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로 점철된 이주정책, 그리고 다문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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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현재 한국에 이주민 1백88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1990년 5만여 명에 이르던 이주민이 200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 현재 총 인구의 3.5퍼센트에 이르고 이주노동자는 90만 명이 넘는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중요한 이주민 유입 국가가 됐다.
지난 10년간 한국에 정주하거나 앞으로 정주할 이주민이 증가하는 점도 중요한 변화다. 결혼 이주민 중 귀화자 비율이 점차 늘어 43.4퍼센트(법무부, 2012년 6월)에 이른다. 또 결혼 이주민 가정의 자녀들(이들 대부분은 한국 국적자)이 가파르게 늘었는데 18세 이하 자녀는 2015년 통계로 20만 8천 명에 이른다.
앞으로 정부가 부족한 생산가능인구를 충당하기 위해 제한적일지라도 이민을 허용하는 정책을 펴는 점, 이주노동에 의존하는 산업이 더 늘고 있는 점, 기존 정주 이민자들을 통해 연쇄적인 이민자 증가가 뒤따를 것이라는 점, 이주민 증가에 따라 ‘인종’ 간 혼합도 자연스레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 등을 볼 때 다인종·다문화적 인구 구성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이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
이런 변화에도 한국이 다문화주의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문화주의는 하나의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면서 차별과 편견이 없이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시민적 권리와 정책들을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고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과 ‘다문화가족지원법’ 같은 법률을 제정했지만, 그 이후로도 정부 정책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다문화주의를 역행하는 정책들도 병행됐다. 한국은 여전히 국적을 부여할 때 혈통주의를 유지하고 있고 이민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이민에 대해 “실정법 상 가장 폐쇄적인 국가”로 꼽힌다.
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 하에서 노동권을 제약당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야만적인 단속·추방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노무현 정부는 역대 정부들 중에 이주노동자를 가장 많이 추방한 기록을 세웠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 미국의 중동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등 전쟁 지원에 나서면서 무슬림과 이주민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이주민의 출신 국가, 경제적 지위, 학력 등에 따른 차별을 더 강화했고 다수 이주민에 대한 규제와 통제도 강화했다. 이주 정책에서 인권과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던 내용은 점점 축소되고 이주 정책의 전면에 ‘국가 경쟁력 제고’와 ‘안전한 국경 관리’가 등장했다.
박근혜 정부도 결혼 이주민 가정에 대한 지원과 서비스(언어 교육, 통역 제공, 각종 상담)를 다문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하고는 있지만, 정부의 주된 관심사는 늘어난 결혼 이주민 자녀들이 곧 사회로 진출할 때를 대비한 ‘사회 통합’에 있다.
우파 정부들 하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체류 자격, 경제적 조건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열악해졌다. 게다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정부는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빼앗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 특히 최근 제정된 테러방지법은 이주민을 잠재적 테러 위험 집단으로 삼고 있어 무슬림을 비롯한 이주민 마녀사냥은 더 강화될 것이다.
결혼 이주민은 ‘위장 결혼’이라는 의심 속에 귀화 심사가 강화되고 한국어 능력 등을 더 요구 받았다. 난민법이 제정된 후 난민 신청자는 1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고 있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5백여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정부는 난민 인정에 인색하다.
정부는 ‘고급 인력’을 우대하고 ‘투자 이민’을 늘리기 위한 영주와 귀화 요건은 계속 완화하면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신청하는 일반 귀화 요건은 대폭 강화했다. 최근에는 귀화 요건 중에 재산 기준을 두 배로 올렸고 고용허가제 등의 비자는 정주를 원천 금지하도록 하는 법령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주노동자 중 일부가 숙련층이 되면서 정주로 연결될 가능성이 생기자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부족한 노동력의 큰 부분은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어업, 그리고 일부 서비스업 등 대부분 3D 산업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분야는 오히려 늘고 있다. 한국 경제의 필요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이들에게 사회적·정치적 권리는 보장하지 않으려 정주를 금지하는 것은 완전히 위선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추진된 다문화 정책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정부는 다문화주의 정책 대상에 한국에 정주하는 이주민만을 포함했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수년 안에 귀환할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들은 배제됐다. 이주노동자가 이주민 인구의 절반을 넘는데도 말이다. 이주노동자 가족 동반은 금지돼 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적 조처인 의료 보험과 교육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둘째, 다문화 정책의 핵심 대상이었던 결혼 이주민(여성)들의 안정적인 체류 문제는 외면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은 배우자(남편)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만 체류 자격을 갱신할 수 있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혼할 경우에도 남편의 귀책 사유를 입증하지 못하면 한국에 체류할 수 없다.
결혼 이주민 지원 사업들은 한국어 교실, 한국 문화 배우기 등 한국 사회와 가족제도에 동화시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다문화 정책이 ‘가족의 재생산을 목적’에 둔 “결혼 이주민 관리제도”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2012년 전국 다문화 프로그램을 2천9백28개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 동화 프로그램 58.9퍼센트, 한국문화 체험 16.7퍼센트인데 반해 상호 문화 이해 프로그램은 7.4퍼센트에 불과했다.
