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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의 양면성을 알아야 한다

몇 달 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정치 상황을 분석하며 이렇게 썼다. “영국 국가의 위기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틈새가 생길 수 있고, 그 덕에 [영국 급진좌파가] 질적 전진을 이룰 수 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영국 자본주의를 격랑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좌파는 이것이 창출할 기회를 잡을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

대다수 좌파들은 그런 틈새가 노동당 안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9월 12일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당내 좌파인 제러미 코빈이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코빈의 승리는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대중적 연대 물결 속에서 일어났다.

불과 넉 달 전에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참패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대중의 긴축 반대 정서의 수혜자가 되고, 잉글랜드에서는 긴축 찬성·이민 반대 세력인 영국독립당이 약진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코빈의 승리는 천지개벽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큰 반전임이 틀림없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부 좌파의 견해와 달리, 코빈의 승리는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변화에서 영국이 비켜 서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경제 위기와 긴축,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혼란은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고, 이는 정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유럽의 정치 양극화는 한편으로는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 같은 급진좌파의 성장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국민당이나 프랑스 국민전선 같은 극우·파시즘의 성장으로 나타난다.

시리자 순간

이런 기본적 동역학은 신노동당*의 기획자이자 코빈을 비난하는 피터 맨덜슨도 인정하는 바다. “방식과 강도는 다르지만 우리[영국]도 나름의 ‘시리자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시리자나 포데모스는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도전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중도좌파 사회당(PASOK)은 긴축재정 정책을 시행하다가 이제는 사실상 붕괴해 버렸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그리스 사회당처럼 되고 있다는, 즉 몰락하고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이제 영국 급진좌파의 도전은 노동당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국 노동당 당원은 5월 20만 명 이하에서 9월 중순 34만 2천 명으로 급증했다.

역설이게도, 코빈은 노동당을 잘 이끌겠다는 선거운동을 했는데도 노동당이 아닌 대안으로 비쳐졌다. 이런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 요인이 중요하다. 첫째, 코빈이라는 인물의 독특함이다. (물론 개인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코빈은 1983년 처음으로 하원의원으로 당선했는데, 당시는 토니 벤이 이끈 ‘벤 좌파 운동’이 시들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코빈은 그 뒤로 계속 노동당 안에서 주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층 운동들을 잘 대변하는 훌륭한 아웃사이더 정치인으로 살아 왔다. 겸손하고,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고, 정치적으로 견실한 그의 개성은 그의 매력을 더해 줬다.

둘째, 노동당 자체의 성격이다. 신노동당 시절에 노동당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올해 5월 총선에서 참패했다. 그럼에도 노동당은 적어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에서는 지지층을 유지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보기에 노동당은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보수당의 공격을 (어느 정도는) 저지할 방패막이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노동당의 영향력도 건재하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지역위원회들의 구실이다. 코빈이 속한 지역위원회를 포함해 노동당의 많은 지역위원회들은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쟁점을 둘러싼 운동에 기여해 왔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노동당이 집권한 지자체들이 긴축을 시행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당 지역위원회들이 그 문제를 놓고 반대 운동을 벌이고 논쟁을 벌이는 다소 복잡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벌여 온 노동당에서 긴축 반대 운동과 반전 운동을 대변해 온 코빈이 당 대표로 당선했다. 노동자들이 개혁주의를 간단히 뛰어넘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사진 출처 Lee Nichols(플리커)

