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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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설(paradox)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올해 초 미국 국가정보위원회가 내놓은 미래 예측 보고서인 《글로벌 트렌드 2035》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해 온 결과 여러 모순과 도전에 직면하게 된 미국 지배자들의 착잡한 심정을 드러내는 듯하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역동적 성장 때문에 세계경제의 불균등한 경제력 분포가 계속 변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국가들 간의 힘의 균형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새로 떠오른 강대국들이 기존 강대국들의 이점을 상쇄하고 능가하려 들고, 기존 국제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바꾸려고 한다. 레닌이 말한 “세계 재분할의 압력”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까닭이다.
레닌의 분석은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동아시아는 그간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지역이다. 특히, 중국 경제가 가장 큰 이점과 혜택을 누려 무섭게 성장했다. 중국의 부상은 국제 질서에 상당한 변화를 낳았고, 이로 인해 미국 지배자들은 자국의 패권이 중장기적으로 위협받을 것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불안정이 악화했고 각국은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키워 왔다.
세계화의 역설
그럼에도 자본주의 변호론자들 중에는 여전히 세계화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강대국 간 전쟁이라는 파국은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좌파 중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중국·한국·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전쟁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의 효시는 1백여 년 전쯤 개혁주의를 주장하고 실천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카우츠키였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밀접한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전쟁을 치른 사례가 있는 데다가(대표적으로 1914년 당시 영국과 독일), 친밀한 경제적 관계가 오히려 불안정 악화의 요인이 된 사례도 있었다(1941년 미국과 일본).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한다.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경제들은 미국에 많은 공산품을 수출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커다란 경상수지 적자를 감수해야 했지만, 그 대신에 동아시아 경제들이 비축한 달러 중 일부를 빌어와 미국의 적자를 메웠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이런 순환 구조가 2000년대 세계경제를 이끌어 간 핵심 동력이었다. 일본·독일·한국 등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쪽으로 산업을 재편했고, 중국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원료 생산국들의 통 큰 고객이 됐다.[1]
그러나 한때 세계경제 성장을 이끈 이 상호의존 구조는 결코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고 (앞서 논의한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세력관계의 변화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의 지정학적 불안정을 악화하는 요인이 될 위험을 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모두 2008년 이후의 경제 위기에서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빠질 가능성마저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지난해 미국 경제의 특징을 이렇게 꼽았다. “제조업 산출 감소, 기업 활력 감소와 자본재 주문의 부진, 기업 이윤의 하락.”[2] 그래서 미국의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여전히 부진하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사이에 미국 경제가 회복하는 듯하지만 기업 투자가 여전히 바닥을 기는 등 근본적 문제는 여전하다. 트럼프 정부도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슬쩍 낮췄다(4퍼센트→3퍼센트).[3]
중국 경제도 점점 불안정의 진원지가 돼 가고 있다.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중국 정부가 은행들을 독려해 대대적으로 돈을 풀었던 것이 점차 큰 부담이 돼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장기화하는 경제 불황 속에서 각국은 서로 다른 형태의 문제에 대응해 상이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은 국가들 간의 협력적 경제 운용을 어렵게 만들고, 각국의 경쟁과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은 즉각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에서 자금이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트럼프는 수입 상품을 규제하겠다고 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들인 중국·멕시코 등에 징벌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누적된 무역적자(특히, 대중국 적자)를 더는 용인할 수 없고(그림1), 미국 패권을 위해 국제화한 생산 사슬을 미국으로 되돌려, 약화된 미국 제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독일 등 기존 동맹국들과의 갈등도 불사할 태세다.
트럼프의 정책 노선은 미국 경제라는 중환자가 앓는 병에 대한 나름의 처방전이다.(그러나 이것 때문에 미국 지배계급 내에서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 강화는 주요 서방 경제들과의 갈등을 키울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들 사이의 주요 지정학적 충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중국은 미국의 동맹 구조 바깥에서 성장했고, 가장 위협적인 지정학적 경쟁자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미래에 벌어질 수 있다.(중국과 미국 자본가 양 측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지만 말이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진다면 이는 지정학적 갈등에도 큰 악영향을 줄 것이다.
미국이 ‘보호무역’ 카드를 치켜들고 있는 와중에 아이러니이게도 중국의 시진핑은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개혁·개방의 결과로 중국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먹잇감이 됐다는 일부 좌파들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자, 시진핑은 바로 중국이 세계화의 수호자이고 아시아·태평양 국가들한테 TPP의 대안이 될 만한 다자 무역협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정부가 G7이나 G20 회담에서 ‘보호무역’을 역설하는 동안, 시진핑 정부는 일대일로 포럼을 대대적으로 열어 20개국 정상을 비롯해 1백개국 이상의 정부 인사들을 참석케 하는 데 성공했다.
