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평가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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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역대 최대의 공무원연금 개악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년 넘도록 싸워 온 투쟁이 결국 패배로 끝났다. 끝까지 국회 앞을 지킨 투사들은 헌신적이었지만, 개악을 막을 수 있는 수준까지 투쟁을 끌어올리지 못한 아쉬움과 이충재 집행부의 배신에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단지 ‘개악을 막지 못했다’는 결과만으로 이 투쟁을 평가하지만, 이런 단순한 평가는 올바른 교훈을 이끌어내 다음 투쟁을 대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년의 투쟁을 잠정 평가하고,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나름 정리해 본 것이다.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충분했다
박근혜 정부에게 공무원연금 개악은 절박한 과제였다. 박근혜 정부의 탄생 자체가 깊어지는 경제 위기 고통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려는 지배자들의 다급함이 반영된 결과였다.
박근혜는 ‘철밥통’ 이데올로기 공격에 취약한 공무원 노동자를 먼저 공격해 다른 부문으로 확산할 계획이었다. 공무원연금 개악을 “동력” 삼아 공공부문이라는 “킹핀”을 쓰리뜨리겠다는 것이다. 형편없는 복지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그나마 인간다운 노후를 보장하는 공무원연금은 “비정상”적 특혜라고 공격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먼저 국민연금과 비교해 너무 많이 받는다며 다른 부문 노동자들과 이간질했다. 이간질의 목적지는 상향이 아니라 하향이었다. 공무원연금 주느라 국가가 무너질 듯 충당부채 수백 조 원을 들먹이며 재정위기 공포심을 부추겼다. 기업과 부자 감세로 생긴 재정 적자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겠다는 술수였다. 2008년처럼 개악 논의에 당사자를 참여시키면 제대로 개악할 수 없다며 법을 바꾸기도 했다. 임금(연금)을 삭감하면서 대화 상대로도 삼지 않겠다니 노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박근혜는 2014년 ‘연내 개악’을 강조했다. 빨리 개악을 완료해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박근혜에게 공무원연금 개악은 줄줄이 예정된 공격의 시작일 뿐이었다. 게다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2014년 초, 박근혜는 집권 1년 차를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보낸 직후였다.
임기 첫 해는 주요 관료들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끝없는 부패추문에 휩싸였다. 곧이어 국정원 게이트로 비틀거렸다. 우파 지지층을 결집해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꺼내든 전교조 법외노조화 카드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저항의 바통은 철도 노동자들의 ‘민영화 저지’ 파업이 이어받았다. 철도 노동자 투쟁은 아쉽게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이 박근혜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박근혜는 곧바로 공무원연금 개악을 밀어붙였지만, 그조차 세월호 참사에 직면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청와대는 공무원연금 개악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새정치연합은 개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새정치연합의 전신인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집권 시절 똑같은 논리로 공무원연금·국민연금 개악을 밀어붙였다. 최근에는 기초연금 사기극에서 공동주연을 맡기도 했다. 새정치연합은 일방적인 개악만 문제 삼았다. 새정치연합은 ‘대화’한다며 공무원노조 지도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사회적 합의’ 모양새를 만드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한편 저항하고자 하는 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무엇보다 공무원노조는 잘 조직된 부문이었고, 개악에 대한 조합원들의 위기감과 분노가 높았다. 임금에 해당하는 연금을 또다시 빼앗길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조합원들의 분노와 투쟁 태세
2012년 기준 최근 7년 동안 생활물가는 25.5퍼센트 오르고 국·공립대 등록금은 40.2퍼센트 올랐지만, 공무원 임금은 수당을 모두 합해 겨우 13.4퍼센트 올랐다. 박근혜를 포함한 최근 세 정부를 거치며 ‘민관보수수준격차’는 더 커졌다. ‘고통 분담’ 운운하며 빼앗은 임금을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쓴 것도 전혀 아니었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분노는 켜켜이 쌓였다. 2년 전, 임금 인상 요구를 내 건 총회 투쟁에 5만여 명이 모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미래 임금인 연금까지 훔쳐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투쟁 호소에 응할 태세가 돼 있었다. 2014년 1월 조합원 설문조사에서 총파업 및 연가 파업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40퍼센트에 달했다. 참여하겠다는 비율도 무려 61퍼센트였다.
지난해 9월 새누리당이 개악안을 처음 발표한 국회 토론회는 조합원들의 항의로 무산됐다. 첫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기를 높였다. 지역별로 개최하려던 설명회도 항의 행동에 부딪혀 줄줄이 무산됐다. 이런 분위기의 절정은 11월 1일 총궐기였다.