셋째, 노동당의 구조가 변하고 있다. 노동당 내 권력 구조는 코빈 리더십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므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봐야 한다. 1918년 이후 노동당 안에는 세 권력 중심이 있었다. 의원단, 노동조합 지도자들, 지역위원회가 그것이다. 노동당 역사를 보면 지역위원회는 노동당 좌파 운동들 ─ 1930년대 사회주의자동맹의 운동, 1950년대 어나이린 베번이 이끈 운동,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토니 벤이 이끈 운동 ─ 의 주요 기반이었다. 그러나 노동당 좌파 운동들은 의원단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선거가 가하는 압력을 받으며 국가기구와 밀착돼 중도를 향하는 집단인 의원단과, 노동과 자본 사이를 중재하는 사회계층인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당 내 권력 구조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구실을 하는 두 축으로, 노동당의 친자본주의적 성격을 확고히 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 토니 클리프와 도니 글룩스타인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희망과 배신의 100년》(책갈피, 2008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당은 ‘자본주의적 노동자 정당’이다. … 노동조합 의식과 의회 개혁주의는 노동당 정치의 핵심이다. 노동당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애쓰는 노조 관료들의 정치적 표현체이다. 노조 관료는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집단이다. 노동당도 생산 현장의 직접 투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중재하는 집단이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동당 지도자들은 때때로 국가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결코 기업을 운영할 수 없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벤(토니 벤) 좌파 운동이 실패한 배경에는 영국 노동계급의 패배와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있었다. 1994년 노동당 대표가 된 토니 블레어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조화시키려 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블레어는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끊어, 노동당을 미국 민주당 식의 ‘정상적’ 중도좌파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얄궂게도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끊겠다는 노동당 우파의 목표는 블레어 시절과 선을 긋겠다던 에드 밀리반드가 2010년 노동당 대표가 된 뒤에 진전을 이뤘다. 벤 좌파 운동이 달성한 노동당 민주화 조처의 하나는 당대표 선출 방식 변화였다. 그 전에는 의원들이 당대표를 선출했지만 이제 의원단·노동조합·지역위원회의 대표로 이뤄진 선거인단이 당대표를 선출하게 됐다. 하지만 무슨 조홧속인지, 이 방식은 당내 좌파가 아니라, 당내 온건 좌파(닐 키녹과 에드 밀리반드)나 심지어 당내 우파(존 스미스와 토니 블레어나 고든 브라운)가 당대표로 선출되는 데 일조했다.

그래도 블레어는 이 방식을 ‘1당원 1투표제’로 바꾸기를 바랐다. 2010년 에드 밀리반드는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어 블레어 지지자인 자기 형 데이비드 밀리반드를 꺾고 노동당 대표로 당선했다. 그는 보수당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노동당 우파에 굴복했다. 그래서 당원, 노동당에 가맹한 노동조합의 조합원, ‘명부 등록 지지자’(일정액을 납부하면 될 수 있다)의 투표로 당대표를 선출하도록 바뀌었다.

‘1당원 1투표제’ 방식은 어찌 보면 시대 변화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며 주류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이 허물어지고 사회가 더 원자화된 변화 말이다. 블레어 시기를 지나며 노동당의 지역위원회도 변화를 겪어, 좌파들이나 그보다는 덜 좌파적이지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당원이 줄고 꽤 잘사는 중간계급 신노동당 지지자들이 늘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항상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코빈의 당대표 당선에서 드러났다.

코빈은 당원의 49.59퍼센트, ‘명부 등록 지지자’의 83.76퍼센트, 노동조합원의 57.61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전체 59.5퍼센트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를 ‘명부 등록 지지자’의 새로운 유입 덕분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원들만 투표할 수 있었더라도 코빈이 승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노동당 당원 구성 자체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5월 총선 패배 이후 가입한 신규 당원들이 그 변화였다.

그럼에도 노동당이 노동계급에 내린 뿌리가 한창때보다 훨씬 약해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952년 노동당 당원은 1백만 명이 넘어 지금 당원 수의 거의 세 배였다. 그러나 노동당은 그 사회적 기반이 아무리 약해졌어도 때를 잘 만나면 광범한 저항 물결을 탈 수도 있음을 코빈의 승리가 보여 준다. 코빈 자신도 인정하듯이, 코빈의 선거운동은 그가 대변했던 여러 대중운동으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긴축 반대 민중의회와 전쟁저지연합이 대표적이다.

물론 코빈이 출마하지 않았더라도 강경 블레어 지지자들은 승리할 수 없었다. 코빈의 지지율이 급등하는 것을 보며 애가 탄 토니 블레어 등이 나서 코빈에게 맹공을 퍼부었지만 역효과만 일으켰다. 블레어 지지자 리즈 켄들은 치욕스럽게도 4.5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압도적 승리로 당대표가 됐어도 코빈의 처지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기존의 노동당 내 권력 구조가 흔들리고는 있어도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빈이 앞으로 맞닥뜨릴 적수는 세 유형이 있다. 의원단, 영국 국가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보수당과 언론, 믿기 힘든 동맹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코빈이 승리하자, 노동당 의원단 성원들은 (요청도 하기 전에) 예비내각*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부 선언을 했고, 어떤 의원들은 예비내각의 직책을 맡으면서도 코빈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런 반응을 보면, 그들이 당내 민주적 절차를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원단이 앞으로 “책임성” 문제를 제기하며 코빈을 괴롭히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코빈이 맞닥뜨릴 둘째 적수는 보수당과 언론이다. 영국 언론계는, 여전히 보수당 친화적인 대기업들의 입김이 세다. 그런 언론이 30여 년 전 토니 벤에게 했던 것처럼 코빈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악선동을 할 것임은 자명하다.

