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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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새 서구의 일부 좌파들 사이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단일하지는 않다.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비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다양한 이론가들이 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겔의 책이 2013년 재출간된 뒤 그의 사회재생산 이론이 부흥하고 있다.
사회재생산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 관련된 기관들이 재생산되는 것, 즉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가리킨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가사노동)과 자본 축적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한 ‘이중체계’론의 대안으로 제시됐다. 1983년 처음 출판됐다가 2013년 재출판된 보겔의 책 제목이 이런 의도를 잘 나타낸다. 그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 — 단일 이론을 향해》이다.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급진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1]을 수용해 이중체계론을 제시했다.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와 별개로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산물로 설명하며, 상품 생산과 착취의 영역과 사사화(私事化)된 가족의 영역을 분리해 별도로 작동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를 극복하고, 가족이 여성 차별에서 하는 구실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여성 차별을 유물론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1970년대 이후 초역사적 가부장제 이론이 득세하고, 뒤이어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페미니즘에서는 한동안 유물론과 총체적 설명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주의적 서술과 파편적 경험을 나열하는 서술이 페미니즘을 지배했다.
그동안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차별과 관련된 제도로 가족에 주목해 왔지만, 주로 가족 내의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지, 가족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다루는 논의는 흔치 않았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다시금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를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성 차별을 단지 남성들의 태도나 관념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인간이 지닌 정신적·육체적 능력이 결합된 것으로 사용가치(어떤 형태든)를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능력”이라면서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이 아주 독특한 상품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이 지속되려면 생산조건의 구성요소로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노동계급 가족이 하는 구실을 적절히 이론화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노동력 재생산 방식에 관한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이론화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여성 차별이 “세대 재생산 과정”에서 남녀가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봤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대체로 일어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로서 가족을 지목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첫째, 직접 생산자들이 에너지를 충전해 다시금 일터로 갈 수 있게 하는 각종 일상 활동들이 있다. 둘째, ‘종속계급’에서 노동하지 않는 구성원들(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다른 이유로 노동인구에 포함되지 않은)을 유지하는 활동이 있다. 셋째, 종속계급 중 사망했거나 더는 일할 수 없게 된 구성원들을 대체하는 과정이 있다.
보겔은 “사회에서 성별의 지위가 다른 데는 물질적 요인이 있고 생물학은 그 일부”이지만, 어느 사회든 성차를 사회관계에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야 한다고 해서 여성이 꼭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과 개인의 차이가 지닌 사회적 중요성은 그런 차이들이 뿌리내린 실제 사회의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그래서 여성은 계급사회에서 노동을 해도 가정에서 맡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은 “직접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노동력 재생산에서 다른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바로 계급사회 여성 차별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보겔은 “개별 가족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긴장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여성 차별이 오직 남성에 의한 차별이고, 여성 차별이 역사를 초월해 존재하는 적대적인 성별 분업에서 비롯했고 가족에 체화된 것”처럼 보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성의] 가사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이고, (성별 분업이나 가족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물질적 기초”라고 명료하게 말한다.
이처럼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로 보는 음모론적 설명과는 다른 유물론적 설명이다. 가사노동을 남성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본다.
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력인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가족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그들뿐 아니라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구조화하는 제도로서 가족에 주목해 왔고,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을 강조하며 여성 차별과 착취를 유기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적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급의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지배계급의 가족은 부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노동(청소, 요리, 빨래, 양육, 간병 등)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가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양육에는 단지 먹이고 입히는 것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규범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수하는 사회화도 중요하게 포함된다. 가족이 험난한 세상의 안식처라는 이데올로기는 고용주들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구실을 하고,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 보수적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도 유용하다.
그러나 가족이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인 것은 아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임금노동 착취와 대등하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학을 이루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일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사노동이 임금노동만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고 자본 축적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며 여성이 가정에서 재생산노동을 하는 노동자라고 주장한다.[2]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는 상품 생산 이외의 가치 생산을 보지 못한다”며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관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의 차이를 흐리는 견해는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흔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인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는 여성은 “남성 임금노예의 노예”이고, 여성 노예가 남성 임금노예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했다. 가정주부를 착취받는 ‘생산적 노동자’로 본 그의 저서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소규모 운동을 촉진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는 임금노동만이 가치를 갖고 ‘생산적’으로 여겨지므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에 동참했던 페데리치는 지금껏 이 운동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은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의 용어들을 차용해 진행됐지만, 대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오해한 채 이뤄졌다.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본 마르크스가 여성의 가사노동을 하찮은 일로 경시했다고 오해하면서, 마르크스의 범주 자체가 성차별적이라고 비판한 페미니스트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해당 노동이 유용한지 또는 인간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중심으로 가치가 있는지 또는 생산적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는 노동을 뜻했다. 이때 ‘생산적’이라는 의미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어떤 노동이 그렇게 간주되는지 밝힌 것이었다. ‘생산적 노동’ 개념은 도덕론의 개념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원천을 밝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밝히려는 시도의 도구였다.
