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량 보전 압박에 휘둘리지 말고:
임금·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 연대〉 구독
8+8시간 교대제 도입 요구는 애당초 불황기의 고용 불안이나 물량 감소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적 대안으로 제기된 게 아니다. 이는 자동차 산업의 호황기에 장시간 노동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요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측은 수익성이 낮아지고 해외 생산이 늘어난다며 노동자들에게 조건 후퇴를 압박하지만, 현대·기아차 그룹사는 1백조 원의 사내유보금을 쌓아 두고 글로벌 경쟁 속에서 1천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해마다 생산을 늘리고 있다.
그런데 사측은 생산량 보전을 요구하며 노동시간 단축 요구의 본질을 왜곡하고 비틀어 버렸다. 정몽구는 2012년에 8+9시간 교대제를 논할 때부터 생산량 만회 방안이 마련돼야만 임금 보전도 가능하다고 버텼다. 물량 보전과 임금 보전을 연계시킨 것이다.
현대·기아차지부 지도부는 2012년에 이미 이런 사측의 논리를 수용해, 노동시간 단축의 전제로 노조가 생산량 보전 방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노동강도 강화와 휴게·식사·교육시간 축소 등의 후퇴가 이어졌다.
전제 조건
그러나 생산량 보전이 노동시간 단축의 전제 조건이 돼서는 안 된다.
2009년 현대차 윤해모 지도부가 후퇴를 시작하기 전까지, 현대·기아차 노조는 생산량과 관계 없이 기존의 임금을 보전하라고 요구하며 싸웠다. 임금·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기본 원칙이었고,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거나 휴일·휴게 시간을 확대할 때도 이런 원칙이 적용됐다.
만약 사측이 생산량을 늘리거나 유지하고 싶으면, 스스로 방안을 찾아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노동자들의 조건을 희생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많은 청년들이 실업으로 고통받는 지금, 사측이 질 좋은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할 필요도 있다.
아쉽게도 적잖은 좌파 활동가들도 생산량 보전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현장공동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좌파 활동가의 일부는 생산량을 보전하면서도 노동조건 악화를 완화할 방안으로 설비투자를 주장다.
그러나 이 또한 노동조건 악화를 완전히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사측은 라인 증설이나 공장 신축 등 투자를 늘리기보다 공장 가동 시간을 최대한 끌어올려 생산성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다. 이것이 현재 이윤을 뽑아내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기아차 해외 공장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사측은 해외 공장에서 8시간 근무를 도입했지만 공장을 최대한 가동시키기 위해 밤샘 근무조를 두고 3교대제를 실시하고 있다.
사측은 노조의 눈치를 보며 한국 공장에서는 3교대제를 당장 도입하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현대차 변속기 사업부에선 밤샘 근무조 신설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사측은 시간당 생산대수를 늘리는가 하면, 휴일 아르바이트생 투입 등으로 공장 가동률을 높이곤 한다.
따라서 실효가 높지 않은 설비투자 요구에 매달리기보다 노동조건을 확고히 지키는 게 중요하다. 아르바이트생 투입과 밤샘 근무조 신설 등에 반대하면서 말이다.
설비투자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입장은 사측의 ‘물량 축소’ 위협에 효과적으로 맞서기도 어렵다. 만약 라인 증설 등을 했다가 생산량이 줄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고용과 노동조건 후퇴 압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생산량 수준이나 투자 정도에 연동시키는 것은 결코 효과적이지 않다. 임금은 생산량에 따라서가 아니라 공장 내 세력관계, 노조의 투쟁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