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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의 역사: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압력이 빚어낸 ‘괴물’

북한 핵실험·로켓 발사 등을 계기로, 한반도와 그 주변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은 3월 핵항공모함까지 동원해 핵 선제 공격훈련인 키리졸브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려 하고, 이에 중국·러시아가 반발하고 나선 형국이다.

이처럼 그동안 북한 핵 문제는 한반도와 그 주변 정세에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였다. 북한 핵무기는 거의 언제나 주변 강대국들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진 배치하는 핑계거리가 됐다.

3월 12일 키리졸브 연습의 일환으로 포항 일대에서 진행된 '한미 연합상륙훈련' ⓒ사진 출처 국방홍보원

북한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끝내 핵무기 개발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는 북한이 노동자를 억압·착취하며 군사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남한과 다를 바 없는 체제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 위험을 키운 것은 미국 제국주의였다. 따라서 이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보려면 냉전 해체 이후 제국주의 경쟁과 미국의 패권 전략이라는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불량 국가”와 1994년 위기

냉전이 끝날 즈음, 미국 지배자들은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 했다.

1945년 미국은 세계경제 산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강력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은 선진국들보다 세 배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냉전 시절 미국과의 동맹 체제 아래에서 유럽과 일본이 미국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일본·서독(독일) 등이 무섭게 성장했지만, 냉전이 지속되는 한 서방 진영 내에서 경제적 경쟁이 지정학적 경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공의 적’ 소련에 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단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공공의 적이 사라져 버렸다. 냉전 종식은 “두 초강대국이 아니라 다수의 열강이 무대를 지배하는 훨씬 더 유동적인 제국주의 간 경쟁의 시기”를 여는 계기가 됐다.

이제 미국은 무슨 명분으로 해외 미군 기지들을 유지하고 군사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냉전 때 성장한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들한테 자신의 헤게모니가 왜 존속돼야 하는지를 무엇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을까? 미국 지배자들은 이런 물음들에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옛 소련을 대신할 ‘적’들을 찾았다. 이라크 같은 ‘불량 국가’가 바로 미국이 찾아낸 ‘새로운 위협’이었다. 1991년 걸프전은 미국이 자신의 세계 패권을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재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은 ‘동아시아판 이라크’ 구실을 맡을 적임자였다. 1991년 걸프전이 끝난 후 당시 미국 합참의장 콜린 파월은 “순찰 중인 경찰[미국]이 다음번 임무를 수행할 곳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제 카스트로와 김일성에게 가 볼 생각이오.”

1991년부터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 핵 “위협”을 이를 데 없이 과장해 북한을 궁지에 몰았다.

당시 북한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추진했고, 일본과의 수교 노력도 기울였다. 남북 대화도 진전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대미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에 핵 사찰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한반도 정세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더 나아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서 합법으로 인정되는 핵 재처리도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어쨌든 북한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1992년 1월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했고, 그해 5월부터 IAEA의 임시 사찰을 수용했다. 그해 미국과 한국은 팀스피리트 훈련(키리졸브의 전신)을 취소했다.

그러나 북한의 IAEA 사찰 수용도 미국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IAEA는 북한이 IAEA에 제출했던 최초 보고서와 IAEA의 사찰 결과 사이에 “중대한 불일치”가 있다며 꼬투리를 잡았다. 결국, IAEA는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시설 2곳을 특별 사찰하겠다고 북한에 요구했다. IAEA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특별사찰 요구였다. 북한은 이 시설들이 군사시설이라며 특별 사찰 요구를 거부했다. 북한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유엔 무기사찰단이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폭격 목표를 정할 때 사찰단원들이 넘겨 준 정보를 이용했었다.

북한이 사찰을 거부하자, 1993년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약속을 파기했다. 그러자 3월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미 회담이 열려 그해 6월 미국의 북한 안전 보장과 북한의 NPT 탈퇴 유보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이 나오기도 했지만, 미국이 새로운 의혹과 요구를 제기하면서 합의는 곧 휴지 조각이 됐다.

결국, 미국은 1994년 봄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계획을 준비했다.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을 준비하면서, 미군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고 핵항공모함을 동아시아에 추가 파견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유사시 대규모 증원군을 한국에 보낼 계획도 승인했다.

