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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의 선용과 악용

노동자연대가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터무니없는 낙인찍기는 2년 전 시작됐다. 이 글에서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 실린 관련 글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노동자연대 비방 사건 글 모음’ 바로가기)

다만, 피해호소인 A는 최초에 인터넷, 그것도 SNS(페이스북)를 통해 노동자연대(당시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폭로가 낳을 효과는 충분히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일부 회원들은 온라인상의 낙인찍기가 낼 효과를 지나치게 우려한 나머지 SNS 상에서 논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A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며 당시로선 아직 사건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했던 개인적 사실들을 온라인 상에 공개했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연대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만 키울 뿐이었다. 그 오해는 지금까지도 일부 지속되고 있다.

별 생각 없이 SNS에 남기는 기록은 앞뒤 맥락 없는, 그러나 잘 지워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는다. ⓒ이미진

이 글에서는 인터넷과 SNS를 사용한 표현과 의사소통이 가진 문제들을 일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또,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인터넷과 SNS를 어떻게 사용해야 효과적인지 다루려 한다.

덧붙여 2013년 초에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 게재된 관련 기사 ‘사회주의자들은 SNS를 어떻게 봐야 할까?’도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인터넷 낙인찍기

한국인터넷진흥원은 2014년 가을에 발표한 한 보고서에서 ‘SNS 관련 주요 이슈’를 다섯 가지 뽑았는데 다음과 같다. 자기표현과 사생활 침해, 사이버 폭력, 소통과 양극화, 정보 확산과 허위사실 유포, 정보 공유와 정보 과부하.

제목만 봐도 SNS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많아졌음을 보여 준다. 특히 최근에는 온라인 상의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 침해가 주요한 문제로 거론된다.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과 부교수이자 프라이버시법 분야의 권위자인 다니엘 솔로브는 자신의 책 《인터넷 세상과 평판의 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소문이 조그만 마을에서 서서히 퍼졌고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정정이 가능했지만 인터넷은 달랐다. … 온라인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소식을 접하는 사람은 전후 맥락은 모른채 단편적 정보만 접한다. 개인적 관계가 거의 없는 경우, 불완전하고 모호한 진실은 조롱과 혐오 그리고 비난을 재촉하는 수가 있다.”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거짓말과 왜곡으로 만들어진 허위사실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경우다. 이는 훗날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일단 인터넷 상에 퍼지고 나면 이를 바로잡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 올린 정보는 완전히 없애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훗날 누군가 구글 검색창에 해당 사건이나 이름만 입력하면 곧장 가장 많은 조회를 거친 기록이 맨 위에 등장할 것이다.

시간과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복제 능력 덕분에 진실 여부를 떠나 자극적인 주제일수록 빨리 넓게 퍼진다. 포털과 검색엔진은 이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아는 사람’들로 관계가 연결된 SNS의 경우 일정한 신뢰감이 더해져 쉽게 진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유대관계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확증편향이 생기기 쉽다.

설사 누군가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인터넷 상에서 모욕을 줘 이를 단죄하려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 이런 시도는 사태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들곤 한다.

다니엘 솔로브는 한국의 ‘개똥녀’ 사건을 언급하며 온라인 상에서 모욕 주기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지적했다. ‘개똥녀’ 사건은 한 여성이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자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며 논란이 된 사건이다. 무분별한 일부 사람들은 그녀의 사진을 곳곳에 퍼나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신상털기와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다니엘 솔로브는 비록 한 개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응은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멀리 미국에 사는 자신이 알 정도면 이 사건은 마치 낙인처럼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법적인 처벌은 ‘너는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모욕 주기는 ‘너는 수준 이하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욕감은 위반자가 다시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위반자를 퇴출과 고립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매우 파괴적이다. 위반자는 교훈이나 가르침을 얻기보다는 평판에 상처를 입고 다시 한번 공동체의 일원이 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인터넷 욕설이라 할 수 있는 ‘악플’(악성 댓글)은 이성적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보고 듣는 이에게 엄청난 감정적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 허위사실 유포, 모욕 주기, 악플 등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다른 이의 평판을 떨어뜨려 그를 근본적으로 불신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거나 혐오를 퍼뜨리는 ‘표현’은 제약돼야 한다.

인간 관계 ─ 온라인과 현실의 차이

특별한 잘못이 아닌 사소한 정보들도 그것이 인터넷에 공개될 경우 당사자에게는 불쾌감과 모욕감을 줄 수 있다. 예컨대 가장 믿을 만한 친구나 연인에게 털어놓은 비밀이 어느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숨겨 온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한 사람이 지인들과 맺는 관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대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사용하는 비속어를 부모에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연인들끼리 주고받는 애정 표현을 누군가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직장 상사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가족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점에서 최근 가장 유력한 인터넷 사교 수단인 SNS는 종종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사람들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의 다양함은 익숙하게 여기지만 SNS 상에서 누군가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쉽게 그 복잡함을 잊는다. 예컨대 전 세계적으로 사용자를 13억 명이나 확보한 페이스북은 내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를 적절하게 분류하지 않는다. 최근 여러 가지 부작용이 지적되자 ‘아는 사람’과 ‘친한 친구’로 분류할 수 있는 기능을 덧붙였지만 이 정도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든 남에게든 친구 관계로 등록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동질한 집단으로 보이기 쉽다. 수백 명의 ‘친구’를 가진 온라인 공간에서는(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쓰는 글이 어디까지 퍼져 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현실에서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자기 방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밤늦게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노라면 누군가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기 쉽다. 남들이 보기에는 민망하거나 낯뜨거운 얘기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더 나아가, 내가 SNS 상에서 어떤 사람과 주고받은 대화는 앞뒤 맥락없이 담벼락에 남게 된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그러나 오해받기 쉬운) 얘기를 담벼락에 툭 던져 놓고 가기도 한다. 굳이 숨기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지인 모두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를 흘리기도 한다.

