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통합 잠정 합의안 부결의 의미:
노동자들이 인력 감축·노동조건 후퇴 통합안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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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통합 노사정 잠정 합의안(이하 합의안)이 부결됐다. 합의 과정에 참여한 서울메트로·서울도시철도공사의 3개 노조 중 서울메트로의 두 노조에서 반대표가 더 많이 나왔다. 1노조인 민주노총 소속 서울지하철노조에서는 투표자 중 52퍼센트가 반대했고, 한국노총 소속 서울메트로노조에서도 투표자 중 53퍼센트가 반대했다.
이에 따라 찬반 투표 직후 열린 지하철 노사정협의회는 통합 관련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서울시도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등 일부 우파들은 이번 부결의 원인을 ‘철밥통 노조’ 탓으로 돌린다. 지하철 양 공사의 누적 적자가 12조 원이 넘는데도 노동자들이 “밥 그릇[을] 지키기” 위해 통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골격계 질환과 1인 승무로 인한 공황장애 등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일해 온 지하철 노동자들에겐 적자의 책임이 없다. 지하철 적자의 많은 부분은 무임수송(고령화로 인해 무임승차 비율이 전체의 30퍼센트를 넘어섰다) 때문이다. 물론 이런 무임수송을 줄여서는 안 된다. 공공서비스에 대한 지원을 외면해 온 중앙정부가 적자를 책임져야 한다. 또 노후 차량의 수리·교체 비용이 점점 늘어 적자 폭이 더욱 늘어나는 건 불가피하다. 이 모든 것들은 저렴하고 안전한 대중교통을 위해 필요한 착한 적자다.
노동자들이 합의안을 부결시킨 이유는 사측이 통합을 계기로 인력 감축과 노동조건 공격을 밀어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합의안의 주요 내용과 그에 대한 비판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 감축을 수용하라는 통합 합의안”(〈노동자 연대〉 169호) 기사를 참조)
특히, 통합공사 출범 후 5년 동안 정원을 1천29명이나 감축하겠다는 계획이 가장 큰 반발을 샀다. 지금도 지하철 노동자들은 현장 인력 부족에 따른 노동강도 강화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지하철노조의 한 활동가는 “4조2교대(시범실시)가 진행되면서 [야간 근무 감소로] 근무 주기는 좋아졌지만 인력 충원 없이 실시되다 보니, 노동강도가 강화됐다”며 “[이런 조건에서] 인력 감축 계획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우려가 컸다”고 지적했다.
노동조건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임금체계, 조직 설계, 직급 체계, 근무 형태 등)에 대한 합의 내용이 대부분 모호하고 추후 논의로 미뤄진 점도 노동자들의 불안감을 키웠다. 외주 업무 직영화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을 4년이나 미룬 것도 불만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1인 승무 폐지, 외주화된 지하철 정비와 스크린도어 관리 업무 직영화, 인력 충원 등의 요구는 안전 운행과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점에서 서울지하철노조와 도시철도노조(이하 양 노조) 집행부가 통합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3불(不) 기본 원칙”(인력 감축·노동조건 후퇴·구조조정 불가)에서 후퇴한 것은 잘못이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철도노조 집행부가 성명을 내 이 합의안을 지지한 것도 적절치 않다.
상향평준화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철도노조 집행부는 서울시의 지하철 통합 추진이 정부의 일방적 공공부문 정책 강요와 분할 민영화 같은 정책에 파열구를 낼 수 있다고 본 듯하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수서발 KTX 분리와 철도 분할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과 대비돼 보일 법하다.
지하철 노동자들도 경쟁 속에서 강요되는 하향평준화를 막고 더 크게 단결하자는 취지에서 통합을 대의로 생각해 왔다.
특히, 도시철도노조에서 합의안 찬성율이 71퍼센트로 높게 나온 것은, 도시철도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근무 조건에 놓여 있는 상황과 연관돼 있어 보인다. 도시철도공사는 1개역 당 관리인원과 1㎞ 당 운영인원이 서울메트로보다 약 30퍼센트 적다.
그러나 이번 통합 합의안의 부결에서 보듯, 인력 효율화와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한 통합은 민영화에 반대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염원하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충족할 수 없다. 정원 감축을 수반하는 통합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악화시킬 뿐이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의 인력 재편은 고통 완화는커녕 노동자 간 갈등과 분열만 키울 뿐이다. 상향평준화를 위한 진정한 동력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에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이번 합의안을 두고 “노사정 협의를 통한 합의의 방식, 이용 주체인 시민과 전문가 들이 고루 참여하여 지혜를 모은 민주적 협치의 좋은 사례로서 그 의미가 크다”며 지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물론 박근혜 정부와 대조적으로, 박원순 시장이 거버넌스(협치)를 강조하며 노조를 대화 파트너로 “존중”하는 방식이 나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번 합의안이 보여 주듯 거버넌스 자체가 내용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에 다양한 거버넌스 기구들이 설치됐지만 그 내용이 언제나 좋지도 않았다.
예컨대, 공공부문 ‘정상화’의 일환으로 추진된 퇴직금누진제 폐지와 임금피크제 도입이 ‘서울특별시 노사정 서울모델협의회’를 통해 추진됐다. ‘합의’ 방식 덕분에 손해가 일부 줄었다 해도 상당한 조건 후퇴임은 분명하다.
이번 합의안 부결에서 보듯 노동자들은 통합과 거버넌스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다고 봤고, 이것이 옳다.
교훈
지하철 통합 논의 과정을 거치며 지하철 노동자들 사이에 박원순 시장에 대한 실망이 꽤 커졌다. 통합 잠정 합의안이 나온 후 열린 서울지하철노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박원순 시장이 해고자 복직 등 노동조합에 일부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무비판적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옳다.
애초 서울시가 지하철 통합 목표를 인력 효율화와 비용 절감에 두는 상황에서 이 통합을 지지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양 노조 집행부는 박원순 시장 하에서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노조에 덜 불리하다고 본 듯하다. 또, 노동이사제 도입과 경영협의회 도입이 중앙정부가 밀어붙이는 양대 지침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고도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그간 지하철 노사정협의회가 보여 줬듯, 노조의 참여가 노동조건 개악 도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안전판은 아니다.
앞으로 박원순 시장의 모순은 더욱 커질 것이다. 경제 위기 심화와 정부의 재정 긴축으로 재정 압박은 더 커질 것이다. 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박원순 시장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현 체제를 더 효과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이번 합의안 부결 호소에 나섰던 좌파 활동가들은 박원순 시장에 의탁하지 말고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면서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강화해 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닥쳐 올 성과연봉제와 퇴출제 공격에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