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직무급제는 해결책이 아니다:
기본급 대폭 인상하고 연공급제 확대하라
〈노동자 연대〉 구독
노동부 지침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키운 데는 정부가 밝힌 임금체계 개편 방향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정부는 이참에 근속에 따라 임금이 자동 인상되는 연공급제를 허물고,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로 개편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복잡한 임금체계를 단순화하고 “일의 성과와 가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통상임금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정부는 “과도한 연공급제”로 인해 임금 결정에서 “합리성”이 떨어지고 “혼선이 초래”됐다지만, 통상임금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진 이유는 바로 정부와 기업주들이 저임금·장시간 임금체제를 유지하며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온 데 있다.
노동부는 지난 수십 년간 자체 예규를 통해 1개월 주기로 지급된 수당만 통상임금으로 인정해 왔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지급되는 정기상여금 등은 제외시켜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주들은 연장·야간·휴일근무 등 각종 수당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고, 추가 고용 없이 적은 비용으로 노동자들을 장시간 쥐어짰다. 턱없이 낮은 기본급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은 임금을 벌충하기 위해 몸이 축나고 생명이 단축되는 것도 감수하며 야근·특근에 시달렸다.
노동부가 연공급제를 공격하는 것도 웃지 못할 적반하장이다. 임금 도둑질을 중단하랬더니, 오히려 연공급제로 인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진 게 문제라는 식이니 말이다.
정부는 위선적이게도 “장시간 근로가 문제”라며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이들이 제시한 직무·성과급제는 결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
임금 유연화
대표적인 성과 중심의 임금제도로 꼽히는 연봉제는 2000년대 한국에 본격 도입된 이래 필연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수반했다. 성과 경쟁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불가피하게 추가 근무수당 없이도 야근·특근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직무·성과급제가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를 완화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직무급제는 합리적’이라는 정부의 포장과 달리, 이 제도는 직무에 따른 임금 차별을 확대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한국의 보편적인 직무급제 유형인 우리은행식 분리직군제(무기계약직의 별도 직군)를 보라. 기업주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의무를 회피하고 ‘평생 낮은 처우’를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무급제를 활용했다.
성과·직무급제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분열을 조장하며 임금·노동조건 수준을 끌어내리는 노골적인 임금삭감 정책이다. 정부가 이번에 제시한 임금체계 개편 모델은 이미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노동부는 40대 중반 이후부터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이 때부터 직무·성과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임금체계를 다변화해 생산성이 낮으면 가차없이 임금을 깎아 버리라는 것이다. 유수 작업장의 노동자 평균 연령이 40대가 넘어가는 오늘날, 이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성과 경쟁과 임금 유연화로 내몰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부의 성과·직무급제 확대 시도는 당장 폐기돼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임금 유연화가 아니라 기본급을 대폭 인상하고 월급제를 실시해 야근·특근에 시달리지 않아도 기본급만으로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연공급제를 지키는 것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아쉽게도 진보진영 내 일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제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연공급제를 비판한다. 하지만 연공급제 지키기를 ‘정규직의 기득권 지키기’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오히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호봉제 요구 투쟁이 보여 주듯, 연공급제 확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공급제를 꺼릴 게 아니라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연공급제를 확대 시행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자신의 연공급제를 확고히 지키면서, 동시에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인상을 옹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