마르크스는 착취를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력으로 파악했다. 착취는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 중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별 노동자가 수행하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추상적 노동이다. 착취는 사회적 관계, 즉 한편에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자본가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 가치를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해당 시기에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시간(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중요하다.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무보수로 하는 가사노동은 상품(재화든 서비스든)을 생산하는 노동처럼 고용주의 통제를 받으며 수행하는 노동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비교되는 성격의 노동이 아니다. 따라서 임금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둘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율주의자들은 생산의 개념을 확대해 가족을 생산의 장소로 취급한다(자본주의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생산관계로 보는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측의 ‘사회적 공장’ 개념에서 유래).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의 피지배계급 가족과 달리 생산의 단위가 아니다. 봉건제에서 농민은 가족 단위로 일했고 가족은 생산과 재생산이 함께 이뤄지던 단위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공장제 생산이 도입되면서 일터와 가정이 공간적으로 분리됐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뒤 노동계급 가족은 초기에 해체 위기를 겪다 다시 재조직됐는데, 노동계급 가족은 생산이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며 상품을 소비하는 단위가 됐다.
무급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체제 지속에서 임금노동 착취만큼이나 핵심적이라고 본다면, 자본주의에서 갈수록 임금 노동자가 증가해 온 사실, 특히 여성들의 임금노동 참가가 증가해 온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20세기 들어 산업국가에서는 전업주부 수가 급격히 줄고, 갈수록 많은 여성이 집 밖의 임금노동에 참가해 왔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은 국가가 여성 차별을 위해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를 유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윤을 향한 경쟁적 자본 축적 압력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계급사회와 구별되는 역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족은 별도의 동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이런 자본 축적 압력에 종속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이용하는 메커니즘(기제)의 하나다.
사실, 여성이 전업주부로만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여성을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개별 가족에 떠넘기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준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여성을 전업주부로 가정에 묶어두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이다. 자본가 계급에게 여성을 노동자로서 착취하는 것의 중요성은 심지어 경제 불황기에도 감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본주의 국가가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양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출산휴가와 부모휴가 등 양육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더 많은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여성의 대량 노동시장 진출이 미래의 노동력 재생산 위기를 부르지(18~19세기 초반 영국 산업화 때 심각하게 나타났듯이)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확대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 지원이 늘어난다 해도,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기(1940~60년대)에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가사와 육아에 대한 투자가 선진국들에서 상당히 늘어났지만 그때조차 투자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장기적이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노동력의 안정적 수급 필요성과 노동계급의 압력이 작용해 만들어진 복지제도)도 지배자들의 심각한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가족은 오늘날에도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는 주요 제도로 남아 있고, 경제 위기와 불황을 제거할 수 없는 자본주의 하에서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의 여성차별은 그 양상이 바뀔지언정 결코 사라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생산과 사사화된 재생산 사이의 모순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착취적 생산관계에 바탕을 둔 이윤 추구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해서 가사노동이 여성을 얼마나 짓누르는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페데리치의 주장처럼 자신들이 1970년대에 처음으로 ‘숨겨진 여성 노동’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콜론타이, 체트킨,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여성의 과중한 가사부담이 여성의 동등한 사회 활동 참가를 가로막는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볼셰비키는 공공식당·공공세탁소·어린이집 등을 지어 가사와 양육을 사회화하고자 애썼다.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잉여가치 생산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무급 가사노동은 현재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기르는 구실을 하므로, 잉여가치 창출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가사노동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기껏해야 간접적인 것이고, 모순도 있다. 과중한 가사노동은 종종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제한해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줄이기도 한다. 여성이 전업주부로 남아 있거나 양육 책임 때문에 장시간 근무를 기피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
가족관계를 생산관계처럼 설명하는 것은 자본주의 가족제도의 모순을 가리기도 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유지되는 이유가 단지 지배계급의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고 헌신하는 이유가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모순된 제도이다. 가족에서 사람들은 불평등과 천대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서로 기대고 위안을 찾기도 한다. 가족의 이상과 현실은 상당히 다르지만, 생산과 사회 전반을 통제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은 비혁명적 시기에 대개 가족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려고 한다.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모두 가사노동을 임금노동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보겔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는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보겔은 가사노동에는 사용가치가 있지만 교환가치는 없으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아니고 따라서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이론적 가정(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자로서 착취받는다)에 반대했고, 그 운동이 가사가 여성의 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적이었다.
