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
유전자 환원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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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패링턴은 옥스퍼드 대학교 분자생물학 부교수이다. 그가 최근에 쓴 유전자 연구에 관한 책 The Deeper Genome: Why there is more to the human genome than meets the eye(Oxford University Press, 2015)는 영국 〈인디펜던트〉가 선정한 ‘2015년 대중 과학 서적'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발행하는 〈소셜리스트 워커〉, 〈소셜리스트 리뷰〉,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인기 기고자이기도 하다. [ ]안의 말은 〈노동자 연대〉 편집팀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서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이 공포됐다. 이에 따라 곧 새로운 유전자 정보를 통해 암은 물론 정신분열증에 이르는 온갖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에 생물학에서 일어난 진전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줄기세포 연구 분야도 성장했으며, 뇌를 연구하는 신기술도 발전했다.
수많은 언론 기사와 책은 이런 발전 덕분에 “개인 맞춤형 의료의 시대가 빠르게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개인 맞춤형 의료’의 시대에는 모든 질병의 유전 형질이 곧 규명돼, 투약이나 유전자 및 줄기세포 요법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생물학은 질병뿐 아니라 지능이나 범죄 성향과 같은 인성(human personality) 자체의 비밀도 풀 수 있을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이 멋진 신세계 전망은 타당한 것일까? 혹시 치명적 결함이 있는 주장인 것은 아닐까? 힐러리 로즈와 스티븐 로즈는 그들의 최근작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이하 《유전자 세포 뇌》)에서 후자의 입장을 확고히 내세운다. 그리고 풍부하고 강력한 근거를 제시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저자들은 특히 질병과 인성을 생물학적 설명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의 중심 주장은 유전자와 질병의 관계를 다룬 많은 주장들이 유전자의 작동 방식에 대한 심대한 오해에 기반했다는 것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주도한 과학자들의 주장은 정말로 읽어 주기 힘들고 충격적일 정도로 허술했다. 그런데 그런 과장 광고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을 보면, 그들의 허술한 주장을 어쩌면 사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유전학자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는 연구비 마련 행사 때 자기 주머니에서 CD를 한 장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구가 완료되면] 이 CD에 인간 한 명, 즉 제 자신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의 중심에는 한 가지 관념이 있다. 흔한 질병 대부분은 그저 유전자 몇 개와만 관계가 있고, 그래서 그 유전자만 알아내면 치료법을 빠르게 개발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이른바 ‘인체 유래 생체 시료 은행’(바이오뱅크)에 모인 수천 명의 DNA 샘플을 조사해 특정 유전적 변이와 질병(당뇨병이나 심장병, 또는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면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세포 뇌》에서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적어도 1백20 곳의 게놈 영역(region)이 정신분열증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그런 게놈 영역들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신분열증이 생기는 것이지만, 그런 누적 효과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해당 영역이 게놈의 어디에 위치하느냐는 훨씬 더 혼란스러운 문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로 알려진 놀라운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인간의 유전자는 고작 2만 2천 개 정도다. 닭보다는 많지만 포도보다는 적은 수이다. 둘째, 이 유전자들은 게놈에서 고작 2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는 유전자는 별 기능이 없어 “쓰레기” DNA라고 불린다.
그런데 흔한 질병과 관련된 영역의 압도 다수는 이 ‘쓰레기’ 영역에 위치한다. 자, 그렇다면 인간 게놈 프로젝트 같은 연구로 질병의 유전적 토대에 관해 유용한 무언가를 알 수 있을까? 또, 왜 지금의 현실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애초 공언과 이다지도 다른 것일까?
《유전자 세포 뇌》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질병을 유전자를 통해 치유하려 한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그 실패의 이유를 현대 생물의학(biomedicine)의 두 가지 주요 결함에서 찾는다. 그 결함은 첫째, 인간의 생리와 행동, 심지어는 사회적 현상까지도 유전자로 환원해 설명하려는 경향이다. 둘째, 과학 연구 방향이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두 가지 결함이 뇌과학에서 특히 더 두드러진다고 본다. 저자들은,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을 유전적으로 증명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과거에는 정상적 범주의 인간 행동으로 간주하던 것들을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컨대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학생들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로 분류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분류법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는데도, 아동들이 ADHD 진단을 받고 ‘리탈린’ 같은 약을 처방받는 일은 끊이지 않는다. 이 약은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도 있고, 그저 ‘화학적 구속복’일 뿐이라는 [즉, 실질적 효과는 없다는] 비판도 있다.