셋째,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주민 운동과 그들의 세력화는 혹독하게 탄압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주노조였다. 이주노조의 역대 간부들은 표적 탄압으로 추방되거나 출국을 강요받았고 노조 자체를 인정받는 데 10년이 걸렸다. 이조차 사실상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지속하면 언제든 노조 인정을 취소할 수 있게 했다. 또, 한국의 출입국관리법은 외국인의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조항을 둬 정당 가입이나 정치적 세력화가 일절 금지돼 있다.
아래로부터 다문화주의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다문화 없는 다문화주의’라는 비판을 받았고 ‘관(정부)주도 다문화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이를 위해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 논의도 다양한 입장이 있다.
예컨대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주민들의 “연결망이나 사회적 관계”를 “주류 문화의 한 문화로 인정하고 통합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 정책의 변화를 강조한다.
반면 한양대 다문화연구소 오경석 박사는 “이주자 집단과 국내 소수자 집단 간의 연대 모색” 을 통해 사회통합이 아니라 다원화를 지향하는 운동에 강조를 두는 주장을 한다.
이런 차이에도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특히 이주민 스스로의 활동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주민을 정책 대상으로만 삼는 정부의 정책이나 태도와는 차이점이 있다.
또, 문화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도 본다. 그래서 다문화주의 정책에 “일상, 노동, 정치, 교육, 문화, 미디어 등의 전 영역에 걸쳐 발생하는 차별과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또는 초점을 문화보다는 ‘생존’ 문제에 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민들이 상시적인 단속의 공포에 시달리거나 취약한 체류 자격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문화적 권리가 우선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이런 문제의식에는 이주민 지원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부분적으로 반영돼 있기도 하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상당부분 이주민 지원단체들의 제안과 뒷받침 속에서 추진된 것이기도 했다. 정부의 정책들은 이주민 지원 단체들이 다문화 사업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위탁 운영을 하는 방식으로 직간접적으로 수행했다. 이런 방식의 활동을 통해 이주민 지원 운동은 정부 정책을 집행하고 전달하는 벨트 구실을 하며 지원 단체 고유의 활동이 약화되기도 했다. 이주민 당사자들은 다문화 행사에 동원 대상이 될 뿐이었다.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는 정부의 위선적인 정책을 비판하며 이주민 스스로의 활동과 운동을 고무하는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징은 대표적인 이주민 당사자 운동인 이주노조 운동에서 두드러졌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이주노조 운동은 문화적 권리보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강조하고 이를 집단적 투쟁과 조직화를 통해 쟁취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차별적 정책과 제도에 맞선 투쟁이 불가피했고, 소수자 집단(이주노동자 공동체 등) 간의 연대뿐 아니라 노동운동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주노동자들이 강력한 한국의 노동운동으로부터 방어 받고 함께 싸울 힘을 얻기를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핵심 동력이었다.
한편, 국가 탄압에 맞선 이주노동자들의 끈질긴 저항은 성소수자 운동이나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며 연대의 끈을 만들기도 했다.
계급
오늘날 다문화주의가 소수 집단의 고립과 사회 분열을 낳는다며 공격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인종차별을 더 강화하는 것에 맞서 다문화주의를 옹호해야 하고, 억압받는 집단의 정체성을 비난하는 것에 맞서는 것은 중요하다.
이주민(공동체)들이 ‘우월’한 문화에 순응하라는 압력을 받지 않고 살아갈 권리를 옹호해야 하고 주류 문화가 좋은 문화라는 관념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체제인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여러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소수인종 집단의 차별에 맞서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또 사회를 문화들의 공동체라는 관점으로 보기보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로 볼 때,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의 수단으로 차이를 이용하는 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러려면 출신 배경이 무엇이든 피착취자들이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인종차별에 맞서는 전략에서도 계급이 중요하다.
계급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면,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국가 기구에 의존하는 전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차별을 제도화하고 유지·강화하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이용해 차별을 없애기는 힘들다.
또 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저항에서 핵심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단결한 노동계급 저항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보는 것이다.
계급 투쟁은 인종차별을 극복할 조건을 만들 수 있다.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고양되면 진정한 적을 겨냥해 투쟁할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투쟁이 떠오른다고 인종차별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은 단결의 가능성 창출하지만, 이런 잠재력은 정치 조직과 노동조합의 구실, 그리고 더 폭넓은 이데올로기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작업장 밖의 정치적 운동과 노동 계급 속에서 인종적 단결을 추구하는 좌파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한국 이주민의 압도 다수가 노동계급이고, 노동계급 내 인종적 구성은 앞으로 더 다양해질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인종적 배경이나 국적을 가진 그룹들 사이에 경쟁과 적대감을 부추기고 제도화하는 일체의 시도, 즉 인종차별에 맞서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3·21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맞이
제 이주·인권·노동·사회단체 국제연대 기자회견
인종차별적 법과 제도를 고쳐라!
● 일시: 3월 21일(월) 오전 11시 ● 장소: 광화문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