 있는 비정규직동지들이 노숙하고 있는 앙재동 본사에 집결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지금 버티고 있는 동지들이 얼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거란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굳건히 버텨 줄 거라 생각하는 내 마음의 주문을 걸어본다.
아침에 눈 떴을 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우리 동지들을 밝혀주겠지. 햇살에 젖은 옷이라도 말리는 아침이 될 수 있게끔...
4월 26일
오늘 전체 조합원 상경 투쟁이 있는 날인데 어제 저녁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조합원들의 상경 투쟁을 방해하는 회사의 작전이었다. 본사 상경 투쟁을 가면 내가 있는 철탑도 침탈한다고 말을 흘렀다. 그러나 우리 조합원들은 본사로 향하고 여기는 울산지역본부 동지들이랑 지부 상집 동지들이 지키기로 했다. 아침부터 내가 들떠 있었다. 마치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처럼 말이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철탑 및 주차장에는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북적이기 시작했다. 7시부터 와서 수다를 떨고 있는 조합원이랑, 어딜 가도 약속시간 못 지키는 사람들이 있듯이 늦게 도착한 조합원도 있었다. 여기서 약식 집회를 하고 떠나는데 조합원들 열망은 대단한 거 같다. 거짓말 살짝 보태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는 듯 보였다. 여기 있는 조합원들도 나랑 같은 생각일거다.
현대차 본사에는 5일째 비닐 한 장도 덥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는 비와 변동이 많은 날씨와 온갖 인격 모독을 당하며 오늘을 기다리면서 노숙을 하고 있는 조합원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고 고생했다며 얼싸 안아 보고 싶을 거다. 서울에 노숙을 하고 있는 조합원이나 서울로 올라가는 조합원들은 이 배수진이 마지막 싸움일거라는 욕망 말이다. 하지만 올라가는 조합원들 어깨에 짐을 많이 지어준 거 같아서 여기 있는 나로서는 미안할 뿐이다.
조합원들이 탄 버스가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주변에는 경찰 버스가 저 뒤에 웅크리고 숨어서 마치 현대차가 명령만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아서 불쾌하기만 했다. 밑을 보니 현대차 지부 1공장 사업부 대의원 동지들이 월차를 결의하고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마치 오늘 작전을 짜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지금 너무 해이해 져 있나 보다. 웃으면서 얘기 하는데...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밑에는 침탈을 대비해 모든 물품을 치원 논 상태라 밥도 중국집에 시켜먹었다. 하지만 밥까지 먹고 좋은 기분 망치고 말았다. 금속노조에서 집회는 현대기아본사 맞은편에 있는 추어탕 집에서 하고 이동해서 밀어붙이자고 한다. 그러면 오늘 조합원들이 뭣 하러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불변한 버스를 타고 장거리로 가겠는가.
예전에 상경 투쟁 갔다가 왔을 때 너무나 형식적인 집회란 거 이제는 알만한 조합원들은 다 알 것이다. 경찰도 완강하단다. 참 웃기는 노릇 아닌가. 완강한 경찰과 몸뚱아리 하나로 몇 날 며칠을 사투벌이고 있는 동지들을 두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싶다. 그런 우려들도 이미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우리 조합원들도 알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약속한 집회 시간 16시가 조금 넘어서야 버스에 타고 있는 조합원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금속노조는 추어탕 집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고 우리 조합원들은 며칠째 비바람을 맞고 있는 동지들을 향했다. 금속노조가 그렇게 완강하다고 했던 경찰 저지선은 분노에 찬 조합원들로 순식간에 뚫리고 말았다. 우리 동지들이 맨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보고 우리의 힘으로 동지들이 살 집 천막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 우리를 지겨주는 것은 바로 우리 조합원 동지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민주노총도 지도부도 아니고 금속노조 간부들도 아니다. 바로 우리가 벌이고 있는 우리 싸움 여기에 함께하는 조합원들인 것이다.
이 소식을 카카오톡으로 전해 듣자니 내 가슴이 뺑 뚫린 거 같다. 그런 데 이 좋던 기분도 상경 투쟁 간 전체 조합원이 빠지고 나면 현대기아 용역 알바들이 우리 동지를 얼마나 괴롭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우리 동지들을 생각하면 기분 업이다. 정몽구 회장은 오늘도 비겁하게 숨어서 우리 조합원들이 뭉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봤을 것이다. 윤여철 독수리 5형제를 현대기아 노사문제 해결사로 재기용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정몽구 회장이 직접 나와 우리랑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또다시 무력으로 해결한다면 결코 우리도 좌시하지 않을 거다.
물방울이 바위를 못 뚫을 거 같으냐. 천만에 말씀이다. 꾸준히 흐르는 작은 물방울이 모여 바위를 뚫고 동굴도 만드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는 파국을 원치 않는다. 정몽구 회장의 결단이 있으면 언제든지 대화의 창문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