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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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성평등지수는 145개 조사 대상국 중 115위로 나타났다. 한국 여성이 남성과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할 때 받는 임금은 남성의 55퍼센트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수의 여성들은 명백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노동계급 여성을 비롯한 대다수 여성의 처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차별에 맞선 투쟁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려면 여성차별로 누가 득을 보는지, 누가 차별에 도전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지를 양성분리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르게 이해한다.
후자는 여성차별에서 모든 남성들이 이득(또는 특권)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희진 씨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른 급진여성주의자는 남성이라면 차별에서 이득을 얻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문제의 일부이고 여성차별을 유지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남성들이 “공기처럼 누려왔던 특권”에 대해 말한다. 최근 한 좌파 기관지도 남성들에게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지” “성찰”하고 “책임의식”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이런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여성운동 내 다수가 받아들여 온 가부장제론의 핵심 아이디어다.
많은 사람들이 가부장제 개념을 인정하는 것은 여성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표현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협력하고자 한다.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본다는 생각은 여성차별이 삶의 곳곳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음을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차별의 현상을 묘사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여성차별이 어디서 비롯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런 생각은 여성차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구조화되고, 여성차별에서 득을 보는 것은 지배계급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 큰 약점이다.
겉보기로, ‘남성 이득’ 주장은 이치에 맞는 듯이 보인다. 가사와 육아를 대부분 여성이 책임진다. 여성에게 성폭력·성희롱을 가하는 자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남성들이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노동계급 소속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더 천대받는 처지에 있다는 말이 곧 모든 남성이 그런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가 해 주위를 도는 것을 경험으로 인지하기가 어렵듯이,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을 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만약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같다면 과학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차별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
마르크스는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아일랜드계 인종차별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다. 그것은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자본가가 대다수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다수인 노동계급을 성공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을 부추긴다. 노동계급의 분열은 지배계급에게 이득이고 이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반대로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노동계급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차별을 유지하는 데에 노동계급이 이해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여성혐오가 인류 역사의 기반”이라는 정희진 씨의 말과 달리, 여성차별은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차별은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계급이 생겨나면서 함께 등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주된 구실은 노동력 재생산이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는 집안에서의 여성의 무보수 노동에 의존한다. 게다가 노동계급이 가족 단위로 원자화되는 것은 사사화(私事化)와 개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하는 이러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이 여성 차별이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이유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개별 가정에 떠넘김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절감한다. ‘무상보육’을 둘러싼 박근혜 정부의 몽니를 보면, 지배자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육아 후 노동시장 진입 시 불리한 조건에서 일을 시작한다(가령 시간제 일자리나 초단시간 일자리 등). 여기에 여성이 주부양자가 아니라는 이데올로기가 더해져 여성들은 열악한 조건도 감수하도록 강요받는다.
반대로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자로 여겨지는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가족 유지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이 직장에서 잘리면 그의 가족 전체가 나락에 빠질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데도 가족제도가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동거 방식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일자리와 임금, 승진 등에서 여성 노동자는 심각한 차별을 당한다. 여성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남녀 자본가에게는 확실한 이득을 안겨 준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지는 의심스럽다.
만약 여성의 저임금으로 남성노동자가 이득을 본다면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떨어질 때 남성노동자 임금이 올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98년~2008년 동안 한국의 여성과 남성 임금은 동반 등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임금에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이와 관련한 더 자세한 논의는 〈노동자 연대〉 157호에 최미진이 쓴 ‘15년째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 왜 이다지도 불평등한가?’를 보시오.)
하향화 압력
또, 독일에서 미니잡 등 주로 여성들이 종사한 저임금층의 확산은 전체 노동계급의 임금과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구실을 했다. 이는 한 부문의 저임금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노동조건 하향화 압력으로 작용함을 보여 준다. 자본가라면, 실제로 그럴 계획이 있든 없든,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싹 바꿔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임금 인상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지 않겠는가?
여성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거나 임금 삭감을 당하면, 그와 함께 사는 남성 노동자는 생계유지에 더 압박을 받고 가족 부양을 위해 더 긴 시간 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 개인이나 일부 집단이 일시적으로 얼마간 이득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혜택조차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계급 전체로는 분열의 대가를 치러 노동자 전체에 해롭게 작용한다.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경쟁과 지배계급의 이간질 때문에 부분과 전체는 상충될 수 있다. 가령 공공부문의 공동 투쟁에서 어느 한 부문이 성과급을 받고 투쟁을 배신했다고 하자. 이는 당장에 해당 부문에게는 이득일 수 있겠지만, 공공부문 전체로 보면 투쟁을 약화시키는 해로운 일이다. 이는 향후 해당 부문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도 불리한 조건이 된다.
