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의 역사: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압력이 빚어낸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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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
이처럼 그동안 북한 핵 문제는 한반도와 그 주변 정세에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였다. 북한 핵무기는 거의 언제나 주변 강대국들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진 배치하는 핑계거리가 됐다.

북한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끝내 핵무기 개발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는 북한이 노동자를 억압
그러나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 위험을 키운 것은 미국 제국주의였다. 따라서 이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보려면 냉전 해체 이후 제국주의 경쟁과 미국의 패권 전략이라는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불량 국가”와 1994년 위기
냉전이 끝날 즈음, 미국 지배자들은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 했다.
1945년 미국은 세계경제 산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강력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은 선진국들보다 세 배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냉전 시절 미국과의 동맹 체제 아래에서 유럽과 일본이 미국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일본
그런데 이제 그 공공의 적이 사라져 버렸다. 냉전 종식은
이제 미국은 무슨 명분으로 해외 미군 기지들을 유지하고 군사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냉전 때 성장한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들한테 자신의 헤게모니가 왜 존속돼야 하는지를 무엇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을까? 미국 지배자들은 이런 물음들에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옛 소련을 대신할
북한은
1991년부터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 핵
당시 북한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남
그러나 미국이 북한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에 핵 사찰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한반도 정세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
어쨌든 북한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1992년 1월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했고, 그해 5월부터 IAEA의 임시 사찰을 수용했다. 그해 미국과 한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그러나 북한의 IAEA 사찰 수용도 미국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IAEA는 북한이 IAEA에 제출했던 최초 보고서와 IAEA의 사찰 결과 사이에
북한이 사찰을 거부하자, 1993년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약속을 파기했다. 그러자 3월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
결국, 미국은 1994년 봄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계획을 준비했다.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을 준비하면서, 미군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고 핵항공모함을 동아시아에 추가 파견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유사시 대규모 증원군을 한국에 보낼 계획도 승인했다.
끔찍한 재앙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위기는 가까스로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봉합됐다. 북한이 미국의 핵심 요구
제네바 합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점과 더불어, 그해 7월 김일성의 죽음이 있었다. 미국은 김일성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한이 격변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북 전쟁 위협과 제네바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은 냉전 종식 후에도 동아시아에서 손 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정은 미국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라고 동아시아의 다른 강대국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은 합의 이행에 협조적이었다. 미국 국무부조차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목록은 끝이 없었다. 북한 미사일 개발과 그 수출 문제, 인권 문제, 비자금 조성 문제, 심지어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 등. 이는 북한을 완전히 발가벗길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미국은 그러면서 자신들의 약속 이행은 계속 지연시켰다. 1996년에는 제네바 합의와 전혀 무관한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를 꺼내 들어, 경제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금창리의 “빈 터널”
1998년 미국은 북한을 다시 한 번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미 독재자 수하르토가 권력을 잃는 등 정치 상황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8년 5월 인도가 핵실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중국의 핵전력 증강이나 일본의 핵무장 시도를 자극할 만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선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약해질까 봐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미국 클린턴 정부는 다시 북한 핵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의 패권을 재천명할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미국은 근거도 없이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찰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북한이 로켓을 발사해, 위기가 고조됐다.
미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1999년 미국이 코소보 문제로 유고에 군사 개입까지 하자, 북한은 유고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긴장하게 됐다. 결국, 높아진 긴장 속에 1999년 6월 서해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이 금창리 시설 사찰을 수용하자, 미국 대표단이 금창리 시설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은 금창리에서
그러나 이때 북한의 핵
금창리 위기가 봉합되고 일본이 TMD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긴장은 점차 완화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북
그러나 이 유화 국면은 사실 매우 불안정했다. 우선, TMD로 미일 동맹을 다지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재확인하는 것은 장차 중국
“악의 축” 선언에서 2006년 핵실험까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가 승리하면서, 부시의 선거 운동을 지원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구상을 실행할 기회를 잡게 됐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전략은 치열해지는 제국주의 간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고자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하락을 군사력 행사로 메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즉,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이 갖지 못한 군사력을 이용하면 시장 경쟁에서 잃고 있는 것을 만회하고도 남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2001년 9
그리고 부시 정부는 이라크 전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중동을 재편하고자 했다. 중동 재편에 성공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부시 정부는 중국, 러시아 등을 겨냥해 MD 프로그램도 급속도로 추진했다. 이때 부시는 북한, 이란 같은 국가들의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 긴장을 높였다. 2001년 조지 부시 정부는 사실상 모든 대북 협상을 중단시켰다. 2001년 12월 부시 정부는
2002년 10월 부시는 새로운 대북 압박 카드로
부시의 새로운 의혹 제기는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우선, 이라크 침략에 대한 의회 동의를 앞두고
부시의 대북 압박 강화에 반발한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다시 탈퇴했다. 그리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하고 있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과 위협에 대응해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했다. 북한이 보기에 이라크 전쟁의 교훈은 명백했다. 2003년 6월 북한 관리들은 북한을 방문한 미국 의회 대표단한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는 사이에, 북한은 핵능력 강화에 주력했다. 2005년 북한은 핵무기 보유 선언까지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열린 6자회담에서는 9
결국 북한은 2006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1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그 뒤 부시는 이른바 2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과 전략적 인내
2008년 오바마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자,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국의 새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듯,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오바마 정부는 미국이 계속 중동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는 경제적
그래서 오바마는 전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오바마 정부가 북한
같은 해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곧바로 핵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를 서해 한미 군사훈련에 투입했다. 중국의 코앞에서 미국 항공모함이 무력 시위를 한 것이다.
오바마는 북한
그러나 이 때문에 한반도는 반복적으로 긴장이 높아져 왔다. 오바마는
사반세기의 교훈
25년 전만 해도, 북한은 핵무기도 중거리 미사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 실시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 능력이 있는 국가로 변모해 있다. 전후 맥락을 잘 모른다면, 북한의 핵
그러나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돌아본다면, 북한 핵 문제는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북한
미국의 북한
따라서 오늘날 한반도의 불안정은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본질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우리는 근원적인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그동안 진보
그러나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보면, 국가 간 협상으로 한반도 불안정을 해결하고 항구적 평화 체제를 수립하자는 전략은 거듭 좌절돼 왔다. 기존 제국주의 체제가 온존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그래서 1993~94년에 고조된 한반도 긴장과 전쟁 위기 앞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했다. 2005년 9
게다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6자회담 참가국들의 갈등은 커져 왔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제도화된 협력 구조 속에 역내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따르기를 바라지만, 이는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중국은 많은 경우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북한 문제도 그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북
제국주의는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체제이고, 자본주의 동역학을 바탕으로 한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부이자 점증하는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 간 협상이나 중국 같은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
※ 참고 자료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김하영, 책벌레, 2002.
《남한 북한》, 존 페퍼, 모색, 2005.
《두 개의 한국》, 돈 오버도퍼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9.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오늘의 동아시아 불안정과 한반도》, 김하영 외, 노동자연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