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이 사회 변혁의 걸림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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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현실의 경험과 일치하는 듯이 보이고, 지배적 사상들도 이런 생각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면 협동과 신뢰, 연대에 기초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물음에 사회주의자들이 과학적 답변을 내놓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저는 왜 인간이 겉보기에 이기적 본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지 분석하고, 실제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첫째,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의 경험을 살펴볼 것입니다. 둘째,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지배적 사상 몇 가지를 검토해 볼 것입니다. 셋째,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 본성은 무엇인지 밝힐 것입니다. 넷째, 이를 중심으로 계급 사회 이전의 인류의 역사를 간략하게 다룰 것입니다.
현실의 경험은 명백히 우리로 하여금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는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옆의 친구와 늘 경쟁해야 합니다. 내신 성적으로 경쟁하고, 입시 경쟁을 하고, 학점 경쟁을 하고, 취업 경쟁을 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성과급과 승진 평가를 두고 또 경쟁을 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시기에 개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경쟁에 내몰립니다. “보증을 함부로 서면 안 된다”, “친구 사이에 돈 거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들었거나 경험을 통해 이런 생활신조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경쟁은 모든 개인에게 강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다른 측면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에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다가 죽은 의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온 청년 · 학생들을 생각해 봅시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거나 연대하는 경험은 경쟁에서 겪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들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런 협동과 연대의 경험이 확대되면 경쟁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협동하고 연대하는 인간 집단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에 변화의 싹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경쟁과 착취, 천대와 차별이라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들은 바로 계급사회와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경험한 여러 사회들 중 일부의 특성이지 인류 역사 전체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는 지구에 등장한 이후 대부분의 기간을 호혜와 평등이 주된 원리로 작동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뒤에서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인간 본성이라는 주제를 다룬 몇 가지 지배적 사상들을 살펴봅시다. 역사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담론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주류 담론은 대체로 당대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논리였습니다.
존 몰리뉴가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에서 예로 든 ‘원죄’설은 아마도 가장 오래된 버전의 인간 본성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지배계급의 일부였던 교회는 원죄설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악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들이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원죄설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원죄설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이런 종류의 종교적 가치관이 미치는 영향은 중세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 인간 본성론의 기원이 어떠한 종류의 과학과도 상관 없는 종교에 중요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사회가 변하면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관점이 경제학적 인간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인간상은 바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해 줄 인간상이었습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장원 중심의 지역 경제 체제는 교역 중심지인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된 경제 체제로 재편되기 시작했고 시장이 확대됐습니다. 교역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교역의 거점인 도시가 발달하자, 화폐와 고리대금업이 발전했고 한 지역에서 평생 살아가던 사람들도 교역로를 따라 이동하며 직업도 변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각자 주어진 ‘소명’(직업)에 평생 복무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중세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경제 체제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상인 계급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거둬들여야 하는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간을 적합한 인간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라는 관점이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개인주의라는 사상도 자본주의에 들어와서야 확립되기 시작했는데,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떨어진 개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처음 등장한 것이 이 시대였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이렇듯 중세 시대나 자본주의 사회 초창기에 상식이 된 인간 본성론은 진지하게 인간의 본성을 연구한 결과였다기보다는 자신들에게 필요하거나 자신들을 정당화시켜 줄 인간상을 표현한 것뿐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과학’의 이름을 내세운 이기적 본성론이 나왔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인간의 행동을 유전자의 발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행위를 이기적 유전자의 발현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유전자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 배열의 차이는 겨우 1.2퍼센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유전자에 어떤 행동 패턴이 입력돼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침팬치와 인간 사이에서 약 1.2 퍼센트의 행동 차이만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면 이 모순이 극복될지도 모르겠지만, 크고 작은 영향의 차이는 고사하고 그동안 특정한 인간 행동(동성애, 범죄, 게으름 등)과 연결된 유전자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1.2 퍼센트의 유적적 차이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요? 《다윈 이후》를 쓴 뛰어난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유전자들이 성장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근연 관계에 있는 다른 동물들보다 성장 기간이 유독 깁니다. 임신 기간이 길 뿐 아니라 출산 후에도 약 20년간 더 자랍니다. 이런 장기간의 성장은 생존에 꼭 유리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자마자 껑충껑충 뛰는 가젤이 인간의 아이보다 더 육식동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대신 인간은 충분한 성숙 기간을 통해 뇌와 의식의 발달이라는 장점을 얻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동물들은 이룰 수 없는 지식의 축적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현생 인류가 탄생한 이래 일어난 유전적 변이의 폭은 매우 작습니다. 특히 뇌의 크기에서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룬 문명의 발전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있었던 어떤 진화의 속도보다 빨랐습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자는 느리고 우연적인 변이와 선택압(자연선택)에 의해서 천천히 일어나는 데 비해, 후자는 의식적인 과정으로 유전자가 아닌 지식을 통해 습득되고 전이되며 발전합니다. 그래서 유전자의 변화보다 문명의 변화 속도가 훨씬 빠르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동인에서 보자면 문명의 진화는 의식적 과정이고 유전자의 변이를 통한 생물학적 진화는 우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인간의 뇌가 발달하는 과정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었지만, 한 번 발달한 뇌는 큰 유전적 변이 없이도 다양한 문화적 변화와 발전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유전적 차이를 탐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생물학이 비과학적일뿐 아니라 해악적인 결정적 이유는 어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인간의 본성으로 돌리면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이고 경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모두 헛수고일 것입니다. 폭력이나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이런 본성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을 고정된 속성으로 보는 보수적 사상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은 발달한 뇌와 의식으로 인한 유연한 행동과 사고입니다.