가사와 육아의 불평등을 보면, 여기서는 틀림없이 모든 남성이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하루 가사노동에 4배가량의 시간을 더 쓴다(208분 : 47분). 남성의 가사·육아 시간은 매우 더디게 늘고 있다. 물론 부부가 모두 전일제로 일하는 경우, 가사와 육아는 더 동등하게 분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불평등 때문에 남성 노동자가 약간의 이득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개인들이 하는 구실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과 연결지어서 보면, 진정한 수혜자가 누구인지가 비로소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하는 주된 구실이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노동계급 가정 내에서 여성이 하는 무보수 노동은 개별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다.
가사노동의 불평등에는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남성들의 차별적 관념(상당수 여성도 이런 편견을 공유한다)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연인이나 아내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대단히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흔히 남성 노동자들은 부양자로서의 책임 때문에 여성 노동자보다 더 장시간 일하고 더 멀리 직장을 다닌다. 분명, 집안에서 ‘왕따’가 되길 원치 않을 많은 아버지들은 자기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 것이다.
가정 내에 불평등이 없다거나, 남성과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평등하게 분담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본주의 체제가 두 성 모두에 미치는 영향(흔히 파괴적인)을 놓치기 쉽다. 또한 가정 내 불평등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을 놓치기 마련이다. 바로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 말이다.
여성차별은 계급사회와 함께 등장했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착취와 자본축적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 따라서 남성 노동자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더 나은 처지에 있고 어떤 이점을 누리든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차별을 반대하는 게 자신의 계급이익에 부합한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여기든 여기지 않든 객관적 실재(현실)가 노동자 여부를 규정하듯, 개별 남성 노동자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렇다.
계급적 차이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득을 보고 차별의 지속에 단일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런 남성 동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일부 여성주의자들도, 남성들을 동질적 집단으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성 역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일부 남성들(자본가와 국가관료 등 지배계급 남성들)은 분명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 남성은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 소수의 지배계급 여성들은 노동계급 남성들보다 비할 데 없이 큰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매일같이 위험을 감수하며 일해야만 하는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박근혜나 나경원, 최연혜, 김을동 같은 여성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노동계급 내 남성과 여성의 (성별)격차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계급)격차에 비하면 훨씬 적다. 오히려 노동계급 남녀는 대부분의 시기에 자신의 삶이든 사회 전체든 스스로 통제하기보다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통제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계급적으로 높은 배경과 위치에 있는 여성이라고 해서 성차별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계급 남성의 일부가 여성에게 폭행이나 폭력을 가하거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이 여성 차별적 편견을 받아들이고 일부가 억압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은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구조화돼 개인 관계에까지 스며들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지,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차별을 유지하는 것이 득이 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성차별적 편견은 상당수 여성들도 받아들인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남성 권력”을 입증하려는 듯 모든 남성이 강간, 살해와 같은 흉악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양 말하지만, 이는 큰 과장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마치 어떤 노동자가 새누리당을 지지하거나, 자신이 속한 노조의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객관적으로는 이런 행위들이 그의 계급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차별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관념들의 집합을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허위의식은 변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아무리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이런 후진적 의식이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거나 정치적 경험을 하면 바뀔 수 있고 무엇보다 집단적 투쟁 경험 속에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남성 권력’이 문제라고 보는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차이점의 하나다.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느냐는 문제는 여성차별이 존재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차별이 무엇에서 비롯했고, 왜 유지되며, 누구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이냐는 전략문제다. 이런 점에서 계급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권력과 특권: 여성차별의 근원에 대한 오해
여성차별에서 남성이 이득을 얻고 그 때문에 성차별이 유지된다는 견해는 차별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차별이 개인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증상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며 개인간 관계 또는 한 부문과 다른 한 부문의 관계만 보게 만든다. 그러나 차별을 완전히 없애고자 한다면 이런 파편적·경험주의적 인식 방법을 넘어서야 한다.
최근 여성주의 일각에서 유행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이런 인식 방법을 더욱 부추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사회는 단지 주체간(개인) 관계들의 총합이다. 차별은 착취 체제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는 푸코의 말로 대표되는 이런 관점은 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파편화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에 맞서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간단히 기각되기 쉽다. 파편화된 저항을 고무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근원적 여성주의의 구호와 쉽게 어울린다.
