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 20년:
민주적 권리 후퇴, 빈부격차로 대중의 불만이 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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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 대회와 홍콩특구 내각 취임식에 참석하는 동안 홍콩인들의 축하는 고사하고 시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2014년 우산 운동(민주화 요구 점거 운동)의 주역인 데모시스토당을 포함한 홍콩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홍콩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은 7월 1일이 민주화 항쟁의 날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홍콩 경찰은 광둥성 경찰과 함께 3개월 전부터 “국가 지도자들의 도착을 준비하는 정화 작전”으로 8천여 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시진핑이 방문하는 동안 우산 운동, 천안문 항쟁 28주년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이 터져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홍콩 반환 20주년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정부는 반환 뒤에도 홍콩의 자치를 보장하는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약속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홍콩의 중국화가 급속도로 추진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시민적 권리는 축소되고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2014년 10월 우산 운동을 촉발시켰던 한 요인은 행정장관과 입법회(시의회) 직선제 요구였다.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014년 8월 중국인민대표대회는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후보추천위원 1천2백 명 중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은 후보들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부여하는 안을 의결했다. 후보추천위원들은 친중국 성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친중 인사가 행정장관에 임명될 수밖에 없다.
친중파 캐리 람은 경쟁자인 존 창(온건 친중파)에게 여론조사에서 20퍼센트 뒤졌지만 간접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행정장관이 됐다. 선거 직전인 2017년 2월 5일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장 장더장은 “캐리 람 후보는 중국공산당이 지지하는 유일한 후보”라고 말했다. 캐리 람은 우산 운동 동안 정무사관(총리격)으로 있으면서 우산 운동을 강경 진압해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인물이다. 그가 행정장관으로 당선한 바로 다음 날인 3월 27일 홍콩 정부는 2014년 우산 운동의 지도자들을 소란 선동 등의 혐의로 전격 기소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퉁뤄완 서점 사건이다. 2015년 10월 린룽지를 비롯한 서점 주주와 경영자 등 5명이 반중(反中) 내용의 서적을 펴내 중국에 유통시켰다는 혐의로 중국 공안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뒤 실종됐다가 돌아왔다. 이 서점은 중국공산당 내부 비사와 시진핑 등 지도자들의 권력 암투 등을 다룬 서적을 출판하고 판매한다.
홍콩 반환 20년 동안 홍콩 국내총생산(GDP)은 82퍼센트 증가했고, 1인당 GDP도 60퍼센트, 교역 규모는 1백47퍼센트 증가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의 과실을 누가 차지할지가 진정한 문제다. 대중국 교역 비중이 20년 전 36퍼센트에서 현재 50퍼센트로 늘어나면서 홍콩 금융인과 기업인들은 투자와 금융 허브 지위 등으로 큰 이득을 얻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외와 박탈감을 느낀다.
중국 자본이 홍콩에 들어오면서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지난 20년 동안 1백12퍼센트 상승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2016년 11월 홍콩의 지니계수(클수록 불평등)는 1945년 이래 최대치인 0.539를 기록했다. 특히 젊은이들의 좌절감이 심하다. 최근 홍콩 기업들마저 중국에서의 사업을 위해 북경어(보통어)를 쓰는 중국인들을 선호해, 광둥어를 쓰는 평범한 홍콩 젊은이들은 저임금 직종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좌절감이 우산 운동 때 홍콩 대학생과 고교생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점거와 시위를 벌인 이유 중 하나였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중국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정작 대중이 자기 대표를 자기 손으로 선출할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의 의중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 간접선거로 홍콩 행정장관으로 임명되도록 하는 것을 보라.
오늘날 중국 지배자들에게는 홍콩의 운동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는 억압당하고 그래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들이 있다. 티베트와 신장의 위구르족이 대표적이다. 중국 지배자들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떠밀려 자치와 민주주의를 허용한다면 그 파장은 티베트, 신장위구르, 네이멍구 등 소수민족 자치구에도 미칠 것이다.
또한 홍콩은 중국의 경제 중심지인 광둥성 내에 있고, 그 성도인 광저우와 인접해 있다. 홍콩에서 민주화 운동이 거대하게 벌어지면, 그 여파가 인근에 위치한 제조업 중심지 광저우와 둥관 등지의 노동자들에게도 미칠 수 있다. 경제 위기로 임금 삭감과 해고 위협, 노동권 무시에 항의하는 노동 분규가 갈수록 많아져 중국 지배자들은 이미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1920년대에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1920~21년 홍콩에서 최초로 벌어진 파업에 광저우의 노동자들이 큰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국의 탄압을 피해 홍콩을 빠져 나온 노동자들이 광저우를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1925년 5월 30일 운동은 그 반대 과정을 보여 줬다. 상하이에서 일어난 파업 물결이 광저우와 샤먼을 거쳐 홍콩으로 확산됐다. 홍콩에서 생겨난 파업위원회가 사실상 제2의 정부 구실을 했다.
1920년대 초반의 중국공산당은 이런 투쟁의 연대와 확산을 크게 기뻐했지만, 오늘날의 중국공산당은 이런 전통을 아주 끔찍하게 싫어한다. 시진핑의 홍콩 방문에 이어 중국 유일의 항모인 랴오닝함이 홍콩에 기항하는 것은 홍콩 민주화 운동 세력을 겨냥한 일종의 무력 시위다.
엄혹한 탄압조차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투쟁을 잠재우지 못했음을 중국 현대사는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중국 사회가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