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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우파의 계속되는 포악질:
노동계급의 독립적 대중 투쟁이 절실한 때

7월 30일 제헌의회가 들어선 후에도 베네수엘라에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제헌의회 의원 선거 당일 우파들이 전국에서 폭력 시위를 벌여 최소 열 명이 사망했다. 이후 우파들은 폭력 수위를 높였고(관련 기사: 본지 217호 ‘베네수엘라 군 기지 습격: 우파들이 좌파 정부에 대한 폭력 수위를 높이고 있다’), 야당은 제헌의회 불복종을 선언했다.

외신들은 이들을 ‘권위주의 독재에 맞선 평화 세력’으로 묘사한다. 볼 베어링을 난사하고 방화와 폭행으로 사람들을 살해한 주체가 반정부 시위대라는 점, 야당이 이를 공공연히 부추기고 있다는 점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지금 베네수엘라의 혼돈의 “근본 원인은 1999년 출범한 우고 차베스 정부의 각종 무상 포퓰리즘 정책에서 비롯”(〈조선일보〉)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친노동자 정책은 비현실적이라 “국가 경제 파탄”과 “국제적 고립”(〈서울경제〉)만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혼돈을 이해하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우파의 포악질로 파탄에 이르다 투쟁으로 '볼리바르주의 혁명'의 성과를 지키지 못한 대가는 끔찍한 가난과 좌절이다 ⓒ출처 Julio César Mesa (플리커)

공격과 저항의 역사

20세기 후반 내내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은 석유 수출 수익을 독점해 왔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투쟁을 억눌렀다.

1980년대 외채 위기 후 지배자들은 고강도 긴축을 추진했다. 약 1천만 명이 빈민이 됐다. 1989년에 긴축에 맞선 대규모 민중 항쟁 ‘카라카소’가 벌어지자, 지배자들은 이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해 최소 1천5백 명을 살해했다.

민족주의 성향의 장교였던 우고 차베스는 카라카소의 염원을 대변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기 첫 몇 해 동안 차베스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시장에 타협했으며, 대표적 ‘적폐’였던 노동 유연화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2001년 유가가 하락하면서 경제 위기가 닥치자, 자본가들은 차베스를 제거하고 개혁을 되돌리고자 했다.

이들은 2002년 쿠데타를 감행해 차베스를 구금하고 노동조합 및 지역 활동가 60여 명을 살해했다. 같은 해 말, 국영 석유기업 페데베사PDVSA 및 민간 기업의 사장들은 네 달에 걸친 대규모 직장 폐쇄와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 자들이 지금도 반정부 우파를 이끌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베네수엘라 인민 전체의 생활을 파탄 내서라도 이윤과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을 패퇴시킨 것은 차베스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저항이었다. 쿠데타를 막아낸 것은 빈민 수십만 명의 거리 시위였고, 사장들의 사보타주를 무산시킨 것은 공장을 접수해 생산을 재개하고 생필품 유통을 직접 관리한 노동자들의 조직적 행동이었다.

자본가들의 자신감은 꺾였다. 노동자들은 부패한 노총을 대신할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지역 활동가들은 주민평의회를 구성해 개혁을 요구하고 때로 직접 추진했다.

차베스 자신도 좌경화해 석유 수출 수익을 이용한 대규모 복지 정책 ‘미션’을 발족했다.(차베스는 이를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했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발목 잡히고 신흥공업국(특히 중국) 경제가 급성장해 유가가 폭등한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위기와 전략 문제

2008년 세계경제 위기로 유가가 하락하면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션’은 재정 부족으로 개점휴업 상태를 면치 못했고, 노동자 대중의 생활 수준은 악화됐다.

자본가들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이윤 감소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국가 재정에 귀속돼야 할 석유 수출 수익의 약 20퍼센트를 유령 회사를 통해 빼돌렸다. 매점매석으로 생필품 가격이 올라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었지만, 노동자·서민은 생활고에 빠졌다.

차베스는 ‘볼리바르주의 혁명’의 잘못된 전략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차베스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지만 국가기구에 도전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려 들었다. 차베스 시절 국가관료는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차베스에게 노동자 대중 운동의 구실은 차베스 휘하 국가기구의 개혁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과 상이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라 차베스가 (쿠바 공산당을 모델로) 창당한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은, 차베스가 하달한 정책을 수행하는 한편 대중운동을 제어하는 구실을 했다. 이 당에는 기층 노동자 대중뿐 아니라 국가관료, 자본가 등 온갖 계층이 뒤섞여 있었다. PSUV와 국가기구를 활용해 사사로이 부를 쌓는 자들의 부패가 극심해, ‘볼리부르게스’(볼리바르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자본가들)라는 신조어가 생길 지경이었다.

차베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할 권한, 생산수단을 통제할 권한에도 도전하지 않았다. 고유가 덕분에, 심지어 쿠데타로 차베스를 제거하려 했던 자본가들조차 차베스 하에서 자산을 늘렸다.

‘혁명’의 상징 차베스는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중의 지지를 한몸에 얻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국가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독립적 투쟁이야말로 우파의 복권을 저지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이다.

우파는 국가권력을 회복해 개혁을 되돌리고자 했다. 2013년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마두로에 패배한 후, 우파는 대규모 폭력 시위를 벌여 정부를 통치 불능으로 몰아가려 했다.

마두로는 우파와 타협을 시도했으나, 우파는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권력 장악을 위해서라면 베네수엘라 전체를 파탄 낼 태세가 돼 있었다. 마두로가 이권을 대가로 우파를 달래려는 가망 없는 시도에 매달리는 동안 노동자 대중은 ‘볼리바르주의 혁명’이 추구한 개혁이 좌초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그러기를 몇 년, 베네수엘라 노동자 대중의 생활 수준은 차베스 이전 불황이 가장 심각했을 때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마두로 정부는 2016년부터 공식 경제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최근 5년간 물가상승률이 7백 퍼센트에 이르렀고, 인구 90퍼센트의 소득은 생필품 구입에도 부족하다. 베네수엘라 교원노동조합은 교사 한 명이 최소한의 생필품을 구매하려면 교사 17명 분의 임금이 있어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노동자 대중의 반우파 정서는 단호하지만 2002년처럼 거리와 작업장에서 직접 투쟁할 자신감을 갖기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이 지난 2015년 총선에서 여당 지지자 2백만 명이 기권해 우파 야당이 대승한 배경이다.(관련 기사: 본지 185호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왜 큰 위기를 맞게 됐을까?’)

대중 투쟁

마두로는 여전히 기존 전략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파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우회하려 대법원과 제헌의회를 이용하고, 자본가들의 경제적 공격을 방어하려 군부에 경제 특구를 보장하고 다국적기업과 민관 합작 회사를 꾸리는 식이다.

한편 군부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다. 마두로는 열대우림 개발 및 금광 채굴 사업을 군부와 다국적기업이 합작해 추진하게끔 하는 특혜를 부여하려 한다. 이번 제헌의회가 (차베스 시절 재국유화를 추진한) 페데베사를 (부분) 민영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는데, 그 수혜는 노동자 대중이 아니라 (채굴권을 할양받은) 군부한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기 차베스를 제거하려는 자본가들을 좌절시킨 것은 국가기구나 군부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투쟁이다. ‘21세기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국가기구에 의존하고 우파와 타협을 도모하는 정치가 아니라 노동계급에 기반한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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