현 영국 총리이자 보수당 지도자인 데이비드 캐머런이 앞으로 코빈을 어떻게 대할지는 친기업적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잘 지적했다. “우선은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된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 이 나라[영국]에 만연한 반정치 정서와 의회의 한심한 모습이 그 결과를 낳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코빈의 점잖은 성품을 보건대 개인사를 문제 삼으며 그를 공격하는 것은 대중의 반감을 살 것이다.

“그 대신 캐머런은 … 코빈의 정치를 겨냥해 공격할 계획이다. 즉, 영국의 ‘안보’와 가족의 안녕 문제를 집중 제기하며 공격할 것이다.”

영국 국가에 대한 코빈의 태도도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코빈은 노동당 대표가 되면서 차기 총리가 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됐다. 코빈은 영국 왕실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제기에 직면할 것이다. 1924년 처음 집권했을 때 노동당은 기존 질서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코빈은 공화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이며 반제국주의자이므로 이 문제는 큰 문제다.

이런 세력들에 맞서려면 코빈은 의회 바깥 세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세력의 하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많은 주요 노동조합이 코빈의 당대표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그 노동조합들이 코빈을 지지하는 데는 크게 두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당 의원단이 조직 노동계급을 깔보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 그래서 코빈을 지지하면 의원단의 관심을 다시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봤음 직하다. 둘째, 정치적 이유로 코빈을 지지한 노동조합 지도자도 있다. 유나이트(UNITE: 운수일반노동조합과 통합 기계공전자노조의 통합 노조로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의 사무총장 렌 맥클러스키는 신노동당을 지워 버리고 좌파적 노동당을 “되찾자”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인물이다. 맥클러스키에게 코빈의 당대표 선거 출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가동할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지지는 코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노조 관료는 노동당의 의회 개혁주의를 떠받치는 결정적 사회계층이다. 그들도 선거에서 거두는 성적을 기준으로 코빈을 판단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202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보수당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노동악법들을 폐기하기를 바란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코빈에게 온건화 압박을 가하고 있음은 벌써부터 감지된다. 맥클러스키가 코빈에게 좌파 인사인 존 맥도넬을 예비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지 말라고 요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다행히도 코빈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빈의 승리가 주로 노조 지도자들의 지지 덕분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노선을 고수할 수 있다. 그러나 코빈이 실제로 그러려면 그를 지지했던 운동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첫째, 1970년대 말 토니 벤 주변에 모였던 활동가들은 결국 패배했다. 대처 치하에서 노동운동이 패배를 겪으며 노동당 좌파가 점차 줄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남아 있던 노동당 좌파 활동가들이 코빈을 도왔지만, 의원단에 대적하려면 코빈은 노동당 신입 당원들과 지지자로 등록한 많은 사람들이 활동적 당원이 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코빈을 지지하며 온라인으로 가입한 사람들을 노동당의 일상에 꼬박꼬박 참석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만만찮은 문제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어려움을 제기한다. 바로 이 잠재적 활동가들을 어떻게 실질적 활동가로 변모시킬 것이냐는 문제이다. 벤 좌파 운동의 약점 하나는 그들이 주로 당내 투쟁에 매몰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당 바깥에서 노동자들이 패배를 겪는 문제를 등한시했다. 토니 클리프는 이 모순은 “정치적 상승, 산업적 하락”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모순은 결국 노동당 좌파의 패배로 해소됐다. 물론 사람들이 코빈을 지지하게 된 요인은 그가 대변한 더 광범한 대의였다. 간략히 말해, 긴축재정, 전쟁, 인종차별 반대라는 대의였다. 코빈이 지지자들을 계속 규합하려면 이런 대의에 입각한 운동을 지속시켜야 한다. 그러면 코빈은 노동당 우파와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

셋째, 노동당은 근본적으로 선거를 위한 정당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해서, 노동당은 선거에 출마해 승리하려고 존재한다. 코빈은 근본적으로 이 기준에 따라 평가받을 것이다. 어느 노동당 우파 인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코빈이 내년 스코틀랜드 총선에서 노동당에 새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웨일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잉글랜드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의 입지를 강화한다면, 그는 다음 총선까지 우리를 이끌 자격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우리 당은 행동해야만 한다.”

