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에서 핵무장 야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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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의 역사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베트남 파병이다. 그리고 이는 한미동맹의 침략적 성격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박정희는 미국의 환심을 얻으려 파병을 자청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1965년 들어 전투가 격화하자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거의 유일한 전투병 파병국이었다. 전 세계 여론이 파병 한국군을 미군의 용병쯤으로 여겼지만, 박정희는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한홍구에 따르면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은 이미 한국은 미국에 예속된 국가라는 비난을 받아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필리핀군의 30~40퍼센트밖에 안 되는 가난한 한국 청년들의 목숨값은 어느 미국 관리의 말마따나 “미국에 피와 재화를 아낄 수 있게” 해 줬다.
물론 파병은 한국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한 미국 관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알라딘 램프”로 여긴다고 비아냥거렸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은 파병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이득을 미국한테서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사 수만 명과 베트남 민간인 수천 명의 피를 발판으로 경제성장의 시동을 걸 수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 이래로 독재 정권들을 후원하면서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 열망을 억누르기도 했다. 최근 우익 지배자들의 ‘사주’를 받은 우익 종편 언론과 ‘일베충’들이 1980년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망발을 내뱉었지만, 진정한 외부 개입 세력은 따로 있었다.
미국은 학살을 하러 가는 한국군의 이동을 승인했고, 항공모함을 부산에 배치해 학살을 엄호했다. 당시 미국은 광주항쟁을 “사이공 함락 이후 동아시아 동맹국에서 벌어진 최대의 위기”로 파악했다.
또, 이런 식의 개입은 처음도 아니었다.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진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쿠데타를 방조했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투쟁이 격해지자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푸는 데도 동의했다. 특히 한일국교정상화는 미국이 추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 구축을 위해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 정권을 지지한 것은 1979년 말부터 본격화한 미국 패권 정책의 조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979년 연이어 벌어진 세계경제 위기, 니카라과 혁명*, 이란 혁명에 대응해,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재개했고 친미 독재 정권 지원 등 반동 정책을 강화했다.
박정희
물론 한미동맹에는 갈등도 존재했다. 한국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식민지 대리인이 아님을 종종 보여 줬다. 한미 사이 갈등과 긴장은 특히 1969년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심화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배를 만회하려고 중국과의 긴장 완화를 택했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감축시키려 했다.
한국 지배자들은 버림받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미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미국한테 밤낮 눌려서 안 되겠소. … 언제까지 미국한테 괄시만 받아야 하는지 … 약소국으로서 큰소리칠 만한 게 뭐 없겠소?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없겠소?” 이 말은 시공간을 초월해 북한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 경제가 커짐에 따라 미국과 충돌하는 독자적 이해관계도 커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박정희식 ‘민족주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다.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미국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지도 못했고, 핵무장을 시도한 것에서 보듯이 평화적인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의 ‘자주 국방’은 남북 간 군비 경쟁을 더욱 가속시킨 반민중적 국수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