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후 역사를 통해 보다:
‘미사일 방어’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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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방어’의 역사는 냉전 시대 핵무기 경쟁과 동전의 양면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을 코앞에 두고 미국은 일본에 두 차례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미 항복을 검토 중이었던 일본에 핵 공격을 한 것은 전후 세계 질서에서 자신이 패권을 쥐겠다는 것을 동맹국(당시엔 소련 포함)에게 과시하기 위한 성격이 있었다. 한편, 미국의 맞은편에서 경쟁적 제국주의 블록을 구축한 소련은 노동계급을 쥐어짠 결과, 종전 4년 만에 독자적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핵무기 경쟁이 시작됐다.
핵무기 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려고 상륙 작전 등을 벌이며 도발하자, 쿠바가 소련의 핵미사일을 들여오려 하며 긴장이 치솟았다. 미국은 서유럽과 터키에 배치된 핵미사일을 동원해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마지막 순간에 소련이 한발 물러서면서 ‘제3차세계대전’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훗날 공개된 회의록을 보면 미국 지배자들은 실제로 전쟁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미국 지배자들은 수도 워싱턴이 공격받는 것까지 감수할 작정이었다. 자국민이나 우방국 국민들의 안전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패권을 더 중시한 것이다.
‘미사일 방어’ 구상은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서로 핵미사일 공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핵 선제 공격을 위한 것이다. 미사일 ‘방어’를 구축하면 상대방한테서 핵 보복을 당할 우려가 사라지므로 안심하고 선제 공격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미국과 소련은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미사일 방어’ 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그러나 핵 선제 공격이라는 빤한 목표에 대한 대중적 반발과 기술적·경제적 어려움으로 1972년 미국과 소련은 ‘탄도 미사일 요격 제한’(ABM) 조약을 체결한다. ABM 조약은 ‘어느 나라도 자국 본토를 모두 포괄하는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스타워즈’
그러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경쟁은 (시장 경쟁과 마찬가지로) 상호 합의로 간단히 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결코 ‘공포의 균형’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대, 1976년 미국 지배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다시금 미사일 방어 개발의 불을 지폈다.
“소련의 무장 속도는 … 상호 억지에 필요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게 분명하다. … 10년 안에 소련이 일정한 수준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냉전 종식 후, 미국 국방부는 당시 분석이 “소련의 공격 의도를 과장했다”고 인정했다.)
한편, 1979년 미국의 핵심 중동 파트너였던 이란에서 반제국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같은 해 소련이 (이란에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의 중동 패권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결과, 미국 대통령 카터는 1980년 1월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적인 조처를 취하겠다”는 독트린을 발표한 데 이어, 같은 해 7월 소련의 중동 진격을 막기 위한 전술 핵무기 사용을 승인하는 대통령령 제59호에 서명한다. 여기에는 소련이 군사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는 미국 지배자들의 오판도 작용했다.
1981년 신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매우 노골적인 우파 인사였다. 그는 소련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유럽을 무대로 “제한된 핵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하고 호전적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의 핵무기 사용을 자제시키는 데 만족할 수 없고 더 공세적인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봤다. 핵무기 균형을 깨뜨리고 미국이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 아래 1983년, 우주에 레이저 발사체를 설치해 미국을 겨냥한 미사일을 공중에서 폭파시킨다는 ‘전략 방위 구상’(SDI)을 발표한다. SF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이런 구상은 당시 유행하던 할리우드 영화 시리즈 제목을 따 ‘스타워즈’라고 불렸다.
우주에서 레이저나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구상은 이후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겨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거듭 폐기된다. 그러나 지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해 요격한다는 ‘미사일 방어’ 계획은 냉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냉전 종식 이후 오히려 더 확대된 미사일 방어 계획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났지만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대 블록 구도가 해체되면서 주요 서방 강대국들의 동상이몽이 표면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게다가 미국은 경제력 면에서 일본과 독일에게, 나중에는 중국에게 빠르게 뒤쫓기고 있었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들 국가가 자신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래서 냉전 직후인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클린턴 정부는 발칸반도를 거듭 폭격함으로써 옛 소련 블록 소속 국가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과시했다. 세르비아를 폭격한 직후인 1999년 여름에는 ‘기술 개발이 완료되는 대로 국가 범위 미사일 방어 체계를 실전 배치한다’는 내용의 ‘국가 미사일 방어’(NMD)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ABM 조약 위반이었다.
미국 지배자들은 냉전 때 소련의 위협을 과장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거나 군사행동을 벌였는데, 냉전 해체 후에도 같은 수법을 반복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와 북한의 핵 개발(냉전이 끝날 때만 하더라도 북한은 제대로 된 핵 기술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지 못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위협’ 등을 거론하며 ‘불량국가’들의 위협을 내세웠다.
한편, 미국의 ‘미사일 방어’ 구상은 다른 핵 보유국들에게 핵미사일을 개량하도록 부추길 것이 뻔했다. 막대한 돈을 투자해 확보한 핵미사일이 ‘미사일 방어’에 의해 무력화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리 없기 때문이다.
1999년 12월 1일 유엔 총회는 ABM 조약을 엄격하게 준수하라는 결의안을 80 대 4로 통과시켰다(반대표를 던진 네 국가는 미국, 이스라엘, 알바니아, 미크로네시아였고,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기권했다).
각축장
2001년 1월 미국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는 유럽을 순방하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 같은 해 3월 독일은 관련 기술 개발에 참여하는 것에 “핵심적 경제적 이익”이 걸려 있다며 ‘미사일 방어’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마침내 조지 W 부시는 “ABM 조약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며 ABM 조약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1년 후 실제로 ABM 조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다. 당시 미국의 ‘우려하는 과학자 연합’은 이런 행보가 국제 핵무기 경쟁을 부추겨 “중국의 핵무기 규모를 10배 이상 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늘날 동아시아가 군비 경쟁 각축장이 될 것을 예견한 것이다.
2001년 9월에 때마침 터진 9·11 사태는 ‘미사일 방어’에 대한 국내 반대를 뒤집는 정치적 ‘호재’가 됐다. (비록 ‘미사일 방어’는 9·11 같은 테러를 막는 것과는 기술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말이다.) 패트리엇 미사일과 함께 미사일방어망의 한 요소를 이루는 사드는 2008년 미국에서 첫 실전 배치된다.
한편 미국은 ‘미사일 방어’를 위한 미사일 배치를 미국 영토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름을 NMD에서 MD로 바꿨다(머릿글자 N은 미국 영토를 지칭했다). 오늘날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따라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 견제하려고 한국에 사드를 배치해 MD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상의 역사가 보여 주듯 미국의 ‘미사일 방어’는 군사적 공세와 보조를 맞추며 진행됐다. ‘미사일 방어’는 평범한 사람들을 전쟁 위협에서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과 군사적 우위를 지키려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수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