12만 명이 참가한 11월 1일 총궐기 뒤에는 개악 저지를 위해 파업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65.8퍼센트로 늘었다. 민주노총·전교조 선거에서도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에 좀 더 적극적인 좌파 집행부가 당선했다.
불과 반 년 사이 세 차례 대중 집회에 연인원 20만 명이 참가했다. 공무원노조는 십 년 만에 1백억 원 투쟁기금 모금도 성공했다. 민주노총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를 주요 요구 중 하나로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전교조도 연금 개악 저지를 전면에 내걸고 9년 만에 연가 투쟁에 나섰다. 이런 압력 탓에 온건한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공노총)조차 대의원대회에서 파업을 결의했다.
관련 노조들이 모여 ‘공적연금강화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도 만들었고, 노동조합들과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공적연금 강화 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이라는 연대 기구도 결성됐다. 지역에서도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운동본부’가 민주노총 총파업 선봉대 구실도 하면서 연대의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요컨대 투쟁의 잠재력과 승리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투쟁의 동력이 빠르게 커지던 11월에 공무원노조 이충재 집행부는 한 걸음 전진하기보다 뒤로 물러섰다. 현장 활동가들의 투지를 억누르며 조합원들의 분노와 잠재력을 협상장에 들어가는 열쇠로 이용했다.
투쟁의 잠재력과 가능성
이 시점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부에서 분열이 있던 시기였다. 박근혜 측근 비서관 3인방과 비서실장 사이에 권력 암투설이 불거졌다. 경제 위기 책임 전가가 순탄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분열이었다.
게다가 공무원 노동자들이 저항할 태세를 보여 주자 정부·여당은 공무원연금 개악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였던 ‘당사자 배제’ 입장에서 물러나 대타협기구를 수용했다. 새누리당은 내부 분열을 낳을 위험이 있는 ‘자원외교 국정조사’도 새정치연합에 내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공무원노조가 박근혜의 강경 자세와 그 이면의 약점을 잘 이해하면서 강력한 투쟁을 조직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2만 명이 모인 총궐기에서 공무원노조 위원장인 이충재는 이후 투쟁 계획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모이기만 해서 되겠는가. 뭔가 더 행동을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조합원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반면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려 애썼다. 당시 이충재 위원장은 방송에 나와 ‘개혁은 필요하다’는 둥 ‘공무원이 연금을 많이 받기는 한다’는 둥 거듭 양보 제스처를 취했다. 공투본의 “연금투쟁의 원칙과 방향”에 슬쩍 양보안을 담은 것도 이 때였다. 소득상하한제 등 더 큰 개악안인 ‘김진수 안’에 “고개를 끄덕인” 공무원노조 집행부나, “고통 분담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 없다”는 공노총 지도부나 매한가지였다.
‘투쟁과 협상’ 투 트랙을 외쳤지만 경험 있는 현장 활동가들의 눈에 이런 태도는 투쟁을 회피하려는 것임이 명백해 보였다. “총파업”을 말하면서 ‘양보안’을 만지작거리는 지도부를 누군들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이충재 집행부는 “11월 총궐기 이후 현장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식혔다.
이충재 집행부는 어떻게 투쟁의 불씨를 꺼뜨렸는가?
이충재 집행부가 이렇게 투쟁의 불씨를 꺼뜨리며 양보 협상에 나서려 했지만 반발도 컸다. 12월에 열린 지부장단 토론회에서는 현장 간부들이 이충재 집행부의 양보 제스처에 반발했다. 특히, 전국에서 모인 지부장들은 집행부의 모호한 투쟁 계획에 문제를 제기했다. 두 차례 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이충재 집행부는 이를 실질화할 구체적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새정치연합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과 양보 제스처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이충재는 “파업은 결정적일 때 칼을 빼는 것이다. 아무 때나 칼을 빼서 휘두를 수 없다”고 거들먹거리며 답변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아래로부터의 반발 때문에 이충재 집행부는 양보 테이블에 쉽게 앉지 못했다. 새로 선출된 전교조 변성호 집행부도 양보 협상에 반대하자 이충재 집행부는 꽤 커다란 압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야가 제시한 대타협기구에 공무원노조는 참여했다. 대타협기구는 공무원연금 개악을 전제로 한 논의 기구였음에도 이충재 집행부는 ‘시간 벌기용 참여’, ‘우리 쪽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 탈퇴’ 등 믿기 어려운 말로 둘러대며 참여했다.