‘일대일로’는 유라시아를 중국 중심의 인프라로 연결하겠다는 중국의 야심 찬 개발 프로젝트다(그림2). 이 계획은 중국 경제의 위기를 해소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요 경제지형을 중국에게 좀 더 유리하게 재편하겠다는 구상도 깔려 있다.
중국 경제의 지리적 확장과 시진핑의 역내 경제질서 재편 시도는 미국 패권에 위협이 된다. 단지 동아시아뿐 아니라 중동·유럽 등지에서 미국의 통제력 약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이처럼 주요 강대국들은 장기 경제 침체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상이한 대응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패권 국가 미국의 상대적 지위 하락과 맞물려 있을 뿐 아니라, 정세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제국주의 간 갈등과 경쟁을 악화하는 요인이 된다.
제국주의 간 경쟁 강화는 핵군비 경쟁을 포함한 군국주의 강화를 수반한다.(평화주의를 수용한 일부 좌파들은 핵군비 경쟁과 같은 군국주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군사적 측면임을 간과한다.) 중국 제국주의의 군비 증강은 이제 상수로 여겨질 만큼 지속돼 왔는데, 이는 중국 자본주의가 무역과 투자의 큰 손으로 변모해 온 것과 관련 있다.(해외에서의 자국 이익을 군사력으로 보호해야 한다.)
트럼프도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핵무기 현대화와 미사일방어체계(MD) 구축을 비롯한 대대적인 국방비 증액을 추진하고 있다(그림3). 이 주된 타깃이 중국인 것은 물론이다. 사드의 성주 배치는 중국을 겨냥한 군사력 전진 배치 계획의 일부로 자리매김됐다.
군비 증강은 단지 미국과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두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에 자극받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그림4).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은 세계적으로 군비 증강을 선도하는 지역이 됐다. 그런 와중에 문재인 정부가 “자주 국방”을 내세워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추진하려 한다. 한국 지배계급 자신이 동아시아 불안정에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제국주의 국가의 경쟁이 훗날 제국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쟁으로 기존 질서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고,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불확실성의 근저에는 자본주의의 심각한 ‘구조적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체제 내의 조율과 타협으로 현재의 제국주의 갈등 구조가 쉽사리 해소되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 ― 러시아와 일본
앞서 언급했듯이 동아시아에서 단지 미국과 중국만이 경쟁하는 게 아니다. 러시아·일본 같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 경쟁과 갈등 구조에 얽혀 있으며, 그다음으로 한국·북한·대만 같은 아류들도 있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도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은 비교적 다극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이 때문에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
러시아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신경이 거기에 가 있는 틈)이 제공한 기회를 잘 이용해 다시 부상한 제국주의 국가다. 러시아는 자원 수출로 경제가 회복된 것에 힘입어 그동안 동유럽과 중동에서 영향력을 제고해 왔다. 동유럽에서 서방과 갈등을 빚자, 러시아는 동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서방의 제재에 따른 피해를 동아시아에서 만회하고 새 지정학적 출로를 찾겠다는 의도다.
지난해 말 러시아 정부는 옛 소련 시절의 해외 군사기지들의 복원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 계획에는 베트남 캄란만도 포함돼 있었다. 이미 러시아 해군은 캄란만에 정기적으로 입항하고 있다. 캄란만은 미국과 일본도 눈독을 들이는 남중국해의 군사적 요충지다.
얼마 전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군함 2척이 인도양 일대를 돌고, 버마·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홍콩 등지에 기항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언론 〈스푸트니크〉는 이렇게 지적했다. “러시아가 태평양 함대를 국제외교 정책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 러시아의 동방 확대가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접근하는 국가 중에는 북한이 있다. 과거 일본을 오갔던 북한 여객선 만경봉 호가 러시아와 북한을 정기적으로 운항하기 시작한 데 이어, 북한과 러시아는 “2017~18년 교류계획서”를 체결하는 등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두고 미국 국무부는 “중국의 [대북] 제재로 북한이 입은 손실을 러시아가 보상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푸틴은 아예 “힘의 권력을 이용하는 서구의 외교 정책”이 북한 같은 비교적 작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계기가 될 수 있다며, 북한의 핵무장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이렇게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북한에 접근하고 유럽과 중동에서 미국과 대립하자, 일부 반제국주의자들에게 러시아가 중국보다 더 ‘반제국주의적인’ 국가로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 자신이 제국주의간 갈등의 한 당사자다.
‘신냉전’론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맞서 굳건한 동맹 관계를 형성해 간다고 묘사하지만 실제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중·러 관계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해 전술적으로 공조하지만, 전략적 동맹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도권 문제나 인도의 부상에 따른 입장 차이 등 양국의 이익 충돌 요인들도 존재한다. 트럼프가 러시아에 접근하자고 주장했을 때 그는 러시아와 중국의 잠재적 갈등 요인들에 주목해 이간질이 가능하다고 봤던 듯하다.
일본의 개헌
일본의 아베 내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보조를 맞추면서 중국 견제에 앞장서 왔다. 꾸준히 군비를 늘리면서, 미국의 동맹 정책에도 적극 협력했다.
