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주택용 전기요금은 친기업 정책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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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씨는 한풀 꺾였지만 9월에 나올 전기요금 청구서를 생각하면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겨울에도 난방 때문에 전기 사용이 크게 줄지 않는 상황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오랫동안 정부는 ‘1인당 전기 사용량이 다른 나라보다 유독 많다’며 주택용 전기요금을 인하할 수 없다고 버텨왔다. 평범한 사람들이 에너지 부족과 환경파괴의 주범인 양 호도하며 고통을 떠넘겨 온 것이다. 〈노동자 연대〉는 오래 전부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진정한 문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업 이윤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여기는 체제의 작동 방식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OECD 절반
단적으로, 지난해 산업용(공공·영업·농어업용은 제외한 공업·광업용을 가리킴) 전력은 전체 전력 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반면(57퍼센트), 주택용 전기는 14퍼센트밖에 안 됐다. 또, 한국의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은 OECD 평균의 절반밖에 안 된다.
사실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주택용 전기에 비싼 값을 매기며 산업용 전기요금을 보조해 왔다.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된 자료를 보면, 산업용 전기를 사용한 기업들은 2004년 한 해에만 전기요금을 사실상 원가보다 5천억여 원이나 덜 낸 반면, 같은 해 주택용 전기요금은 원가보다 6천억 원이나 더 내 사실상 기업들의 전기요금을 “보조”했다.
주택용 전기는 누진제 때문에 많이 사용할수록 요금이 대폭 상승하는데 반해, 산업용 전기는 계약 전력량이 클수록 되레 싸진다. 그래서 산업용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상위 12퍼센트 기업은 나머지 기업들보다 전기요금 단가가 싸다.
그러므로 유독 가정용 전기에만 적용되는 누진제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정당한 면이 있다.
그런데 진보·좌파 진영 일각에는 누진제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누진제 폐지가 저소비·저소득층의 전기요금을 올리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거나, 정부가 화력발전소를 더 지을 구실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누진제 폐지와 저소비·저소득 가정의 전기요금 인상은 직접적 연관이 없다. 가정용 전기 생산에 드는 비용을 오로지 주택용 요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힐 까닭은 없다. 오히려 오늘날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생활필수재인 만큼,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온 국민이 부담 없이 사용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누진제 폐지가 전기 사용량을 크게 늘려 더 많은 화력발전소 건설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도 비약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전기 사용량 급증의 주범은 기업들이다. 화력발전소 증가는 풍력과 태양력 같은 재생가능에너지를 등한시하고 기업주들의 에너지 비용을 줄여주는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기요금 문제는 계급 문제
전기요금 문제는 계급 문제다. 물론 자본가들도 집에서 전기를 쓰지만, 그 요금은 자본가들에게 거의 부담이 되지 않는다. 또한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경영하는 공장과 사무실 등에서 막대한 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사장 이재용이 주택용 전기요금을 매달 2천5백만 원이나 납부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대체 집에서 뭘 하길래?), 더 놀라운 일은 그가 경영하는 삼성전자가 지난 3년간 할인받은 금액(4천2백91억 원)이 그것의 5백 배에 달한다는 것이다.(박주민 의원실)
반면에 실제로 생산을 담당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은 공장과 사무실의 전력 사용량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값싼 산업용 전기요금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면서, 집에서는 비싼 전기요금을 부담하거나 살인적인 더위를 견뎌야 한다.
생태 위기는 대중의 전기 사용 탓인가?
일부 생태론자들의 누진제 폐지 반대 의견의 배경에는 생태 위기에 대한 진지한 우려가 있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 생태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일 것이다. 그들의 걱정에는 타당한 면도 있지만 문제도 있다.
우선 누진제 같은 전기 소비 억제책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들이 전기를 흥청망청 쓸 것이라는 가정이다. 물론 전기 사용이 어느 정도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수돗물의 경우, 한국의 수도 요금은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서울의 1인당 물 사용량은 세계 주요 도시들 가운데 낮은 편에 속하고, 지난 10여 년간 감소했다.
지난 20년간 가정의 전기 사용량이 꾸준히 증가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태도가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갈수록 전기에 대한 의존도가 불가피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전열기가 연탄을 대체한 것은 한 사례다.
기후변화
에어컨, 김치냉장고, TV 셋톱박스처럼 변화하는 자연·사회 환경 속에서 새롭게 필수품이 된 가전제품의 사용이 증가한 면도 있다. 기후변화가 야기할 변덕스러운 환경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가정의 전기 사용량은 당분간 늘 가능성이 크다.
일부 생태론자들은 정부의 기술주의적 ‘해결책’에 반대한다. 정부가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은폐하고 기술 개발의 효과를 과장하며, 이젠 석탄 발전소가 청정 에너지원이 됐다거나 핵발전으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은 분명 타당하다.
환경 친화적 냉·난방 기술 개발은 뒷전에 미뤄둔 채, 개별 가전제품 판매에 매달리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기술주의적 해결책에 반대한다며 평범한 사람들에게 절약을 (요금이라는 강제력을 사용해서라도) 요구하는 것은 공상적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 대안은 생산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기술주의적 해결책의 진정한 문제는 기술을 강조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생태 위기의 핵심인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무계획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공급 과잉인 철강이나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엄청난 전력을 쓰는 반면, 폭염 때문에 사망자가 속출해도 일반 가정의 냉방용 전기 사용을 억제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우선순위다. 저소득층일수록 단열이 형편없는 집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제품을 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또 다른 문제는 역사적으로 화석연료 기업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생가능에너지 기술에 대한 투자는 그 잠재력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재생가능에너지 기술만으로도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전기를 너끈히 생산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관계에 도전하는 것을 핵심으로 보며, 기술주의적 관점에 반대하면서도 기술 발전을 거부하지 않고, 생태 위기 해결에 유용한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을 구분한다.
민주적 계획에 따라 재생가능에너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단열 주택과 고효율 냉·난방기기를 보급하고, 무계획적 산업 생산을 통제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