온라인 의사소통이 가진 근본적 한계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때와 장소에 맞는’ 표현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심지어 대화 상대의 기분이나 조건에 대해서도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라면 이는 한동안 진솔한 대화를 가로막는 구실을 하겠지만 이런 과정이 다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소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주변 환경(회의실인지 식당인지, 거실인지, 직장인지, 술집인지)과 상대방의 자세, 손발짓, 어조, 눈빛, 표정 등을 통해 말과 글로 주고받는 정보만큼 중요한 정보를 교환한다. 어떤 경우에는 말과 글보다 그렇게 얻는 정보가 더 결정적이기도 하다.(누구나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뻔히 느껴질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의 의사소통과 협업은 엄청나게 더디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이 점에서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온라인 의사소통의 장점은 그 자체가 커다란 약점이기도 하다. 이토록 중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인터넷을 적절한 수준에서 이용할 수 있다.

최신의 온라인 의사소통 수단인 SNS에서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페이스북의 창립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2012년 페이스북이 상장될 때, “우리의 목적은 세상을 좀더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기업인, 정치인, 관료들의 부패와 비리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기업인과 정치인, 국가 관료들은 이 말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평범한 노동자와 학생들의 삶과 관심사, 생각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SNS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스스로 온라인 상에 공개하도록 유도한다.

자본가들이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하는 까닭이다. 인터넷 보안 전문가인 브루스 슈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구글은 훌륭한 고객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당신은 그 고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의 한 언론인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뭔가 가져가면서 대신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소비자가 아니다. 당신이야말로 사고팔리는 상품이다.”

페이스북이 이용자들에게서 수집하는 데이터의 범주는 84종 정도 되는데 그 절반 이상은 당사자들이 전혀 볼 수 없다. 광고주들과 보안기관들은 그 데이터 활용권을 구입할 수 있지만 말이다.

SNS ─ 인터넷의 자본주의적 진화

SNS는 영어 Social Network Service의 줄임말인데 국내에서는 이를 흔히 ‘사회관계망서비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SNS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기서 “사회관계망”을 “사교” 혹은 “교제”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SNS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도 “사회적 관계”보다는 “사교”에 가깝다.

굳이 용어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이름만 보고 그 활용 가능성에 환상을 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SNS 상의 관계망은 “사회적”이지 않다. 연결된 링크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현실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SNS에 중독돼 있다. 페이스북 이용자 13억 명 중 절반 이상이 페이스북을 날마다 빠짐없이 체크한다. 미국 청년들의 경우 하루 평균 이용시간이 2시간이나 된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1년 중 한 달 반을 페이스북을 보는 데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페이스북이 이토록 중독성을 보이는 까닭은 기존의 인터넷 미디어, 즉 웹사이트, 블로그, 미니홈페이지 등보다 훨씬 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페이스북 같은 SNS 서비스는 광활한 가상 공간에서 나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묶어 주고 이들 사이에 오가는 정보를 ‘나’를 중심으로 재편해 보여 준다.(실제로는 그 정보들이 자기가 고른 친구들에게서 오는 것이고, 그 친구들을 고른 기준이 자신의 관심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다지 대단한 정보들은 아닐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얻는 유대감은 너무 얄팍해서 실체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지만 극도로 치열해진 경쟁에서 낙오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청년들에게는 거짓 위로를 준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겪는 대인관계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온라인 상의 접촉으로 손쉽게 대체하려는 바람이 생기게 된다. 이는 엄청난 시간 낭비와 불필요한 개인정보 제공, 소모적 글쓰기로 이어진다.

한 페이스북 사용자는 자기가 쓴 글에 누가 ‘좋아요’를 누르는지 보느라 수십 분을 낭비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별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지만 누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면 거절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편

SNS에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1시간 안에 이뤄진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휘발성’이 크다고 표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용어는 낯설지만 경험적으로는 대부분 이를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숙고해 보지도 않고 손이 먼저 키보드로 올라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은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표현에 빗대 “인터넷과 SNS는 청년의 아편”이라고 꼬집었다.

한때 광활한 ‘광장’으로 칭송받던 인터넷 공간은 이처럼 점차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된 그룹들로 나뉘게 됐다. 이는 인터넷서비스 사업자(ISP)나 거대 미디어 기업들, 그리고 대중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하는 국가기관들의 필요와 맞물린 결과였다.

