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사상 재판 자인한 “내란 음모” 대법원 판결:
사상과 토론의 자유 처벌한 판결을 규탄한다

“내란 음모 무죄, 내란 선동 유죄”

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 등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다. 1월 22일 대법원은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 등에 유죄와 중형을 선고한 2심 결과를 확정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박근혜 정부의 “내란 음모” 소동이 사실은 정치적 마녀사냥일 뿐이었음을 인정한 꼴이다.

검찰은 조직적으로 “내란 음모”를 했다고 기소한 것인데, 내란 음모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치 않음을 대법원이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증거가 불충분하면 당연히 구속자들을 무죄 석방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법원의 판결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재판이 애당초 우익 지배자들이 벌인 마녀사냥식 사상 재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기소한 정부와 유죄 판결을 한 사법부 모두 나름대로 일관된 태도를 보여 온 것이다.

대법원이 이석기 전 의원 등 구속자들의 행위를 “내란죄의 성립에 필요한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근거는 “발언의 목적”이다. 대법원은 또, “[회합 주도자들이] 발언의 목표로 한 것은 헌법이 정한 정치적 기본조직을 불법으로 파괴하는 것에 해당하여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이라고 했다.

즉, 구체적 조직과 행위를 증명하지 못해도, 발언의 “목적”과 “목표”를 재판관이 단정할 수 있고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심’을 처벌하는 사상의 자유 탄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석기 전 의원 등은 구체성도 없고 실현 가능성도 없어 계획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들을 토론했다는 이유만으로 2년에서 9년의 중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헌법재판소보다는 좀 덜 막무가내였어도, 이 재판 자체가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저열함을 보여 줬다는 사실을 감출 순 없다.(국가보안법 유죄 판단에는 만장일치였다.)

제2의 국가보안법, 내란선동죄

대법원은 이번 판결문의 내란선동죄에 관한 법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란 선동에 있어 시기와 장소, 대상과 방식, 역할분담 등 내란 실행 행위의 주요 내용이 선동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선동에 따라 피선동자가 내란의 실행행위로 나아갈 개연성이 있다고 인정되어야만 내란 선동의 위험성이 있다고 할 것은 아님.”

즉, 내란 선동 죄를 입증하는 데서 구체성과 개연성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란선동죄가 사실상 행위자의 ‘내심의 목적’을 재판부가 자의로 판단해 처벌하게 해 주는 조항이라는 뜻이다. 제2의 국가보안법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형법 제90조 내란의 ‘예비·음모·선동·선전’의 죄 항목 자체가 1953년 형법을 만들 때 특별법인 국가보안법(1948년 제정)의 기능을 일반법인 형법에 옮겨 넣으려고 만든 ‘쌍둥이’ 조항이기 때문이다.(이승만과 그 후배 독재자들은 두 악법을 저항을 단속하는 무기로 유지·애용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가보안법만으로는 공포 정치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기 힘들다고 보고, 형법 상 내란 조항을 걸어 충격 효과를 극대화해 노동자 운동을 위축시키려 했다.

아울러 국가보안법의 ‘국가변란’보다 더 폭넓은 개념인 ‘국헌문란’을 통해 좌파정치세력들을 체제 내화하고 혁명적 좌파들을 압박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혁명적 좌파들이 노동계급 안에 더 뿌리내리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 응답인 이유다.

지배계급의 위기감과 박근혜 정부의 반동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가 깊어지는 상황에서 한국 지배자들은 이런 식으로 좌파들의 사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앞으로 더 벌이려 할 수 있다.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노동자 운동을 고무하고, 이 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자력 해방을 추구하는 사상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지율 추락의 정치 위기를 겪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이런 탄압에 의존하고 싶어할 것이다.

1월 21일 신년 업무 보고에서 법무부가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국가 혁신’ 방안의 하나로 내놓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법원이 반국가단체·이적단체에 해산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고, 해산명령 후 단체 이름을 건 집회·시위 등을 금지하며, 잔여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는 내용의 법 개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박근혜 정부의 반동

우익과 지배자들의 요구대로 대법원이 사상 재판을 정당화했지만, 차마 국정원의 위조가 다수 포함된 녹취록과 국정원 첩자 구실을 한 자의 불충분한 증언뿐인 “RO”(내란 음모 조직)의 실체를 증거로 인정하진 못했다.

이는 대법원이 말로나마 자유민주주의 원리인 삼권 분립과 법정증거주의 등의 형식적 외양마저 완전히 팽개쳐 버리긴 어려웠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이는 “RO”의 실체를 사실상 인정하고서 진보당이 “RO”의 조종을 받는 정당이라는 식의 논리로 진보당을 해산시킨 헌법재판소의 입장과 충돌한다. 이 때문에 대법원 판결 다음 날 진보당 전 의원단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했다.

“헌재가 ...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선고를 강행한 이유를 묻고 싶다. ... RO의 실체와 내란음모가 없었다는 판결이 나올 것을 우려한 것 아닌가.”

이런 상황은 박근혜의 유신 스타일 통치가 곧바로 유신 체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박근혜 집권 이후 노동자 운동이 각종 민영화와 고통전가 드라이브에 맞서 곳곳에서 싸워 온 덕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익과 지배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판결임에도 대법원 판결은 가뜩이나 지지율 추락 사태를 겪는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에 흠집을 추가했다.

1월 23일 총리 교체와 청와대 인사 일부 쇄신 등을 발표한 것은 이런 위기감의 반영일 것이다.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1월 셋째주 박근혜 국정수행평가는 긍정적 30퍼센트, 부정적 60퍼센트로 취임 후 최악이다. 무엇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지속적인 하강 추세에 있다. 최근에는 서민 증세와 연말 정산 사태에 대한 분노가 지지율 추락의 추가적 요인들이 됐다.

물론 박근혜는 통치 스타일상 아랑곳 않고 좌파 단속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반동의 동력이 약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공무원연금 개악, 노동시장 구조 개악, 비정규직법 개악 시도 등에 맞서 조직 노동자 운동이 단결해 투쟁한다면 박근혜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