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그리스 합의 이면에는 부채 이상의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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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좌파 정당 시리자가 집권한 그리스 정부와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 사이의 2월 20일 합의는 매우 희한한 데가 있다.
협상을 질질 끌고, 결렬됐다 재협상하고, 뚜렷한 결말 없이 자리를 뜨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보통, 협상에 임한 양측은 애매한 문구로 합의 결과를 발표해서 쌍방 모두 승리했다고 주장할 여지를 남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건설적인 애매함” 운운하며 합의 결과를 좋게 포장했다.
사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루파키스 자신이 거절했던, 악명 높은 ‘트로이카’ 감독 하에 그리스 “구제금융”을 연장해야 한다는 안을 압력에 밀려 수용했으면서 말이다.
반면, 바루파키스의 주된 상대였던 독일 재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이번 합의에서 시리자가 굴욕을 당했다고 비아냥거렸다. “아마 그리스 협상단은 유권자들에게 합의 결과를 해명하느라 진땀 꽤나 흘릴 것이다.”
독일은 왜 이렇게 세게 나간 것일까? 돈 때문은 아니다. 그리스가 4백25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는 부채 덕분에 가능해지는 것들 때문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부채를 무기한 이어 나가 채무국[그리스]을 영구적인 의존·종속 상태에 두는 것[이] … 진정한 목표”라고 지적했다.
쇼이블레의 측근 고위관료 한 명은 〈파이낸셜 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부채를 경감해 준다는 쪽으로 논의를 계속하면, 앞으로 유럽에서 개혁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 길로 가면, 프랑스와 아마 이탈리아도 좋아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독일이 걱정하는 것은 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포르투갈에 부과된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이 계속될 것인가다.
협상
독일과 EU는 2012년 3월 재정 협약에 근거한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EU 전체에 퍼뜨리려 한다. 여기서 “개혁”은 공공부문 삭감과 민영화, 노동계급의 협상력 약화시키기 같은 것들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이] “개혁”에 집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영국 사례에서 보듯, 위기를 이용해 신자유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은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여러 대응 중 하나다. 애초에 위기를 불러온 “자유” 시장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방어적인 이유도 있다. 독일 지배계급은 2000년대 내내 임금 조건을 공격해서 기나긴 경기 침체를 딛고 수출 경제를 재건했다.
그들은 경제 위기 때문에 파탄난 나라들에서 정부가 개입해 경제를 살리고 그 자금을 EU가 조달해 주면, 독일 모델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구제금융을 이용해 독일 모델을 퍼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임금이 훨씬 싼 동아시아 경제와 경쟁하는 남부 유럽에서 이는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가혹하게 공격한다는 뜻이다.
시리자의 선거 승리는 이런 계획에 치명적 위협이다. 그리스가 긴축을 거부하면, 스페인의 신진 급진좌파 운동인 포데모스에 어마어마한 힘을 줄 것이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더 큰 저항을 고무할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 지배자들은] 시리자를 협상장에서 이겨야 했을 뿐 아니라 시리자가 패배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야 했다. 물론 시리자를 지지하는 수많은 이들은 20일 합의에서 애써 희망적인 대목을 찾으려 하지만 말이다.
유로그룹에 제출해 승인받아야 하는 “개혁”안을 작성할 때 바루파키스가 재량을 발휘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리스가 정부 지출을 조금 늘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자. 그러나 독일에게는 돈 잡아먹는 하마인 그리스 은행에 대응할 강력한 무기가 있다. 2월에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지원을 끊을 수 있다고 협박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고위급 국제 금융인사”의 말을 전했다. “그들은 그리스를 모든 영역에서 쥐어짜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숨통을 조여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무릎 꿇을 때가 됐음을 그리스가 깨닫게 하려는 체계적 노력의 일환인 것이죠.”
이번 합의로 결코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합의로 EU와 협상해서 긴축을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은 끝나야 할 것이다. 대중 투쟁만이 긴축을 끝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