사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본성이라고 여긴 것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함께 변했습니다. 그리스의 비너스상(배가 나온 풍만한 여성상)은 미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번식”과 관계없는 숭고한 사랑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상업은 탐욕을 추구하는 부정한 행위였지만, 자본주의에선 정당한 이윤 추구 활동으로 여겨집니다. 특정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특징들을 인간 본성으로 여기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정돼 있는 인간의 특성은 아무것도 없을까요? 저는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서 뇌와 의식의 발달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연관돼 있는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바로 노동입니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일생 동안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한 것 이상을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동물의 노동은 본능적인 것이지 의식적인 계획을 갖고 시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인간의 노동은 의식적 노동이며, 계획적 노동입니다. 인간은 과거에 없던 것을 창조해 내는 노동을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을 한층 더 손쉬운 방식으로 더 잘 해내려고 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동물의 고유한 특성은 의식적·계획적·창조적 노동입니다.
인간은 또한 사회적으로 노동합니다. 어떤 인간도 사회와 떨어져서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사실 노동을 시작하면 협업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바로 이런 특성들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인류가 등장하게 된 진화 과정부터 계급 발생까지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원 인류는 아프리카의 삼림지대에서 나무에 기어올라 살던 영장류에서 기원했습니다.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면서 사냥의 비율을 늘려나갑니다. 이 과정은 2백만 년에서 2백50만 년에 이르는 등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단단한 손톱이나 강력한 근육, 따뜻한 털 대신 직립보행을 할 수 있는 두 다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 큰 뇌를 갖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수렵 채집 사회를 이뤘습니다. 인간은 혼자서 사자나 코끼리를 사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협동하면 수백 마리의 들소 떼를 벼랑이나 구덩이에 넣어 사냥할 수도 있었습니다. 북아메리카 유적지들에는 이런 사냥을 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남아 있습니다.
최초의 수렵 채집 사회는 계급이 없는, 호혜와 평등이 주된 원리로 운영된 사회였습니다. 개인이 이기심을 앞세우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존의 눈물에 나오는 조에 족은 남성과 여성이 분업을 통해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족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었는데, 여성 한 명과 남성 두 명이 가족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남편은 사냥에 동참했고 다른 남편은 여성들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성별에 따른 분업조차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틀 내에서 조직됐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부족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원시 부족 사회들이 굶주림에 고통받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리처드 리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사막의 수렵채집인인 쿵 부시맨은 풍부하고 균형잡힌 식단을 즐기고 있으며 식량 획득을 위해 일주일에 평균적으로 단지 2.5일만을 할애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아넴 지역의 원주민도 식량 채집을 위해 하루에 평균 3.5~5시간을 쓰고 있는데, 이런 활동이 특별히 고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편 수렵 채집보다 농경이 유리한 환경도 있었습니다. 파푸아 뉴기니 고원지대에는 1931년에 처음으로 외부와 접촉이 있었던,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초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른 원시 농경 사회가 존재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농경 그 자체가 계급을 낳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적도 근처의 비옥한 토양과 높은 강우량이 제공하는 풍요의 땅에서 계급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모든 곳에서 늘 풍요를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들의 사냥이 동물의 멸종으로 이어지는 것을 예측할 수 없었고, 토지 깊이 있던 소금이 녹아 나오며 농경지가 사막이 되는 과정(염화 현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해수면의 높이가 변하는 등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가 닥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농경을 확대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독일에는 기원전 4천5백 년 전쯤 농경인들이 도착했는데, 덴마크에는 그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2천4백 년 전 농경이 시작됐습니다. 왜 이런 시간차가 날까요? 덴마크가 있는 스칸디나비아에선 계절적 자원의 결핍을 굴이라는 자원이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농경을 하지 않으면서도 영구 정착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천 년 전쯤 스칸디나비아의 해수면과 해안선이 변화해 덴마크 서부의 해수 염도가 굴이 견딜 수 있는 수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생기기 시작한 생태적 위기가 궁극적으로 농경의 채택을 가져오게 했을 것입니다.
