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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나치 자유당의 본질과 1930년대 나치 집권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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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열린 주장과 대안》 1호(2000년 4월)에 ‘하이더는 파시스트다, 우리는 1930년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제목으로 실린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중도우파 국민당과 나치 정당인 자유당의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이 글은 자유당의 본질과 파시즘의 성격, 1930년대 나치의 집권 경험과 그에 맞선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현재에도 국민당과 자유당의 연립정부 논의가 진행 중이므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간단한 교정만 보아 다시 싣는다.
2000년 2월 4일 극우 정당인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하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1999년 10월 총선에서 제3당으로 전락한 보수 정당인 국민당이 히틀러 숭배자인 외르크 하이더가 이끄는 자유당과 손잡고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해 온 사회민주당은 10월 총선에서 제1당의 자리를 지키기는 했으나 과반수가 안 돼 3개월 넘게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당의 연정 참여가 발표되자 심지어 유럽의 보수 정치인들조차 우려를 표명했고 유럽연합의 여러 정부들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외교적 제재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이들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고 있다. 한편, 다행스럽게도 오스트리아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파시스트 항의 운동은 점점 확산되고 있다.
국민당과 자유당 연립정부가 공식 출범한 2월 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자유당의 정부 참여에 반대하는 항의 물결로 뒤덮였다. 5000명이 넘는 학생과 노동자들이 대낮부터 취임식이 있는 대통령궁 주변에 모여들었다. 분노한 시위대에 겁을 집어먹은 새 연립정부의 장관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취임식장에 몰래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처음으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쐈다. 시위에 참여한 한 주부는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리아인 4명 중 3명은 하이더에 반대해 투표했다. 하이더는 파시스트다. 우리는 1930년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오스트리아에서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항의 시위가 2월 4일 이후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주말인 2월 19일에는 유럽 각지의 반파시스트 세력이 빈에 모여 거대한 집회를 열었다. 처음에 3만 명이었던 시위대는 순식간에 20만 명으로까지 불어났다. 오스트리아 인구가 800만 명이니까 40명당 1명꼴로 시위에 참가한 셈이다.
하이더는 누구인가?
외르크 하이더는 파시스트다. 하이더는 히틀러의 열렬한 찬양자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나치와 동일시해 왔다. 하이더는 충성스런 나치 당원이었던 자기 부모의 경력을 옹호해 왔다. 그는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토지를 갖고 있는데, 이 토지는 그의 삼촌이 1930년대에 유태인으로부터 강탈한 것이었다.
하이더는 히틀러의 SS 친위대를 “존중돼야 할 나치군의 일원”이며 “명예로운 사람들”이라고 찬양한다. 또, 그는 유태인 강제노동수용소를 “재교육 캠프”라고 애써 고쳐 부른다.
하이더는 1992년 카리티아 주지사로 있을 때 나치 정책들을 찬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치 독일의 “원만한 고용정책”을 찬양해 왔다.
하이더는 유태인 대학살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전직 나치 친위대원들 모임에서 연설하곤 한다. 1990년에 있었던 모임에서 그는 “우리의 용사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하고 말했다. 1995년에는 나치 친위대 대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고귀한 사람들이 있다.” 또, 어느 해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자기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서유럽에는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자유당은 1956년에 창당됐다. 자유당의 전신인 독립연맹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나치 내각에 뿌리를 두었다. 자유당 초대 당수인 안톤 라인탈러는 오스트리아 나치 내각의 일원이었고, 그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페터도 SS 친위대 간부였다. 그런데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동안 자유당은 노골적인 친나치파와 거리를 두려고 했고 점차 주류 친자본주의 정당처럼 변해 갔다. 그 때조차 오스트리아 민족주의가 여전히 자유당의 핵심 정강이었지만 말이다.
자유당을 급속하게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놓은 사람이 바로 하이더였다. 하이더는 1986년에 당내 반이민 세력과 나치 세력의 도움으로 당수가 됐다. 하이더는 선거에서 파편화된 파시스트 조직들의 지지를 받아 왔다. 지난 15년 동안 자유당 지도부에는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히틀러를 찬양해 온 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지금 자유당 안에는 파시스트부터 신자유주의 기업가, 오스트리아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세력들이 있지만 하이더는 자유당을 완전한 파시스트 운동 세력으로 변모시키기를 바란다.