공무원노조 내 조합원으로 구성된 ‘공무원연금 사수 네트워크’(이하 사수넷)는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개악을 전제로 한 협상 테이블이자 들러리 기구인 대타협기구 불참을 호소했다. 전교조 변성호 집행부도 대타협기구 불참을 호소했다. 결국 이충재 집행부의 대타협기구 참여는 배신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대타협기구 참가 이후에도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내 투사들은 탈퇴를 요구하며 총력 투쟁을 호소했다. 특히, 2월에 열린 공무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과 함께 총파업에 나서자’는 사업계획 수정안은 예상을 깨고 140여 명이 발의해 76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집행부가 파업을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던 상황이었는데도 의미 있는 수의 대의원들이 투쟁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 수정안은 ‘파업 안하려는 이충재’에 맞서 ‘진짜 파업하자’는 의미였고 그래야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악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절박함을 대변한 것이었다.
배신으로 가는 “첫걸음”
시간이 흐를수록 대타협기구는 ‘들러리’임이 드러났고 결국 대타협기구 마지막 날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안과 다를바 없는 개악안을 내놨다.
그러나 “들러리 세우면 언제든 빠지겠다”던 이충재 집행부는 탈퇴해야 마땅할 때 스스로 ‘들러리’를 자처했다. 공무원노조 김성광 사무처장을 포함한 공투본 소속 대타협기구 참여위원들은 오히려 “고통 분담”에 동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수넷’은 국회 대타협기구 회의장에서 팻말을 들고 공무원노동자들은 “고통전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3월 28일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결의대회에서는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내 투사들이 이충재 집행부에 항의하는 팻말 시위를 했다.
당시 대타협기구는 최종 합의된 개악안을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실무기구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충재는 이번에는 공노총과 교총이 합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참여를 정당화했다.
여야가 약속한 국회 처리 시한이 다가오던 4월 중순, 세월호 항의 운동이 다시 거세졌다. 성완종 게이트가 터졌다. 그 어느 때보다 공무원연금 개악의 정당성과 추진 동력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충재 집행부는 이 기회에 실질적 투쟁을 배치하기는커녕 공무원연금 개악이 4월 국회를 넘길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을 내세우며 투쟁 회피를 정당화했다. 한 달 전에는 정부가 너무 강력해 싸우기 어렵다더니 말이다.
집행부가 김을 빼고 책임을 방기하는 상황에서도 현장 투사들은 헌신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다. 탄압 속에서도 총파업 찬반투표를 진행했다. 민주노총 4.24 총파업에 출근 집회, 중식 집회, 교육 등의 방식으로 비상총회를 진행했다. 상당수 간부들이 지역별로 열린 총파업 집회에 참가했다. 개악안 합의가 임박했다는 김빠지는 소식에도 조합원 1천여 명이 5월 1~2일의 노숙 농성에 참가했다.
이충재 집행부는 바로 그 시간에 조합원을 배신하고 여야 야합안에 서명했지만, 직후 열린 공무원노조 총력투쟁본부(이하 총투본)에서 합의안은 거부됐다. 그러나 지역본부장들이 중심인 총투본은 우왕좌왕하며 새로운 지도력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양보 합의에 책임지고 사퇴하겠다던 이충재는 사퇴를 번복하고 노동조합을 마비시켰다. 그 뒤 한 달 동안 공무원노조는 혼란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5월 2일 여야 합의안은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청와대의 강경 태도 때문에 5월 말로 연기됐다. 박근혜는 ‘어음’이었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퍼센트로 인상”조차 삭제를 원했다. 정부와 새누리당 사이 이견으로 마지막 투쟁의 기회가 돌아왔지만, 공무원노조는 이충재의 훼방과 총투본의 주저와 망설임으로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지 못해 그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이충재는 도리어 조직적 결정을 완전히 무시한 채 국회에서 개악안 통과를 요구했다. 배신의 명분으로 내세우던 국민연금 개선 약속이 빠져 버렸는데도 말이다.
결국 ‘공적연금 강화’는 공수표일 뿐이라는 활동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무원연금 개악이라는 현금을 내 준 이충재 집행부는 명분도 실리도 잃었다. 게다가 이충재 집행부는 수 차례 본부장들과 지부장, 조합원들을 속여가며 개악안에 합의했다. 이는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내던지고 공무원연금 사수와 총력투쟁을 결의한 대의원들과 조합원들을 배신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관료는 조합원들의 투쟁보다 자신의 협상 수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충재는 그 전형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에 큰 정치적 판돈을 걸었던 만큼 노동자들도 강력한 투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충재 집행부는 그런 전면전을 두려워하며 공무원연금 개악을 받아들이는 대신 공적연금 강화라는 정치적 명분을 얻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배신적 타협을 한 것이다.