선거가 가하는 압박은 노동당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넓히고 사회운동을 지속시키는 데에 계속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효과는 벌써부터 나타난다. 코빈은 노동당 우파 인사들을 예비내각에 끌어들이려 하면서 유럽연합 탈퇴 찬성 입장에서 후퇴했다. 즉, 총리 캐머런이 “노동자 권리를 공격하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유럽연합 탈퇴 입장을 노동당 당론으로 결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코빈이 이런 타협의 길을 걷는다면 과거 노동당 좌파 운동이 처했던 상황에 놓일 것이다.

선거에서 코빈의 리더십이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이냐는 긴축이 아닌 다른 경제적 대안을 제시해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가 주장하는 몇몇 정책들, 즉 철도 재국유화와 기업 탈세 단속은 인기가 좋다. 그런데 그의 핵심 거시경제 정책은 이른바 ‘민중의 양적완화’이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지자체 등 여러 기관의 채권과 자산을 매입하고, 그 기관들은 이렇게 해서 마련한 돈으로 생산적 투자를 한다는 구상이다.

우파들도 이 정책을 비판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마이클 로버츠도 이 정책을 비판한다. 경제에 돈을 주입하면, 기본적으로 낮은 이윤율 때문에 발생한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양적완화의 기본적 구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영국 경제의 상당 부분이 투자를 기피하는 사기업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마이클 로버츠 비판의 요지이다.

민중의 양적 완화

이런 논란을 보면 코빈의 정책이 개혁주의적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난다. 사실, 코빈의 승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유럽에서 일어난 새 개혁주의 부흥 물결의 일부로 봐야 한다. 이 새 개혁주의는 여러 면에서 기존 사회민주주의와 다르다. 그러나 새 개혁주의는 기존의 자본주의 권력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은 채로 긴축재정 정책을 중단하고, 경제를 성장시키고, 불평등을 완화하려 한다.

새 개혁주의는 유럽의 동쪽 끝에서 혹독한 시험을 치르고 있다. 바로 그리스의 시리자다. 긴축에 반대하며 집권한 뒤 시리자는 자신이 유럽연합과 항구적 대결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깨달았다. 7월 5일 그리스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62퍼센트가 유럽연합이 요구한 긴축을 거부했다. 그러나 시리자 대표이자 그리스 총리인 치프라스는 겨우 1주일 만에 3차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서명하며 그전보다 더 혹독한 긴축을 수용했다. 이 문제를 놓고 시리자는 분열했고 치프라스는 9월 20일 조기총선을 실시했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총리가 됐지만, 사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이 얻은 것이 더 크다.(이 비극에 대해서는 〈노동자연대〉 웹사이트에 실린 ‘[그리스] 시리자는 왜 긴축에 굴복했는가?’를 참고하시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많은 급진좌파들의 기이한 기억상실증이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많은 좌파들은 ‘각국의 시리자’를 건설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원조 시리자에서 일어난 일을 곱씹어 봐야 한다.

또, 그 일이 각국 좌파에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지도 따져봐야 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리오 패니치와 슬라보예 지젝 같은 좌파 학자들은 치프라스를 옹호한다. 그 근거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을 보면 좌파의 전진이 평탄한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논쟁과 갈등과 심지어는 분열을 수반하는 양극화 과정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본이 가하는 압박을 받으며 개혁주의 정부들이 자기 정책을 뒤집은 일은 많다. 대표적 사례가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중반 영국의 해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와 1980년대 초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정부이다. 개혁주의 정부를 순치시키는 데 흔히 이용되는 방법이 자본을 해외로 빼돌려 환율 위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는 자체 통화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이 이용된다. 바로 유럽중앙은행이 유동성 공급을 제한해 예금 대량 인출 사태를 일으키고 대출을 중단해 전체 은행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7월 초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환율 위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강력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항할 방법은 있었다. 예금 인출 제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대중은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찍었다. 국민투표 당시 그리스 재무장관 바루파키스는 장관직을 내놓으며 사실 ‘플랜B’를 준비하는 팀을 꾸렸었다고 밝혔다. ‘플랜B’는 “유럽중앙은행의 난폭한 행동의 결과 은행들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숨 쉴 구멍을 만들기 위해 대체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 치프라스는 바루파키스에게 ‘플랜B’를 실행할 권한을 결코 주지 않았다. 문제는 기술적 수단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굴복이 아닌 대안을 추구하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굴복이 아닌 대안을 계속 추구하려면 국민투표에서 표현된 그리스 대중의 긴축 거부 의사를 훨씬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대중 운동으로 전환시켰어야 한다.