끔찍한 재앙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위기는 가까스로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봉합됐다. 북한이 미국의 핵심 요구(NPT 잔류, 핵개발 포기)를 받아들였다.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이 어려운 경수로를 북한에 건설해 주기로 약속했다. 명백히 북한에 불리한 협정이었다. 고(故) 리영희 선생도 1994년 위기가 “북한의 군사적·정치적 후퇴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제네바 합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점과 더불어, 그해 7월 김일성의 죽음이 있었다. 미국은 김일성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한이 격변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북 전쟁 위협과 제네바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은 냉전 종식 후에도 동아시아에서 손 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정은 미국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라고 동아시아의 다른 강대국들(중국, 러시아, 일본)에게 천명한 셈이었다. 패권을 지키려고 전쟁 위기도 불사하면서, 미국 자신은 그런 행위를 “전쟁 억지력”, “지역적 균형자”라고 불렀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은 합의 이행에 협조적이었다. 미국 국무부조차 “전체적으로 북한의 협력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목록은 끝이 없었다. 북한 미사일 개발과 그 수출 문제, 인권 문제, 비자금 조성 문제, 심지어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 등. 이는 북한을 완전히 발가벗길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미국은 그러면서 자신들의 약속 이행은 계속 지연시켰다. 1996년에는 제네바 합의와 전혀 무관한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를 꺼내 들어, 경제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금창리의 “빈 터널”

1998년 미국은 북한을 다시 한 번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미 독재자 수하르토가 권력을 잃는 등 정치 상황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8년 5월 인도가 핵실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중국의 핵전력 증강이나 일본의 핵무장 시도를 자극할 만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선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약해질까 봐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미국 클린턴 정부는 다시 북한 핵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의 패권을 재천명할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미국은 근거도 없이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찰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북한이 로켓을 발사해, 위기가 고조됐다.

미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1999년 미국이 코소보 문제로 유고에 군사 개입까지 하자, 북한은 유고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긴장하게 됐다. 결국, 높아진 긴장 속에 1999년 6월 서해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이 금창리 시설 사찰을 수용하자, 미국 대표단이 금창리 시설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은 금창리에서 “빈 터널과 동굴을 발견한 것 말고는 어떠한 설비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은 또 다른 핵시설 예상 지역을 지목했지만, 그곳도 핵개발과는 전혀 무관한 곳으로 밝혀졌다. 당시 전직 미국 국무부 관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왜곡된 정보뿐이다.”

그러나 이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문제 삼은 것은 미국에 한 가지 분명한 이익을 가져다 줬다. 미국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고, 미사일 문제를 제기한 것은 대중국 견제 정책인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을 위해서였다. 금창리 의혹이 제기된 후 북한이 로켓까지 발사하자, 한 공화당 의원은 백악관 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으니 이제 NMD(국가미사일방어체제)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미국은 이런 소동을 이용해 1999년 일본을 TMD(전역미사일방어) 체제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금창리 위기가 봉합되고 일본이 TMD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긴장은 점차 완화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북·미 관계도 진전돼, 같은 해 양국은 북미 공동 코뮤니케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유화 국면은 사실 매우 불안정했다. 우선, TMD로 미일 동맹을 다지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재확인하는 것은 장차 중국·러시아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열강의 세력 균형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응해 미국이 자신의 패권을 재천명하려 애쓸수록 한반도의 일시적인 유화 국면은 언제든 새로운 긴장 국면으로 뒤집어질 수 있었다.

“악의 축” 선언에서 2006년 핵실험까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가 승리하면서, 부시의 선거 운동을 지원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구상을 실행할 기회를 잡게 됐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전략은 치열해지는 제국주의 간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고자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하락을 군사력 행사로 메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즉,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이 갖지 못한 군사력을 이용하면 시장 경쟁에서 잃고 있는 것을 만회하고도 남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2001년 9·11 사건을 계기로, 부시 정부는 군비 지출을 대폭 증액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감행했다.

그리고 부시 정부는 이라크 전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중동을 재편하고자 했다. 중동 재편에 성공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석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부시 정부는 중국, 러시아 등을 겨냥해 MD 프로그램도 급속도로 추진했다. 이때 부시는 북한, 이란 같은 국가들의 ‘위협’을 MD 추진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도전을 방지하고자 부시 정부는 동맹 구축·강화에도 나섰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 긴장을 높였다. 2001년 조지 부시 정부는 사실상 모든 대북 협상을 중단시켰다. 2001년 12월 부시 정부는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북한을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으로 올려놨다. 마침내 2002년 1월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해 여름에 또다시 서해교전이 벌어졌다.

2002년 10월 부시는 새로운 대북 압박 카드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했다.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으로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부시의 새로운 의혹 제기는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우선, 이라크 침략에 대한 의회 동의를 앞두고 ‘대량살상 무기 색출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당시 북한에 접근하고 있던 일본에 미국은 대북 접근 금지 신호를 보냈다.