현장조합원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일부 본부장들과 좌파 활동가들은 이충재 집행부가 양보제스처를 취하며 대타협기구에 매달리는 것 때문에 투쟁 조직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 독자적 행동구축보다는 총투본 등 공식 논의체계에서 이충재 집행부를 설득 또는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런 약점 때문에 이충재 집행부에게 대타협기구 탈퇴와 파업 등 투쟁을 조직하도록 실질적인 압력을 넣지 못했다. 또 일부 활동가들은 공무원연금 사수를 위해서는 파업 등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감을 갖고 배수진을 치는데 주저했다. 이충재 집행부는 이 점을 파고들어 양보는 불가피하다며 조합원들의 투지를 떨어뜨렸다.
이런 때 현장 노동자들은 상층 지도부의 배신과 무능을 보며 무기력감에 빠지거나 사기저하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리 조직된 현장 투사들의 네트워크가 있다면, 지도부에 압력을 넣거나 때로는 독자적인 투쟁 조직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였지만 이번에는 ‘사수넷’이 그런 구실을 해보려고 했다.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초기에는 지도부와 독립적으로 개악의 본질을 폭로하고, 정부와 우파들의 철밥통 논리, 이간질, 재정 절감 과장하기 등을 반박했고, 사회적 합의 기구의 문제점과 이충재 집행부의 대타협기구·실무기구 참여를 비판하며 활동가들을 규합하려 했다. ‘대타협기구 탈퇴 및 민주노총 총파업 동참’ 연서명 조직도 발의했다. 5.2 여야 합의안에 서명한 이충재 집행부의 사퇴를 요구하며 이들이 뻔뻔하게 공식적 활동을 못하게 항의 행동을 지속했다.
민주노총과 연금행동의 5.2 여야 합의안 지지 움직임에도 동료 활동가들과 협력해 논쟁하고 항의했다. 특히, 5월 28일 국회 본회의가 다가오도록 노동조합 공식 기구가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사수넷’은 국회 앞 2박 3일 항의 농성을 결정하고 뜻을 함께하는 지부장들을 조직했다. 그동안 ‘사수넷’은 대대 수정안 발의를 포함해 수차례 각종 연서명을 조직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전국의 투사들 사이에 느슨한 연결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누가 이런 호소에 귀를 기울일지도 알고 있었고 신속한 조직도 가능했다.
연결망
불과 몇 시간 만에 지부장 십여 명이 항의 농성 제안자로 나섰다. 소수지만 투사들이 단단한 구심을 만들고 농성을 제안했다. 곧이어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국회 앞 2박 3일 농성을 결정했다.
물론 2박 3일 항의 행동과 결의대회만으로 개악안 통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국회 앞 항의 행동의 정치적 의미는 컸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고통분담’에 동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5월 2일 합의안 서명을 가지고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던 여야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줬다. 끝까지 사퇴를 거부하며 투쟁에 찬물을 끼얹으려던 이충재의 훼방도 무력화시켰다. 미끼에 불과한 ‘공적연금 강화’ 약속에 매달리면서 정작 공적연금의 일부인 공무원연금 개악을 용인한 개혁주의자들의 모순도 드러났다. (관련 기사 ‘공무원연금 개악을 지지하거나 모순된 태도를 취한 진보 정당들’)
〈한겨레〉, 〈경향신문〉 등 일부 자유주의 언론이 표방하는 ‘진보 개혁’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도 보여 줬다. 이들은 “사회적 합의”니 “첫발 뗀 공적연금 개혁”이라느니 하며 환영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타협과 동의가 필수적”이라는 〈경향신문〉이나 “관련 단체들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합의를 이뤄냈다”는 〈한겨레〉나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무원 노동자들 말고 도대체 누가 고통을 ‘분담’했다는 얘기인지 알 도리가 없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끈질긴 저항은 이들 자유주의 언론이 “노동자 계층의 대변지”(〈한겨레〉)는커녕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현장 투사들은 지도부가 투쟁하지 않을 때 다른 대안이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비록 이번에는 그 힘이 충분치 않았지만 말이다. 소수라도 대의원대회 결정 사항인 ‘개악 저지를 위한 총력 투쟁’을 끝까지 이행하려고 했기에 이충재의 변명은 완전히 정당성을 잃었고 그를 사퇴시킬 수 있었다.
공무원연금 저지 투쟁은 패배했다. 그러나 박근혜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는 임금피크제를 공무원부터 시작하겠다고 한다. 경쟁을 강요하는 성과급을 무력화해 온 노동조합의 균등분배에도 칼을 대겠다고 했다. 임금체계 개편과 맞물려 초과근무수당 공격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당장 징계, 고발 등 노조 탄압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사수넷을 통한 현장 투사들의 공동 활동은 이후 투쟁에 소중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투쟁할 때 지지하지만 동요하거나 후퇴할 때는 이를 비판하고 독립적 투쟁을 촉구하고 조직할 현장 조합원들의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이번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의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