보겔은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모순된 구실을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하지만, 여성의 가사노동 참여 시간이 길면 그만큼 사회적 노동 참여 기회가 줄어들어 잉여가치 창출을 저해한다고 설명한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이 발전하면서 가사노동이 상품화돼 가사노동 시간이 감소하고,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가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국가 개입이 발전한 것을 지적한다. 보겔은 자본 축적 논리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모순이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보겔도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과장하는 약점이 있다.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지만 잉여가치 전유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고 보며,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서 임금노동과 유사한 수준으로 필수적이라고 본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노동력 재생산 과정 전체를 이론화하고자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개념에 혼란을 초래할 뿐, 별로 유용하지 않다. 보겔은 필요노동을 사회적 성분과 가내적 성분으로 나누고,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가내적 성분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한 이유는 노동력 재생산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 결합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시간을 두 부분으로 구별한 개념이다. 즉, 노동자의 하루 노동일 중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한 시간(필요노동)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시간(잉여노동)을 구별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 비교되는 추상적 노동을 뜻한다.
따라서 무급 가사노동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의 필요노동이 될 수 없다. 2013년 개정판에서 보겔은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일부로 이론화한 것이 설득력이 부족함을 인정했다.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한 요소(가내적 요소)로 이론화할 경우 상이한 사회적 관계에 놓인 노동을 한데 묶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차이가 흐려지게 될 수 있다. 그러면 자본 축적에서 임금노동 착취가 핵심이라는 점이 흐려진다.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 단위(가족)는 상호작용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는 생산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가족이 아니라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하고, 가족은 생산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비록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족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가족의 규모와 형태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이 바뀌면서 크게 변화해 왔고, 특히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대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보겔은 가족이 축적 논리에 종속돼 계속 변화한다고 보지만,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구실을 대부분 재생산에 초점을 둬 설명한다. 선진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증대해 온 경향을 언급했지만, 오늘날 여성의 다수가 임금노동에 참가하고 생애주기에서도 갈수록 긴 시간 일한다는 사실, 즉 여성이 자본주의 생산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모순에 집중한다. 보겔도 가사노동 논쟁의 약점(무급 가사노동에만 초점을 둬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경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여성해방의 전략
가족과 자본 축적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착취와 여성 차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이것은 여성해방의 전략에 큰 함의가 있다. 페데리치처럼 가정주부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보면 가정주부가 자본주의 변혁의 핵심 주체가 된다. 페데리치는 몇 년 전 국역 출판된 저서의 서문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과장되게 서술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부불재생산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했다는 점에서, 또한 이 부불노동의 근원을 소진시키기 위한 성공적인 캠페인은 자본축적 과정에 파열구를 내고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지형 위에서 자본과 국가에 맞선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는 점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은 우리에게 혁명적이었다.”[3]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사사화되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은 여성들이 특정 시기에 차별 반대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재생산 사사화에 따른 부담과 차별에 자극받아, 가정주부들이 자본가나 국가에 맞서 집단적인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지는 못한다. 부유한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보모나 가정부로 고용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또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재생산 부담을 사회가 책임지는 조처에 흔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노동력 재생산이 개별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방식은 가정주부의 고립을 낳아 무기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는 착취가 노동자들을 한데 결집시켜 집단으로 고용주에 맞설 잠재력을 부여하는 것과 대조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의 이론적 가정 하나는 여성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대부분 가정 밖에서 이뤄지므로, 가정은 여성들이 가장 강력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약한 곳이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거부한다고 자본가들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고, 고립된 가정에만 머무는 여성은 무기력감을 느끼기 쉽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은 당시 여성운동에서도 호응이 적었다. 그 운동의 가정이 비현실적이었고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주로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맡아 온 고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착취 개념을 단순히 도덕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사용했기에 착취의 이중성을 이해했다. 즉 착취는 단지 비참함만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고통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착취를 단지 고통으로만 여긴다. 그는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해방이 아니다”라며 동등한 노동 참여를 요구하는 여성운동을 비판했다.