부시의 대북 압박 강화에 반발한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다시 탈퇴했다. 그리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하고 있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과 위협에 대응해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했다. 북한이 보기에 이라크 전쟁의 교훈은 명백했다. 2003년 6월 북한 관리들은 북한을 방문한 미국 의회 대표단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핵무기를 제조하는 것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는 사이에, 북한은 핵능력 강화에 주력했다. 2005년 북한은 핵무기 보유 선언까지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열린 6자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돼 다시금 대화 국면으로 이행하는 것 같았다. 일각에서는 9·19 합의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9·19 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국은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고 대북 금융 제재를 단행해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북한은 2006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1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그 뒤 부시는 이른바 2·13 합의, 10·3 합의를 거쳐 상황을 봉합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국의 힘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부시 정부는 중동 문제 해결에 힘을 쏟고자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과 전략적 인내

2008년 오바마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자,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국의 새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듯,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불량 국가’들을 향해 “당신이 주먹을 펴면 우리도 손을 내밀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키리졸브/독수리 연습이 벌어지는 3월 13일 부산에 들어온 미국 핵항모 존 C. 스테니스 호. ⓒ사진 출처 국방홍보원

오바마 정부는 미국이 계속 중동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는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자로 떠오른 중국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바마는 중동에 과잉 투여돼 있던 역량을 조정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려고 했다.

그래서 오바마는 전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위협’을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에 이용했다. 기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을 겨냥한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북한 ‘위협’을 이용하는 게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문건에도 “최근 북한의 도발은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동맹의 기반을 강화하고 지역 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즉, 오바마도 북한 핵 문제의 해결보다 ‘활용’에 더 관심이 있었다.

오바마 정부가 북한 ‘위협’을 이용해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관철시킨 대표적 사례는 바로 2010년 천안함 사건이었다. 미국은 천안함 사건을 이용해 주일미군의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려던 당시 일본 하토야마 정부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곧바로 핵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를 서해 한미 군사훈련에 투입했다. 중국의 코앞에서 미국 항공모함이 무력 시위를 한 것이다.

오바마는 북한 ‘위협’을 부풀려 동아시아 지역 MD를 구축하고 한·미·일 삼각 동맹을 강화하는 데도 이용했다. 예컨대, 2013년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이를 명분 삼아 사드를 괌에 전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미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를 계기로 한국의 MD 참여에 급진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한반도는 반복적으로 긴장이 높아져 왔다. 오바마는 “전략적 인내”를 표방하며 북한에 대한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북한의 여러 진지한 대화 제안들을 오바마 정부는 묵살하기 일쑤였다. 결국, 오바마 임기 동안 북한은 세 차례나 핵실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근 사드 배치 소동에서 드러나듯이,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갈등이 더 악화했다.

사반세기의 교훈

25년 전만 해도, 북한은 핵무기도 중거리 미사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 실시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 능력이 있는 국가로 변모해 있다. 전후 맥락을 잘 모른다면, 북한의 핵·로켓·군사 도발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주범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돌아본다면, 북한 핵 문제는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북한 ‘악마화’가 낳은 ‘괴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북한 ‘악마화’는 결국 점증하는 제국주의 간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패권 전략과 맞물려 있다. 세계 경제력의 분포가 역동적으로 변하면서,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점증하는 지역이 됐다. 그리고 한반도는 기존 패권을 쥔 미국과 도전자 중국이 경쟁하는 무대에 속해 있고, 이 갈등 속에 한반도의 불안정도 증대해 왔다. 그리고 북한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전략에 이용됐다.

따라서 오늘날 한반도의 불안정은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본질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우리는 근원적인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그동안 진보·좌파의 대응은 6자회담이나 북·미 대화 같은 국가 간 협상을 촉구하는 것에 주력해 왔다. 지금도 6자회담 등 대화 테이블을 재개해 한반도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병행 추진하는 게 현 불안정 상황에 대한 대안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보면, 국가 간 협상으로 한반도 불안정을 해결하고 항구적 평화 체제를 수립하자는 전략은 거듭 좌절돼 왔다. 기존 제국주의 체제가 온존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지속되는 한, 국가 간 대화로는 현실이 근본에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3~94년에 고조된 한반도 긴장과 전쟁 위기 앞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했다. 2005년 9·19 합의는 미국의 독자 금융 제재 실시와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6자회담 참가국들의 갈등은 커져 왔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제도화된 협력 구조 속에 역내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따르기를 바라지만, 이는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중국은 많은 경우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북한 문제도 그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대화든 6자회담이든 모종의 대화가 시작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새로운 긴장 국면 이전의 막간극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제국주의는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체제이고, 자본주의 동역학을 바탕으로 한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부이자 점증하는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 간 협상이나 중국 같은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운동을 위한 초석을 놓아야 하는 것이다.

※ 참고 자료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김하영, 책벌레, 2002.

《남한 북한》, 존 페퍼, 모색, 2005.

《두 개의 한국》, 돈 오버도퍼·로버트 칼린, 길산, 2014.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9.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오늘의 동아시아 불안정과 한반도》, 김하영 외, 노동자연대, 2012.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반세기의 신화》, 한길사), 리영희.

‘북한 핵 20년의 역사 ― 벼랑으로 내몰며 생떼를 부려 온 미국’, 한규한, 〈레프트21〉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