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연기:
여전히 불안한 한반도와 박근혜의 ‘신뢰 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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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상봉 행사를 불과 나흘 앞두고 말이다.
이 때문에 그리운 이들을 만나길 애타게 바랐던 이산가족들이 큰 상처를 입게 됐다. 60년 넘게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날 실낱같은 기회는 또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북한 지배자들은 이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박근혜 정부와 우파는 북한의 행태를 “반인륜적 행위”라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인도주의적 문제를 협상의 카드로만 여기는 건 남한 정부도 북한 정부 못지않았으니 말이다.
남북이 개성공단 재가동과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면서, 일각에서는 박근혜식 대북 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본 궤도에 오를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이 기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이 불안정하며, 이 지역에서 언제든 긴장이 다시 치솟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최근 북한은 적극적으로 남북 관계를 개선하려 해 왔다. 이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으로 경제적 실익을 얻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을 지렛대 삼아 북미 간에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목적이 컸다.
남북 대화가 일정 진전이 있으면서, 북한은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화 제의에 나섰다. 조건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지렛대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북한의 비핵화 조처가 먼저 있어야 대화를 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같은 대규모 전쟁 연습을 해 북한을 옥죄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대화의 선제 조건은 ‘북한의 미사일·핵실험 동결, 영변 핵시설의 활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허용, 추가 도발적 행동 금지’ 등인데, 이는 북한에 일방적 굴복을 요구하는 셈이다.
미국의 행보에 남한과 일본 모두 보조를 맞추고 있다. 9월 18일 중국에서 6자회담 당사국들이 참가하는 ‘6자회담 10주년 기념 국제 토론회’가 반관반민 형식으로 개최됐다. 여기에 북한과 중국은 6자회담 대표 등을 정식 대표로 보냈지만, 한·미·일은 모두 정식 대표가 아닌 옵서버(참관인)만을 보냈다.
게다가 시리아에 군사 개입을 시도하며, 오바마 정부는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약화된다면 다른 정권들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려고 덤빌 것”이라며 북한을 계속 언급했다. 이 또한 북한을 상당히 자극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악의적 무시’(‘전략적 인내’)를 지속하자, 북한은 상당히 조바심이 난 듯하다.
9월 11일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산하 한미연구소는 위성 사진을 분석해, 8월 31일 북한 영변 원자로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발표했다. 이는 영변 원자로의 재가동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이 위성으로 볼 것을 알면서 북한이 ‘흰 연기’를 피운 것은, 미국이 계속 대화 테이블에 나서지 않으면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일종의 신호인 셈이다.
이처럼 이산가족 상봉이 연기되고 남북 대화가 ‘가다 서다’를 거듭하는 것은 북미 관계가 순탄치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상황이 어려워지는 데 일조했다. 박근혜 정부는 여러 차례 6자회담은 올해 안에 개최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히면서, 북한의 대화 제의에 계속 찬물을 끼얹었다.
특히 9월 초 국방장관 김관진은 북한과 시리아의 화학무기 ‘커넥션(연계)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북한이 종북세력과 연계해 ‘4세대 전쟁’을 획책하려고 할 것”이라며 “현재의 대화국면은 [북한의] ‘전술적 대화공세’일 수도 있다”며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늘어놓았다.
이 가운데 보수 언론들은 ‘금강산 관광은 북한의 돈줄이다’며 금강산 관광 재개 시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따라서 ‘박근혜의 원칙론이 북한을 변화시켰다’는 얘기는 사실과 너무 맞지 않는 것이다.
찬물
미국이 오랫동안 북한을 압박하며 대화를 거부하자, 최근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등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미국은 정녕 북핵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고 있다.
미국이 진심으로 북한의 핵을 폐기하고자 하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닌데, 미국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즉,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해, 동아시아에서 다른 것을 얻고자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 ‘위협’론을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는 지렛대로 삼아 왔다. 예컨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미사일 방어 체제(MD) 구축에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일본·남한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북한 ‘위협’론은 큰 도움이 됐다.
따라서 한반도 긴장은 동아시아 등지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벌이는 갈등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질서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이는 최근 동아시아의 첨단 무기 경쟁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일본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전용할 수 있는 신형 로켓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고, 준(準)항공모함 이즈모 호를 진수했다.
미국도 중국, 북한 등을 겨냥해 전 세계 모든 지역의 목표물을 1시간 내에 타격할 재래식 첨단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이에 중국도 항공모함 추가 건조 등으로 맞불을 놓고 있는 형세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미국) 사이에 갈등이 불거져 온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주변에서도 최근 연이은 군사 행동과 맞대응이 이어져, 다시 긴장이 높아진 상태다.
동아시아에서 대외 갈등이 높아지자, 각국 지배자들은 이를 국내 억압을 강화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지식인 첸리췬은 중국 지배자들이 노동자·농민 운동 등을 “외부 적대세력의 대표, 혹은 간첩으로 취급한다” 하고 염려한 바 있다.(《중국을 인터뷰하다》, 창비)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미국은 북한을 계속 압박하며 ‘시간 끌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남한 지배자들도 대체로 이에 협조하려 할 것이다.
이는 북한의 4차 핵실험 등 더 큰 불안정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박근혜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서울 프로세스’(동북아평화협력구상)의 미래는 점차 어두워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