한편, 보겔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의 약점을 인식했지만, 효과적인 여성해방의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엥겔스를 이중체계론의 원조로 오해해 엥겔스를 크게 깎아내린다)[4] 계급투쟁이 여성해방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겔이 옛 소련과 동유럽 같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본다는 점과 관련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를 무계급 사회로 가정하니 이들 사회에서 여성 차별은 착취와 무관한 게 된다. 착취와 차별을 분리하는 이중체계론의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처한 이중적 상황을 가사노동과 평등 침해로 보고, 여성이 계급을 뛰어넘어 단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노동계급 여성만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에 종사하지만, 민주적 권리 문제에서는 모든 여성이 차별을 겪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와 차별의 구실을 대등하게 여기며 계급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 사이에 계급적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착취가 여성해방 투쟁에서 어떤 잠재력을 제공하는지 간과한다. 보겔은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을 노동자로서만 강조해서 임금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계급의 아내와 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체트킨뿐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 룩셈부르크,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여성 해방론을 계급 환원론으로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들이 여성 차별을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착취로 환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5]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첫째, 자본주의에서 근본적 분단선은 성이 아니라 계급이고, 둘째,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단지 자본주의 체제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핵심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 내 법적 평등은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창출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광범한 여성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든 계급의 여성이 불평등과 천대를 겪는다고 해서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단일하지는 않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보면, 특정 쟁점(선거권, 낙태권)에서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단결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투쟁에서도 계급적 차이 때문에 번번이 분열했다.
여성들이 차별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지배계급 여성은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조차 노동계급 여성들과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니지는 않는다.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이 노동계급 여성들의 적은 아니고, 중간계급 여성들이 제기하는 요구들은 흔히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요구다. 동일임금, 공공보육시설 확충, 낙태권 등 중간계급 여성들과 노동계급 여성들 모두가 공감하는 요구들이 있고 이런 쟁점에서 이들이 함께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간계급 여성들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노동계급과 같지 않고, 이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흔히 노동계급과 충돌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간계급 여성들이 단일한 집단은 아니다. 하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도 차별을 겪지만 그들은 체제 내에서 특권을 누리기도 하므로 (예외적 개인들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하기보다 체제 내에서 평등을 얻기 바란다.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 조류들은 여성이 기업과 국가기구 요직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고, 이 과정에서 종종 지배계급 일부와 동맹한다.
따라서 특정 쟁점을 놓고 노동계급 여성들이 중간계급 여성들과 단결하는 것은 때로 필요해도(이때 노동계급 여성들이 독자적 계급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적 좌파가 초계급적 여성 동맹 전략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런 전략은 실천에서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여성운동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전략적 차이를 흐릴 수 있다. 여성운동 내에 친자본주의적 계급협력 사상이 커다란 영향력이 있기에 전략적 차이를 흐리는 것은 위험하다. 보겔이 있는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주류 세력은 민주당 같은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연계해 왔다. 이 때문에 주류 페미니즘은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활동했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낙태권 제한을 포함해 많은 후퇴를 수용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도 주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 내 평등을 추구하면서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연계해 왔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몇몇 개혁 입법 성취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정부의 반노동계급적 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등 매우 모순된 구실을 했다.
둘째,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이 더 광범한 노동계급 투쟁과 연결될 필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물론 여성들은 차별에 맞서 스스로 싸워야 하지만,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효과적인 투쟁이 되기 어렵다. 나아가 여성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전복하는 것은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아예 불가능하다.
여성 해방과 계급투쟁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들의 차별 반대 운동뿐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중요하다. 여성차별을 구조화하고 지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낼 잠재력이 있는 사회세력은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가해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대규모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사회 세력이다. 노동계급 투쟁은 자본주의에서 계급세력 균형을 바꾸고 대중의 자신감을 높이는 결정적 방법이다.
