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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대일본 전략

1945년 이래 미국은 일본을 자신의 동맹으로 붙잡아 두는 게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만약 일본이 미국의 잠재적 라이벌과 손잡는다면, 미국의 헤게모니에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냉전 해체 무렵 미국은 일본을 의심스럽게 바라봐야 했다. 요즘 미국 지배자들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듯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일본이 그럴 수 있을지가 걱정거리였다. 냉전 시대 동안 미국 날개 아래 있으면서 훌쩍 커버린 한 주요 동맹국이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져도 미국을 등지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미일동맹은 겉보기와 달리 무역, 대외정책, 미군기지 등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삐걱거렸다. 게다가 1993년 일본 자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붕괴하는 듯하고 비非자민당 연립정권이 들어선 점도 미국한테 불안감을 안겨 줬다.

미국의 ‘나이 구상(Nye Initiative)’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나이 구상’은 1994년에 클린턴 행정부 국방차관보로 임명된 조지프 나이가 행한 ‘미일 안보 재정의’에 근거한 냉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방안이다. ‘나이 구상’은 1995년 미국 국방부가 제출한 ‘동아시아 전략 보고서’(일명 ‘나이 리포트’)에 잘 반영돼 있다.

이 보고서의 핵심 결론은 한마디로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10만 병력을 유지함으로써 “세계적 위기에 대응하고 지역 패권 국가의 출현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일 양국은 동맹을 강화하고, 그 안에서 일본의 구실을 확대하며, 이것을 ‘지역 및 국제적인 안전보장 촉진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런 구상은 한편으로 중국의 부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구상은 ‘일본이 미국에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이는 “일본이 성장하면서 [미국에] 의존적인 관계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상호 의존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득책[좋은 책략]”이라고 지적했다.

즉, 미일동맹 속에서 일본의 적극적 구실을 장려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일본을 단속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일 안보 재정의’는 “냉전 후에도 일본이 미국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말레이시아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노르딘 소피)

1994년 한반도 위기와 1996년 대만해협 위기는 이 방향에 힘을 실어 주는 환경을 조성했다.

당시에 일본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대조적으로 미국 경제는 주목할 만하게 회복되면서 ‘일본의 위협’에 대한 미국 내의 우려도 누그러졌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 일본과의 ‘동맹 강화’에 신경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일본 내에서도 미국 일변도의 대외정책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 후퇴했다. 그리고 중국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 두 나라가 공동의 인식을 하게 된다.

1996년 ‘21세기 미일공동안보선언’과 1997년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신가이드라인)’은 이런 인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일동맹의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신가이드라인

신가이드라인이 특히 ‘주변사태’에 중심을 둔 것은 전과 두드러지게 다른 핵심 특징이었다. 구가이드라인이 소련으로부터의 ‘일본 방위’가 중심이었다면, 신가이드라인은 ‘주변사태’시 미국과 일본의 협력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주변사태’가 발생하면 일본이 미군을 ‘후방지역’에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냉전기에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고 비용을 대는 일에 국한된 ‘수동적’ 구실에 머물렀다면, 이제 더 나아가 자위대가 일본 바깥에서 미군을 도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사코 이것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일부 제도화한 것이었고, 그동안 일본이 유지해 온 전수방위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신가이드라인은 ‘주변사태’를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로,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태의 성질에 착안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미일 군대가 극동을 넘어 그 밖의 지역에서도 협력할 수 있도록 열어 둔 것이다.

물론 당시 미국과 일본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한반도와 대만에서 벌어질 ‘유사 사태’였다. 당시 한 방위청 간부는 “일본 주변의 위기에서 일본의 구실이 가장 크다고 강조되는 것은 한반도 위기”라고 말했다. 이미 이때부터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자신의 군사 개입을 지원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은 일본을 MD(미사일방어) 체제로도 끌어들였다.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가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 미사일을 핑계댔지만, MD는 명백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국은 처음엔 공동 연구로 시작했지만, 곧 공동 개발로 나아갔고, 2000년대 들어서는 실전 배치도 시작했다.

‘테러와의 전쟁’

부시 정부하에서 미일동맹은 질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2000년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는 “1997년의 신가이드라인은 상한선(ceiling)이 아니라 하한선(floor)이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가이드라인에 담긴 내용은 최소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미티지는 부시 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1997년 신가이드라인은 분명 파격적이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위대는 전투나 전투지역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서만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이런 제한을 없애는 것이었다.