《유전자 세포 뇌》의 저자들은 이렇게 인간 행동을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보는 추세가 증가하는 것은 생물의학 연구에 대기업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유전학 연구가 비교적 작은 규모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기업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는 연구소들에 의해, 그리고 대형 제약회사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연구가 이뤄진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물론 현대 유전학이 그렇게나 결함이 많다면 신약 개발 같은 형태로 돈을 버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들은 게놈 프로젝트가 이렇다 할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반성적 제어가 이뤄지기는커녕 새로운 수요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줄기세포와 같은 또 다른 생물학 분야로 자본이 쏠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줄기세포 연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한 분야다. 초기에는 배아줄기세포만이 모든 신체 세포로 전환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윤리적·기술적 문제 제기에 부딪혀 병에 걸리거나 손상된 조직을 대체하는 치료에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는 것에 제약이 걸린 상태였다.[배아줄기세포 연구에는 임신부의 난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 보통의 피부 세포를 ‘전천후 줄기세포’(totipotent stem cell)로 바꾸는 방법이 개발됨에 따라, 재생의학 연구의 대안적 길이 열리는 듯하다. 허나 저자들이 강조하듯이, 이 기술을 실제 치료에 적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음에도, 줄기세포 연구자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이처럼 생물의학의 핵심 분야에 이리도 많은 결함이 있다면 그 연구 결과도 결함투성이일 테고 실용적 응용에도 제약이 많을 텐데, 그런 연구를 할 소용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이 책의 저자들과 생각이 다르다. 필자는 생물학적 환원론에는 한계가 있고, 이윤 추구 동기가 생물의학 연구 방향을 좌지우지한다는 지적에는 확실히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연구 결과로 유전자와 세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정말 실질적이고 매우 흥미로운 진전이 있었음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본다. 《유전자 세포 뇌》의 저자들은 그것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이 있는 듯하다. 과학과 관련해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특히 중요한 측면은 과학이 객관성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스티븐 로즈는 최근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말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발전시킨 과학관과 차이가 있는 듯하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과학관으로 볼 때 자연과학은 비록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우선선위가 깊숙이 침투해 있더라도 [궁극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연 세계의 진실들을 은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가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지속적 기술 발전이 저해될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열역학 법칙의 발견 덕분에 증기기관과 자동차가 개발될 수 있었다.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 분야인 양자역학은 텔레비전과 컴퓨터 같은 더 현대적인 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생물의학에서는 사정이 복잡하다. 의약산업에서는 약을 판매함으로써 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특히 정서적인 질환에 대해서는 효능을 확신하기 어려운 약이 판매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선 근거 없는 신념이 아니라 결국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에게는 유전자 환원론적 관점이 게놈의 복잡성으로 인해 어떻게 도전받고 조절되는지가 매우 흥미롭다.
최근의 연구 결과로 게놈의 98퍼센트를 차지하는 ‘쓰레기’ 유전자들이 사실은 유전자 활동을 조절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스위치’ 수백만 개를 보유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유전자 세포 뇌》는 이 문제를 간단히 다뤘지만, 게놈의 ‘쓰레기’ 영역에 대한 재평가를 그 의미에 맞게 공정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이런 재평가의 맥락에서 그동안 설명되지 않던 특정 질병들과 ‘쓰레기’ 영역의 관계가 이제는 훨씬 더 합당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유전자 세포 뇌》는 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여러 작은 유전적 차이 탓에 개인이 특정 질병에 걸린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연구에 대한 비판도 그동안 있었다. 최근에는 특정 유전자 자체보다는 각 개인의 유전적 특성과 환경적 요인이 결합될 때 특정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이 논쟁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서 어떤 치료법이 나은가에 관해 큰 의미가 있으므로 중요하다. 사실 이런 개인 맞춤형 진단법이 암 치료에 어느 정도 효과적이라는 점은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종양 성장을 촉진하는 구체적 돌연변이를 정확히 찾아내 더 알맞은 약물치료를 시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질병의 유전적 요인에 주목할 때는 늘 환경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여 그 중요도를 세심히 가늠해야 한다. 정신 질환이든 심장병이나 당뇨 같은 질환이든 마찬가지이다. 심장병이나 당뇨는 부실한 식사와 운동 부족이 유전적 요인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렇지만 유전학 연구에 내재적 결함이 있다면서 그 연구에서 비롯한 통찰을 모두 무시하기만 한다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 신기술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쳐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줄기세포 연구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금은 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질병 치료에 응용할 가능성이 매우 부풀려져 있지만, 미래 의학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런 논쟁은 단지 학술적 면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면에서도 중요한 논쟁이다. 만일 개인 맞춤형 의료가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활동가들이 제기하는 요구도 그에 걸맞게 조정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유전학적 통찰을 기반으로 한 새 치료법 개발 전망에 큰 기대가 있다. 하지만 그런 치료법을 부자들만 누리게 하지 않으려면, 필요한 사람들이 모두 무료로 누리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보존하고 확대하기 위한 투쟁이 필수적이라고도 본다.
저자들의 몇몇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전체로 보아 《유전자 세포 뇌》는, 환원론을 비판한다는 면에서나, 생물학과 그것의 의학적 응용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탁월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