노동계급이 자신감 높을 때는 자신의 힘을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 맞서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노동계급 투쟁 고양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도 반대해 대규모 투쟁을 벌이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노동계급 아닌 여성들의 투쟁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개념은 노동계급 투쟁만이 중요하다며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노동자주의와 전혀 다르다. 레닌은 모든 차별받고 천대받는 집단이 스스로 투쟁하고 조직할 권리를 옹호했고, 혁명가들의 임무는 “인민의 호민관”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전략은 여성의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중요하다. 1975년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부와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 낙태권이 단지 여성만의 쟁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문제라며 낙태권 투쟁에 노동조합이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업장과 노동조합 지부들에서 노조원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이런 노동자 조직화 덕분에 영국 노총(TUC)은 최대 7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거리 동원을 이끌었고, 이렇게 노동조합 운동에 기반을 둔 낙태권 투쟁은 합법 낙태를 제한하려던 우파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반면, 노동운동이 훨씬 약했던 미국에서 낙태권 투쟁은 의회 로비에 치중했고, 이 때문에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합법 낙태의 범위는 엄청나게 축소됐다.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성패는 그 투쟁이 노동계급 운동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차별에 맞선 투쟁이 성공하느냐는 노동계급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9세기 중후반~제1차세계대전 전에 일어난 대규모 여성 선거권 투쟁은 단지 페미니스트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노조와 사회주의 단체 등에 속한 노동계급 활동가들의 구실이 매우 컸다.
러시아에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볼셰비키가 이끈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한 뒤 에 이뤄졌다.(당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나라는 몇 안 됐고, 프랑스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야 여성 투표권이 온전하게 보장됐다.) 러시아 혁명은 이혼 간소화, 동일임금 법제화 등 많은 개혁 입법을 이뤄냈고,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하고 동성애 합법화도 이뤄냈다.
이런 성과는 러시아 혁명이 쇠락하면서 후퇴했고 마침내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노동계급 전체가 패배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탈린 치하에서 착취가 엄청나게 강화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죄다 사라졌고, 낙태가 불법화됐고 어머니로서 여성상 강조 등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화됐다.
따라서 차별과 천대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승리하려면 노동계급 투쟁과 연대해야 하며, 나아가 사사화된 재생산 부담을 전면 사회화하고 인간의 필요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거되고 노동자들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은 본질적으로 여성해방과 별개 투쟁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대다수는 노동계급의 일원이고 여성 노동자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여성이 노동계급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부라는 점을 종종 간과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전 세계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도 40퍼센트이고, 성인 여성의 적어도 55퍼센트가 임금노동에 종사한다(세계은행 조사).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8백40만 명가량 돼, 전체 임금노동자 수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고된 노동과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시달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설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부터 21세기 아랍 혁명까지 노동계급 투쟁과 사회 변혁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벌어진 긴축 반대 투쟁에서도 공공부문 노동자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참가가 중요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스스로 조직하고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물론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늘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노동계급 투쟁은 여러 약점을 안고 있고,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종종 분열시켜 노동자 운동을 약화시키곤 한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 수와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동운동에서 차별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해방되려면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선 단결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착취에서도 해방될 수 없다. 노동계급 의식은 불균등하기에 노동계급 투쟁은 고용주나 정부 관료에 대한 도전뿐 아니라 흔히 노동계급 내부의 사상 투쟁을 수반한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의식을 발전시키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건 개선뿐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투쟁을 벌일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실제 투쟁에서 배우면서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주
[1]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을 초역사적인 ‘가부장제’로 설명하며 대체로 유물론적인 설명을 거부했다. 유물론의 형태를 취할 때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나타났다.
[2] 페데리치(2011),《혁명의 영점》, 황성원 역, 갈무리.
[3] 페데리치, 앞의 책, 27쪽.
[4] 이중체계론자들이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했지만, 엥겔스 자신은 계급 사회에서 인간 종의 재생산은 생산에 종속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5]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책갈피)를 보라.
참고 문헌
실비아 페데리치(2011), 《혁명의 영점》, 황성원 역, 갈무리.
정진희 엮음(2015),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 책갈피.
크리스 하먼(2007), 《여성해방과 맑스주의》, 최일붕 역, 다함께.
Dalla Costa, Mariarosa(1971),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dallacosta2.htm
Ginsburgh, Nicola(2014), “Lise Vogel and the politics of women’s libera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44.
Orr, Judith(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Vogel, Lise(2013),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 Toward a Unitary Theory, Haymarket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