물론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자들도 성차별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구조”는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구조와 물질적 조건과는 관련이 없다. 그들에게 “구조”는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위계적 관계들’과 여기서 비롯한 차별 이데올로기(이른바 ‘여성혐오’)를 의미한다. 이런 “구조”는 “가부장제”나 “성별(젠더)권력 관계”, “비대칭적 위계 관계”, “성차별적 젠더 질서”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런 “구조”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묻지 않기에 그들은 흔히 현실의 불평등을 묘사하는 데 그친다. 설명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한편, 구조적 성별 권력 관계가 일상을 지배한다는 주장은 인간이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과 연결된다. 인간은 구조에 근거한 역할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사회 전체를 이해하고 나아가 변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사회를 개인들의 총합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적) 관점과 결합하면, 개인들의 행위는 흔히 ‘구조’로 환원되고, 또 개인들의 저항 행위는 ‘구조’에 저항하는 행위가 된다. 개인적 경험 말하기와 담론(일종의 성토 커뮤니티)이 넘쳐나는 이유다.
물론 차별적 경험 말하기는 차별 반대를 위한 좋은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차별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이해하고 과제를 설정하는 과정 속에 자리매김할 때 효과적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해방의 전략: 누구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모든 남성들이 누리는 ‘특권’이 본질적 문제라면, 그것의 논리적 결론은 남성들이 특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임금과 일자리 지키기를 단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 득이 될까?
여성 차별이 착취 관계와는 관계없이 남성 특권에 의해 작동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시선을 계급 사회라는 진정한 적으로부터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든다. 계급투쟁은 여성해방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오히려 여성해방이 남성 야단치기에 달려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 진정으로 여성 천대를 끝내기 위한 실천에서는 계급투쟁에 반대하거나 거리를 두게 된다.
“국가와 자본가 권력”과 “남성 권력” 모두 문제라는 주장도 상충하는 견해를 절충함으로써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라는 중요한 문제를 흐려 버리는 효과를 낸다.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은 1990년대 초에 사회 전체의 변혁을 통한 여성해방이라는 전망을 잃어버렸고 그중 다수는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여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성평등을 이룬다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물론 여성운동의 노력으로 여러 차별적 법과 제도가 개선됐고 이것은 사회 전체에 성평등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종종 무력화되기도 했다. 여성차별의 물질적 조건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1997년 경제 공황 뒤에는 다수 여성들의 삶이 더욱 악화됐다. 여성운동은 이에 맞서려 했지만, 주류 여성주의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지했기에 효과적인 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 사이의 괴리가 커졌고, 그런 괴리는 특히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에서 현격했다. “주류화된 페미니즘이 실제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회진보연대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평가이다.
차별적 말과 태도, 행동에 도전하는 일도 정당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 이제 막 급진화된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법·제도 개선을 지지하면서도 일상에서의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거대한 체계적 차별에 맞서는 투쟁이 주로 개인들의 언행이나 태도, 자기 성찰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흔히 생각이 크게 바뀌어야만 착취와 차별에 맞선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흔하다.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든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이든 차별 반대 투쟁이든,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간의 생각 변화와 여전히 크게 모순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한다. 새로운 통찰을 얻고 낡은 관념과 편견이 깨지는 것은 바로 이런 투쟁 속에서다. 변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고무돼 온 견해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착취 문제나 경제적 쟁점에만 관심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차별에 맞서는 일이 노동계급 남녀 모두의 과제가 돼야 하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을 동원해 싸워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일은 자동적인 게 아니다. 노동계급 다수는 지배계급이 퍼뜨리는 분열과 거짓말에 노출돼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 싸울 뿐 아니라 계급 내부를 향해서도 정치적 논쟁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편의 일부도 근본적으로 차별 유지로 득을 본다는 이론과 사상이 더 많은 사람들을 차별 반대 투쟁에 참여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오히려 이런 이론과 사상은 차별 반대에 동맹세력이 될 수 있는 노동계급 남성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어, 성차별 반대를 여성들만의 과제로 만드는 효과를 내기 쉽다.
또한 남성을 여성혐오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것이 대중 운동 건설에 효과적일까? 성별 “정체성”에 따라 말할 자격을 주는 것은 차별 반대 운동의 전략·전술 토론을 차단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는 않은가? 차별에 맞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운동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물음들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는 여성차별이란 너무나 뿌리 깊어서 “그 무거운 흙덩이를 갈아엎으려면 아주 무거운 쟁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혁을 성취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여성차별을 끝장내려면 여성차별에서 이익을 얻는 계급사회를 폐지해야 한다. 더구나 경제 위기 하에서는 개혁을 성취하기가 쉽지만은 않고, 성취해도 도로 빼앗기기가 쉽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힘을 가진 남녀 노동계급을 단결이 아니라 분열로 이끌 위험이 있는 사상이 아니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필요한 이유다.
추천 논문
정진희,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최근 쟁점들’, 《진보평론》 65호
정진희, ‘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노동자 연대〉 169호
크리스 하먼, 《여성 해방과 맑스주의》, 최일붕 옮김, 다함께
섀런 스미스, 《정체성 정치는 해방의 수단인가?》, 최일붕 옮김, 다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