시리자는 새로운 종류의 반자본주의 정당을 표방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치프라스는 그리스 사회당이 20년에 걸쳐서 한 일을 불과 6개월 만에 재현했다. 바로 좌파 개혁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변모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 사회당은 그 변모 과정에서 그리스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그러나 시리자 정부는 실질적인 개혁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이제는 더 혹독한 긴축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처지다.

2기 시리자 정부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치프라스는 조기총선을 위한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파 정당인 신민당에 화력을 집중했다. 신민당은 7월 5일 국민투표 때 찬성 운동을 벌이다 참패하고 혼란을 겪고 있었다. 9월 20일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저였고 시리자는 30만 표를 잃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민중연합(Popular Unity)으로 갔다. 민중연합은 시리자 좌파였던 좌파연대(Left Platform)가 시리자를 탈당해 8월에 창당한 정당이다. 민중연합을 포함해 시리자 바깥의 좌파는 모두 합쳐 9.46퍼센트를 득표했다. 이것은 치프라스가 유럽연합과 맺은 악마와의 계약에 맞서 저항을 벌이는 데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민중연합

몇몇 급진좌파들은 슬그머니 민중연합 지지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 에너지부 장관 파나기오티스 라파자니스 등 민중연합 지도자들은 1기 시리자 정부에 있을 때 새 정당을 설립하기 위한 초석을 놓지 않았다. 치프라스가 국민투표 결과를 어기려 할 때 그들은 장관직을 내놓으며 공개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이기보다는 의회 내 수단(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하는 것)에만 의존해 대응하면서 치프라스가 자신들을 해임하기를 기다렸다.

민중연합은 옳게도 그리스가 유로존을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리자의 문제는 시리자 지도자들이 유로존 탈퇴를 거부한 것 이상의 문제다. 심지어 민중연합의 어느 지지자조차 이렇게 말했다. “시리자의 문제적 측면들 ─ 관료적 정치문화와 강령의 개혁주의적 성격 ─ 이 민중연합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

시리자가 실패한 원인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스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주요 교훈 하나는 언론 노출과 의원직 확보라는 거품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 좌파의 힘은 사회운동에서 나온다. 그리스에서 반긴축 좌파를 다시 건설하는 데서든, 영국에서 코빈의 리더십을 계속 유지시키는 데서든, 출발점은 의회가 아니라 거리와 일터여야 한다.

그리스 민중연합 “시리자의 문제적 측면들이 민중연합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 ⓒ사진 출처 그리스 민중연합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에서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과거에 혁명적 좌파였던 사람들도 노동당 입당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지금 영국 분위기는 2012년 5월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가 약진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당시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은 시리자에 가입하지 않고 반자본주의 좌파연합 안타르시아를 건설해 선거에 독자 출마했다고 해서 많은 좌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선택이 옳았다. 안타르시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7월 5일 국민투표 때 반대표 던지기 운동을 일으키는 데서 안타르시아가 큰 구실을 해 시리자 사무총장이 사실상 감사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안타르시아는 시리자로부터 독립적으로 있었던 덕분에 치프라스의 배신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반면 좌파연대는 주저하고 얼버무리다가 초기 대응을 잘하지 못했다.

시리자는 자본주의 권력 구조와 정면 대결하는 과정에서 굴복했다. 코빈은 그 자본주의 권력 구조와의 대결을 이제 막 시작했다. 좌파는 우파에 맞서 코빈을 계속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독자적 조직을 유지하면서 그래야 한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개혁주의 비판은 그리스에서 다시 한 번 타당성이 입증됐다. 우파와 맞서 투쟁하는 데서, 그리고 코빈이 우파에 타협하며 스스로 몰락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데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다음의 논문을 많이 참고해서 썼다. Alex Callinicos, ‘Two faces of reformism’, International Socialism 148(Autum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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