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시스트 국민전선에 맞서는 대중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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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대 노총인 노동조합총연맹(CGT) 등 여러 단체가 국민전선(FN)에 맞서 파업을 벌이고 전국적 하루 행동의 날을 개최하자고 호소했다.
이 행동은 6월 26일로 계획돼 있다. 이날은 프랑스 반파시즘 투쟁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6월 26일 행동은 국민전선이 5월 25일에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벌어진 주요한 항의 시위들을 잇는 행동이다. 국민전선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25퍼센트를 득표해 1위를 했다.
반파시즘 활동가들은 6월 7일에 거리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이 행진은 지난해에 극우 조직의 회원들에게 살해된 학생 클레망 메리크의 사망 1주기를 기리는 의미도 있다.[프랑스 전역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클레망 메리크
유럽의회 선거 직후인 5월 29일에는 1만 명이 국민전선에 항의해 거리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주로 청년이었다. 이 시위는 여러 좌파 정당에 속한 다양한 청년 조직들이 제안해 급박하게 열린 것이었다.
이 제안에는 집권 사회당(PS)의 청년 조직청년사회주의 운동(MJS)를 비롯해 좌파전선(FG)과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청년 조직이 참여했다. 여러 학생회와 반파시즘 단체들도 참가했다.
파리에서는 4천 명이 넘게 모여 행진했고, 툴루즈에서는 1천5백 명, 리옹에서는 1천 명, 낭트·보르도·마르세유에서는 5백 명이 행진했다.
“1세대든 2세대든 3세대든, 우리는 결국 모두 이주민의 자녀다”, “르펜, 너는 이제 끝났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왔다” 하는 구호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2002년 4월에 일어난 대중 시위를 떠올렸다.[파리에서만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 나치인 장-마리 르펜이 대선 1차 투표에서 2위를 해 결선에 진출했다. 그는 국민전선의 현 대표 마린 르펜의 아버지이다.
사람들은 이번 시위를 보며 지난해 가을에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도 떠올렸다. 학생들은 정부가 이주민 학생들을 강제 추방한 것에 항의해 거리 시위와 동맹휴업을 벌였다.(▶본지 114호 ‘프랑스 —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가 폭발하다’를 참고하시오.)
이 운동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서가 힘을 확 얻었다. 그 덕에 더 큰 조직들(예를 들어 사회당과 연계된 조직들)도 국민전선에 맞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됐다.
국민전선이 노동자와 청년의 지지를 얻고 있는가
국민전선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뒀지만, 대다수 프랑스 사람들은 국민전선과 국민전선의 기치를 거부한다.
언론은 국민전선이 노동자와 청년의 표를 가장 많이 가져갔다며 호들갑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와 청년의 기권율이 가장 높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국민전선은 다른 [사회]집단보다 노동자와 청년들에게서 표를 가장 적게 얻었다.
노동조합에서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가 커지고 있다는 보도도 많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노동조합 활동가 극소수만이 참가한 온라인 여론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국민전선은 나치 이미지를 벗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국민전선은 여전히 파시스트 정당이다. 국민전선의 핵심에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히틀러 숭배자, 폭력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다.
주류 정당들이 더 우경화하고 국민전선이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다양한 소규모 파시스트 조직들이 소수 인종과 좌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자신감을 얻었다.
진짜 위험한 것은 국민전선이 선거에서 거둔 성공을 이용해 파시즘 운동을 건설하고 거리를 장악하는 것이다.
국민전선이 성장하는 데 일조한 집권 사회당
국민전선이 성장하는 데는 사회당도 큰 책임이 있다. 사회당은 인종차별적 언사를 하며 무슬림, 로마인,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추진해 왔다. 지난주만 해도 경찰이 칼레 근처에 있는 이민자 거주지를 습격해 수백 명을 강제 추방했다.
사회당은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통령이 된 뒤로 인기가 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사회당은 학생운동과 노동조합운동에서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
이런 세력들이 국민전선을 막기 위한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6월 말 파리에서는 극우에 맞서 싸우는 지역 운동들이 모이는 회의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