애초에 이들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독점적 권력과 이윤 추구 기회를 무너뜨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반면, 1990년대에 인터넷을 접한 청년들은 음악, 영화, 소프트웨어 등을 무료로 사용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주요 선진국 정부들과 인터넷 관련 기업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본,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인터넷 공간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뜯어고쳤다. 지적재산권 강화, 적대적 인수합병, 규제 완화 등 낯익은 방법들이 사용됐다.

결과적으로, 미디어 기업의 독점도 인터넷 사용 비용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새로운 주자들이 무대에 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평범한 인터넷 사용자들은 전보다 더 많은 비용을 내고도 더 제한된 서비스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돈을 내고 인터넷을 통해 영화와 음악을 이용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 최근에는 방송도 인터넷 시장에 편입됐다.

이런 과정에서 기업 광고에 의존하는 인터넷 미디어들은 가장 효과적인 광고 기법을 찾게 됐다. 그 최근의 성과가 바로 사용자들의 경험을 개별화하는 SNS의 발전이었다.

초창기 페이스북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세대의 가장 뛰어난 두뇌들은 이제, 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광고를 클릭하도록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다.”

미국의 광고 시장은 전 세계 인터넷 광고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액수는 2012년 4백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미국 내 모든 인쇄매체 광고의 총액을 넘는 규모다. 2014년 그 규모는 6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페이스북의 성장 비결은 인터넷에서 개인과 관련한 정돈된 정보, 즉 프로파일을 구성한 점이다. 좁은 의미에서 프로파일은 학력, 출신 학교, 출신 지역, 직장 이력 등을 나타내지만 모바일 시대의 프로파일은 개인이나 사업자의 위치 정보와 행동 패턴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의도까지 포함한다. … 이는 상업적 이용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게다가 SNS를 통한 광고는 지인들 사이의 추천과 권유를 통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므로 다른 인터넷 광고보다 효과가 크다. 페이스북은 이렇게 각각의 이용자에게 딱 맞는 광고를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이런 기업들과 국가기관들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국가는 군사부문에서 개발한 핵심 인터넷 기술들을 기업들에 제공하고 기업들은 광범하게 수집한 데이터를 국가기관에 제공한다. 카카오톡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랍 혁명이 SNS 덕분이었다고 과장하며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빠르게 SNS 사용이 확산되는 중국 같은 곳에서도 ‘SNS 혁명’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정반대로 인터넷과 SNS가 효과적인 감시와 통제 수단이 될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청년들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의 스크린에 빠져 있는 동안 건너편에서는 기업주들과 국가기관들이 청년들을 살피고 있었다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돼 있는 자본주의 하에서 인터넷은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SNS 제대로 이용하기

SNS의 ‘자기 중심적’ 특성들 때문에 이용자들은 개인주의의 늪에 빠지기 쉽다. 이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좌파적 청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권위주의를 혐오하고 아나키즘에 이끌리기 쉬운 청년들은 SNS를 매력적인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SNS 환경은 왜곡된 현실 인식을 낳기 쉽다. 여기에 온라인 의사소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무분별한 시도는 자칫 분파주의와 종파주의의 시궁창으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심지어 당사자들에게는 억울한 모욕과 비난이 있어도 경솔하게 대응하기보다 충분히 숙고해 현명한 대응책을 찾아내야 한다.

사실 노동자연대가 온라인상에서 근거 없는 공격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2008년 촛불 항쟁 당시 일부 청년들이 온라인과 집회 현장에서 우리를 경찰 첩자라고 비난하던 일이 있었다. 노동자연대(당시 다함께)는 확성기 등을 이용해 구호를 외치는 등 행진을 효과적으로 이끌려 애썼는데 우리를 따라가 보니 결국 경찰을 만나더라는 황당한 이유였다. 일부 청년들은 행진을 ‘이끌려 한’ 시도를 문제 삼으려고 이런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다함께가 뭐하는 단체인지 전혀 모르는 청년들도 급진화하며 이 운동에 새롭게 밀려들던 시기에 온라인 상의 공방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은 집회 현장에서 많은 노동자들과 청년들이 다함께를 방어하면서 힘을 잃었다. 당시 일부 진보 단체들조차 행진을 이끌려 한 것을 사과하라고 다함께에 요구했지만 다함께는 실제 투쟁 과정에서 획득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를 뿌리칠 수 있었다.

해프닝

SNS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으려면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SNS에서 자기 ‘담벼락’을 실제 담벼락이나 현관문 정도로 생각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진보적 토론회를 광고하는 포스터, 읽어 볼 만한 기사를 붙여 두는 것은 좋은 활용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SNS 공간에서 광고는 일부 신뢰 관계를 타고 흘러들기 때문에 다른 인터넷 공간보다 ‘조금은’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하면 올리기에 부적절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잘 보일 것이다. 자기 현관문에 포스트잇을 붙여 가며 이웃과 논쟁하려 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 놓거나 일기장에나 쓸 법한 얘기를 현관에 써 놓는 어리석음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집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나 볼 테니 과도한 기대에 매달리지도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하려면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