최근 일본은 캄보디아·스리랑카 등의 항만 개발·운영을 위한 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을 견제하며 해상 교통로 확보 경쟁에 나선 것으로, 예컨대 스리랑카 콜롬보항의 확장 공사와 운영 수주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인근의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의 운영권을 확보한 것을 견제하는 의미가 크다. 캄보디아 남부 국제항만의 경우에는, 중국과 일본의 매입 경쟁마저 벌어지고 있다. [4]
일본은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방위비가 ‘국민총생산(GNP) 대비 1퍼센트’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집권 자민당은 향후 방위력 정비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해,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퍼센트’로 증액하는 것을 아베 내각에 제안했다. 트럼프가 나토(NATO)에 제시한 ‘2퍼센트’를 따라가자는 것인데, 앞으로 일본의 군비 증강 추세는 더 가팔라질 듯하다.
아베 내각과 자민당은 평화헌법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 진지하게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자민당은 내년 초 국회 제출을 목표로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개헌안 9조에 자위대 설치 조항을 추가하는 등 군사대국화를 뒷받침하려 한다.
일본 지배자들이 방위비를 증액하고 개헌을 추진하는 데서 북한 ‘위협’론은 유용한 명분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처가 자민당의 ‘2퍼센트 증액 제안’의 주요 근거 중 하나였다. 올봄 한반도 긴장이 높았을 때 특히 일본의 우익 정치인과 언론이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퍼뜨린 것도 개헌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날까?
동아시아의 불확실성이 증대하는 것은 한반도에도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준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북핵 문제가 대외 정책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선언했다. 그는 올봄에 전쟁 위기설이 돌 정도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물론 이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동시에, 트럼프 정부는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조사국은 이렇게 지적했다. “[전략적 인내의] 많은 요소들이 남아 있다. 즉, 미국과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 확대, 북한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중국의 구실 강조, 동맹국들과의 협력. 변한 것은 트럼프 정부가 [오바마 정부보다] 북한 위협의 중요성을 제고했다는 것 정도다.” [5]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이따금 앞뒤 안 맞는 발언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핵심 정책은 변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북한도 이에 대한 반발을 키우고 있다. 트럼프 취임 후에 북한이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하며 조만간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도 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까닭이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 무역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에게 유엔 대북 제재를 제대로 이행하고 북한에 비핵화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북한과 교역하는 중국 기업에도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압박한다(세컨더리 보이콧).
그러나 중국 지배자들로서도 북핵 문제는 상당한 난제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핑계 삼아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 전진 배치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중국은 북한이 자칫 붕괴할지도 모를 수준으로 대북 제재를 강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중국이 대북 제재에 일부 동참하고 북한 경제의 대중국 의존을 이용해 북한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북한 지배 관료들이 반발해 최근 북·중 관계는 많이 소원해진 상태다.
〈한겨레〉 칼럼니스트이자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인 존 페퍼는 트럼프 정부에게 중국의 영향력 약화를 바란다면 그간의 정책을 뒤집어 북한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려면, 중국과 북한의 틈을 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6]
물론 조만간 트럼프가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트럼프 정부도 역대 미국 정부들처럼 북한 ‘위협’을 과장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관철시키는 데 이용하는 게 북한을 포용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여긴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설사 미국이 북한을 끌어안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결국 계속될 공산이 크다.
미국과 북한이 비공식 접촉 수준을 넘어 공식 대화를 재개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 정착에는 온갖 우여곡절이 놓여 있을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설정한 지속적 해빙 조건이 북한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데다 대화가 시작돼도 안정적 합의에 이르는 데까지 온갖 난관에 봉착할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미국 지배자들은 한반도 문제를 항상 그 자체로 떼어 내어 보지 않고 경쟁 제국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판단해 왔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열강의 경쟁은 냉전 후 줄곧 심화돼 왔다.(약간의 평화적 막간극이 있기는 있었다.)
따라서 북핵 문제를 비롯한 동아시아 불안정 문제는 국가 간 외교 협상으로 확실하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보 진영은 문재인 정부에게 평화협상을 하라고 당부할 게 아니라, 더한층의 불안정에 맞설 진정으로 확실한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반제·반자본주의 노동자 계급 투쟁이다.
각주
[1] 알렉스 캘리니코스,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2011년, 307~309쪽.
[2] 조셉 추나라, ‘부진, 취약성, 불확실성 — 세계경제의 여전한 특징’, 〈노동자 연대〉 169호
[3] Michael Roberts, ‘Trump’s 100 days’, 2017년 3월 2일(https://thenextrecession. wordpress.com/2017/03/02/trumps100-days/)
[4] 〈연합뉴스〉 2017년 6월 8일자
[5]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미관계 보고서’, 2017년 5월 23일
[6] 존 페퍼, ‘트럼프의 다음 외교적 반전은?’, 〈한겨레〉 2017년 5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