농경을 확산시킨 다른 요인은 인구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농경은 대체로 수렵 채집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했지만, 더 작은 땅에서 집약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농경의 시작이 인구를 늘린 것이기도 했지만, 한 번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예전의 생산 방식으로는 그 규모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인구가 점점 커질수록 농경을 유지하거나 더 확대해야 한다는 압력이 일반적으로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풍요로워 이런 압력이 적거나 거의 받지 않은 곳, 혹은 제한된 환경 내에서 인류가 유지 가능한 방법으로 생산을 유지한 곳에서는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의 농경 사회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에서 살아남았던 원시 부족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점점 자연 그 자체의 생산물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약 생산을 늘려야만 하는 압력을 받게 됐습니다. 최초로 계급이 발생한 곳들은 인류가 이 점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둔 곳들입니다. 관계 수로를 파야 할 정도로 노동집약적 농업이 필요했지만 그 생산량이 모든 사람들이 먹을 만큼 풍요롭지 않았던 지역들에서 최초의 계급이 발생했고 최초의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인류 문명 발생지들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등은 넓은 지역에 큰 강이 흐르는 곳들이었습니다. 넓은 지역에 많은 인구가 머무르며 농경을 시작하기에 좋지만 가뭄이나 홍수를 피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최초의 계급과 국가가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굶고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하는 불가피한 조건의 땅에서 최초의 특권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잉여생산물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소수로서 그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런 특권은 동의와 강제가 결합돼 유지됐을 것이고, 차차 특권이 당연시되고 강제가 강화되면서 계급으로 발전하게 됐을 것입니다. 이 특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설명도 뒤따라 발전했습니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이 과정은 4천 년에서 5천 년이 걸렸습니다. 계급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에서 서서히 태어난 것입니다.
원시 부족 사회를 야만적인 사회라고 여기는 편견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원시 부족 사회를 이상향처럼 그리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은 인류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온갖 도전을 해 왔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는 점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주어진 조건에서 나름의 선택을 해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선택들은 다양한 삶의 형태와 가치관을 낳았고, 그 가치관은 바로 각자의 환경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가치관들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관들은 환경이나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이 변하면 낡은 가치관이 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연구하려면 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변화시키는 과정 자체에서 인간의 의식이 변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포탄과 깃털의 비유를 들어 사회생물학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굴드는 사회생물학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했지만 저는 오늘날 인간 본성을 고정된 무엇인가로 설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포탄과 깃털이 떨어지는 속도가 다른 이유를, 포탄성과 깃털성에서 찾는다. 즉, 포탄의 본질에 들어 있는 뭔가의 결과로서 포탄의 낙하를 설명하고, 깃털의 고유한 본질로 깃털이 느리게 떨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낙하운동의 상이한 범위가 중력과 마찰 저항이라는 두 가지 물리법칙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상호작용에 의해 무수한 낙하의 패턴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에 초점을 맞춰, 물체의 관점에서 그 운동을 설명하려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저는 마찬가지로 현재 인간의 본성처럼 보이는 특징들을 인간 내부의 특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맺어 온 역사와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야를 넓혀 보면 인간 본성이라고 여겨져 왔던 것들은 지금까지 계속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입니다. 이 유연함이야말로 의식을 갖춘 인간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오늘날 주된 측면은 여전히 경쟁이 강요되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혁명적 격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꽃피는 연대는 부분적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부분적 현상을 전국적, 전 세계적 현상으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정돼 보이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며,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도전하는 과정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외적으로 보이는 경향을 주된 경향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를 갖고 있고, 이것은 단결과 연대를 요구하는 투쟁을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투쟁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찰되는 인간상이 주로 이기적인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자본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이 경쟁에 노동자들을 끌어들입니다. 또한 자본가들의 이윤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억압하며 분열시키는 것에 이해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여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 인종 차별 등을 부추깁니다. 이런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등장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계급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이상 경쟁과 억압, 차별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 또한 오늘 우리가 이기적 인간들의 관계를 우애로운 인간들의 관계로 바꿔내는 열쇠를 계급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쟁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태어날 것입니다.
예컨대, 아내 구타가 만연했던 러시아에서 혁명은 즉각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켰습니다. 여성들의 선거권, 유급 출산 휴가제, 낙태 합법화가 이뤄졌고, 동성애와 간통을 범죄로 간주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이런 가능성들을 얼핏 느낍니다. 저는 2007년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의 점거 투쟁에 함께할 때나 2008년 촛불 한복판에서 이런 해방감을 얼핏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더 많은 해방구, 더 많은 광장을 열어 나가는 경험을 해나가길 바랍니다. 이런 투쟁의 경험들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참고 서적
-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 존 몰리뉴, 책갈피
- 《다윈 이후》, 스티븐 제이 굴드, 사이언스북스
- 《힘내라 브론토 사우르스》, 스티븐 제이 굴드, 현암사
-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책갈피
- 《동물고고학 입문》, 사이먼 J.M. 데이비스, 사회평론아카데미
- 《문명의 붕괴》, 제러드 다이아몬드, 김영사
- ‘마르크스의 소외론’, 주디 콕스, 《마르크스21》
- 〈아마존의 눈물, MBC 다큐멘터리〉
이 글은 필자가 한 노동자연대 지회 모임에서 연설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