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 사건 대법원 판결:
사회 구조적 원인을 보고 걸맞은 해결책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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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 사건 범인에게 징역 30년형이 확정됐다. 지난해 5월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흉기로 찔러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김모 씨의 원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이다.
지난해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망상으로부터 영향받은 피해의식” 때문에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라고 규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김 씨가 오랫동안 조현병에 시달려 왔고 범행 당시에도 심신 미약 상태였음을 고려했다고 밝혔다.(1심 판결의 자세한 내용은 본지 183호 ‘강남역 살인 사건 판결에 부쳐 ― 비극의 근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를 보시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도 이 판단은 유지됐다.
소외
강남역 살인 사건은 병든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김 씨는 애먼 한 여성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김 씨는 자신이 한 행동으로 타인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거나 미안해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듯하다. 김 씨가 최후 변론에서도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아 유가족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김 씨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은 그가 사이코패스여서라기보다, 자신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여겨서인 듯하다. 그는 여성들이 자신을 해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김 씨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았고, 그 때문에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면서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르바이트도 번번이 잘리는 불안한 생활을 반복했다. 그가 처한 조건들은 피해망상과 결합돼 그의 내면에 분노를 키웠던 듯하다.
주류 언론과 정부는 이 사건이 ‘한 정신질환자의 흉악 범죄’임을 부각하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다. 물론 이 사건의 경우 한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들이 모두 잠재적 범죄자라는 식의 편견 조장은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이런 편견을 비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이 일반인보다 폭력범죄율은 낮지만 폭력적일 가능성은 높다”면서도 이렇게 지적한다. “정신분열증의 환각, 망상 등의 증상 자체가 직접적으로 폭력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기보다는, 여러 증상의 상호 작용이나 상황적 요인에 의한 스트레스가 그들의 폭력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수정·김경옥, 《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중앙엠앤비, 2016).
따라서 신체질환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정하고, 정부가 치료와 관리를 위한 의료 복지 제도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정신질환자 낙인찍기는 쉬쉬하게 하거나 가정 내에 방치되도록 만들어, 치료·관리를 어렵게 하고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지배자들은 흉악 범죄 위험과 공포를 부각해 공권력 강화의 명분과 가정 가치관 옹호에만 관심 있을 뿐,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의 내면에 좌절과 분노를 키운다는 사실에 침묵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실업과 빈곤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 내면에 분노와 좌절감을 키우고, 자존감을 떨어뜨려 피해망상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강남역 사건과 같은 범죄가 개인적 요인들이 직접적으로 촉발했지만 그 근원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통제력 상실)가 있다고 본다. 물론 차별과 천대 받는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끝없이 절망을 안기는 체제와 빈곤, 가난이라는 요인을 보지 않으면, 순전히 범죄자 개인의 문제로 여기거나 엉뚱한 문제(유전자, 성별, 인종 등)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지배자들의 이간질에 말려들게 된다.
애먼 사람이 더는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비극의 사회적 근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여성혐오’
이 점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사회가 낳은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하는 견해는 이런 범죄를 이해하고 예방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망상으로부터 얻은 피해의식”에서 비롯한 이번 사건은 가해가 한 여성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대한 뚜렷한 차별 신념이 동기로 작용하는 증오범죄와는 구별된다. 또한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해서 모두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 혐오와 연관시키는 견해는 남성들의 ‘여성혐오’가 여성 차별의 핵심 원인이라며 양성 분리적 결론으로 이끌리기 쉽다. 이는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 전혀 도움이 못 된다. ‘여성혐오’ 담론은 그것이 더는 차별적 대우를 참지 않겠다는 정당한 의지의 표현일지라도, 차별의 정확한 원인과 양상, 그리고 어떻게 차별을 없앨 수 있는지를 정확히 말해 주는 담론이 아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 차별의 연장일 뿐이라거나, 모든 남성이 (여성에 대해 차별적 의식을 가지는 정도를 넘어) 여성을 ‘혐오’한다는 주장은 현실을 정확히 보여 주지 못한다.
차별적 의식과 태도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유지시키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사회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여성 ’혐오’라는 남성의 심리에서 구조적·제도적 여성 차별이 비롯한 것으로 보는 사회심리학적 접근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남성들이 그런 정서나 태도, 사고방식, 반응 등을 가지게 된 사회적 원인을 파헤치지 못하는 피상적이고 관념론적인 인식 방법이다.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도전하면서 그런 투쟁과 조직 과정에서 개인들의 의식도 바뀌도록 조력해야 한다. 그런 투쟁과 조직은 남녀가 함께하는 계급투쟁이다.
여성 차별을 상당히 완화하고 궁극적으로 없애려면 차별의 현실에 즉자적으로 분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에 도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여성혐오’ 담론은 차별적 사회구조를 변경시키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 특히, 여성을 단지 피해자로만 부각하는 것은 잠재적 투사로서의 여성을 길러 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개혁주의 여성 지도자(특히 국회의원)를 추앙하는 수동적 지지자로 놔 둘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