“미일동맹을 미영동맹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으로” 만드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미일 동맹 간의 ‘역할 나누기’와 ‘통합’”을 의미했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부시 정부하에서 이 계획은 놀랍도록 많이 진전됐다. 9·11 테러는 이 추세를 가속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부시 정부는 미일동맹이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같은 ‘전지구적 도전’에 맞선 ‘전지구적 동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헌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던 일본 총리 고이즈미는 부시의 ‘러브콜’에 적극 응답했다.

2001년 일본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도우려고 인도양에 이지스함을 파견했다. 뒤이어 2004년에는 드디어 육해공을 망라한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다. 6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군대가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2005년 일본은 주일미군 재배치를 위한 비용을 상당 부분(총 3조 엔) 부담하기로 했다. 주일미군 재배치는 9·11 이후 미국이 ‘다양한 형태의 불특정 안보 위협’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개입하기 위해 추진한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에 따른 것이다.

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은 미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일체화’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시설과 서비스 상호 이용’과 ‘합동작전체제’가 핵심 키워드였다. 예컨대, 미 제5공군 사령부와 일본 항공자위대 사령부를 병합하고, 미 육군 제1군단 사령부와 일본 육상자위대가 시설을 공유하기로 했다.

일본은 2004년부터 PAC-3(패트리어트 미사일)와 SM-3(스탠다드 미사일)등의 MD체제를 실전 배치했다. 또, 미국과의 MD 협력을 원활하게 하려고(일본 내에서 생산한 MD 관련 부품들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서) 무기 수출 금지 조처를 완화했다.

미국은 이와 같은 계획들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일본에 평화헌법 개정도 요구했다.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서는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라크에서조차 자위대는 여전히 군사작전을 펼칠 수 없었으며, 의료 등 ‘인도주의적’ 역할을 수행할 때도 영국과 호주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아미티지는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는 헌법에 대한 공식 해석을 바꾸는 쪽이 더 간단하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추세는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2009년에 일본에서 ‘탈미입아’(脫美入亞)를 내세운 민주당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면서 미일동맹은 잠시 삐걱거렸다. 중국이 2008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최대 무역상대국이 되자 동맹국인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010년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동맹을 다시금 다잡았다. 무엇보다 이때 후텐마 미군기지를 오키나와현 ‘내’로 이전하기로 한 합의가 매우 중요한 성과다.

“병마개”

두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험한 악수 올해 2월 미일정상회담에서 만난 오바마와 아베. ⓒ사진 출처 일본 수상관저

아베 정부하에서 미일동맹은 또 한 번 질적 도약을 하는 듯하다. 2008년 경제 위기와 ‘테러와의 전쟁’의 실패 속에서 미국은 더 절실하게 동맹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얼마 전 미일안전보장협의회에서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이유다. 이 협의회에서의 합의점으로서 미국은 일본에 주일미군 재배치 비용을 부담시키고, 각종 첨단 무기들을 일본에 들여다 놓기로 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의 명백한 추세는 미일동맹 강화였다. 미국은 일본의 힘을 키워서 이 지역의 안보 부담을 나눠 맡고, 이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물론 목적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다.

일본이 여기에 응하는 것은 일본이 미국의 ‘종속국가’여서가 아니다. 일본은 중국과 경제적 교류를 증대시키면서도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부상을 누구보다 걱정한다. 중국의 부상이 경제 대국으로서 일본이 지난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누려온 위상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08년 이후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랐고, 이것은 일본 지배자들에게 엄청난 굴욕과 충격을 안겨줬다. 최근 몇년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등을 둘러싸고 중일 간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배경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매우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현대화하는 중국에 홀로 맞서기엔 부족함을 느낀다. 주로 전쟁 범죄라는 ‘유산’ 때문이다.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상징되는 전쟁 범죄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데 미국의 요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때 미국은 이 지역의 미군의 존재가 일본 군국주의가 뛰쳐나오지 않도록 하는 “병마개” 구실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미국은 병을 포화 상태로 만드는 데 핵심적 구실을 한다.

[추천책] 《제국주의론으로 본 동아시아와 한반도》 김영익, 김하영 외 지음, 책갈피, 400쪽, 16,000원, [보기]

바로 이 때문에 미일 관계는 모순돼 있다. 즉, 미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부추기는 동시에, 일본이 미국의 날개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위 파트너 지위에 만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쩌면 일본 우익은 미래에도 미국의 날개 아래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일본의 핵무장 시나리오는 미국에겐 국론을 분열시킬 우려 사항이다. 그러나 최근 매사추세츠공대(MIT) 국제연구센터 소장 리처드 새뮤얼스는 한 보고서에서 일본이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빌미로 핵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일본의 다수 민중은 일본이 또다시 전쟁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환영할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일본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진정한 좌파가 탄생하기를 바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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