지난 10월 총선에서 하이더의 핵심 구호는 반이민 정책이었다. 하이더는 오스트리아가 “외국인의 침투”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오스트리아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하는 외국인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인의 침투”라는 말은 히틀러의 선전에서 핵심 용어였다. 히틀러는 외국인을 속죄양 삼아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가 가져온 재앙의 책임을 전가했다.
세계적으로 하이더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지자 그는 나치 옹호 발언에 대해 “무신경했고 오해를 불러일으킨 발언에 대해 유감”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가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오해를 불러일으킨 발언”을 “무신경”하게 정치 경력 30여 년 내내 해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이더는 새 연립정부 출범 하루 전인 2월 3일에 인종주의를 비난하는 선언에도 사인했다. 그러나 하이더가 “외국인 혐오, 유대인 차별, 인종차별을 지양한다”는 내용이 담긴 신정부의 정책 프로그램 문서에 서명했다 해서 그가 그것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이더는 문서에 서명한 바로 다음 날 오스트리아에 있는 터키 이민자의 이중 국적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새 연립정부는 여성부도 없애 버려 큰 분노를 사고 있다. 여성부는 동일임금법 등 여성의 삶을 향상시키는 여러 조처들을 다뤄 왔다. 여성부를 없애 버린 새 연립정부의 조처는 여성에 대한 나치의 구호를 떠오르게 한다 ― 아이들, 교회, 부엌.
하이더의 자유당은 어떻게 급부상할 수 있었는가?
하이더의 지지가 성장해 온 것은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연립정부가 대중의 생활을 향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은 지난 3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해 왔는데 그중 상당 기간을 오스트리아 대자본의 주요 정당인 국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연립정부는 복지를 삭감하고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영국 노동당 블레어류의 ‘제3의 길’을 따르고 있다. 사회민주당은 시장에 굴복하고 1950~1960년대 노동자들이 얻은 성과를 곶감 빼먹듯 하나둘 빼앗아 갔다. 사회민주당과 국민당의 연립정부가 통치한 지난 13년 동안 실업률은 5퍼센트에서 7.1퍼센트로 높아졌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회민주당 지지자들인 노동자들은 이 당에 투표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과 국민당 모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신물이 나 있다. 기성 정치권의 뿌리 깊은 부패도 사람들의 환멸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뇌물 수수 부패 스캔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경제 및 사회 지도층과 당 및 국가 관료의 긴밀한 유착관계는 오스트리아 사회 전반의 광범위한 부패를 가져왔”고 “이 같은 부패체제를 바탕으로 사민당과 보수적인 국민당의 ‘대연정’이 전후 50년의 대부분을 지배해” 온 것이다(〈한겨레〉).
하이더는 양당에 대한 깊은 불만과 환멸감이 빚어낸 정치적 공백을 틈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이더는 1970년대 이래로 되풀이되는 오스트리아의 경제 위기가 마치 이민자들 탓인 양 참주선동함으로써 불만 어린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려 한다. 지난해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이민 반대, 부패 반대 등을 내걸고 27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해 제2정당으로 급부상했다. 〈한겨레〉는 “오스트리아 경제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불안해진 중산층의 표가 자유당으로 쏠렸다”고 지적했다.
사회민주당은 65석을 얻어 제1당의 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으나 과반수를 넘지 못해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국민당과의 연정 시도도 깨졌다. 왜냐하면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노동조합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층 확산되고 한층 깊어지는 복지 삭감 계획을 올바르게도 더는 못 받아들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대자본의 주요 정당인 국민당은 삭감 계획과 민영화를 밀어붙이기 위해 파시스트와 손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이더의 자유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쉬셀의 국민당이 위험한 전략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이다.
자유당과 국민당 연립정부는 노동조합과 협의 없이 공공 서비스 부문 인원 삭감, 공기업 민영화, 연금 수령 연령 상향 조정 등 삭감 프로그램을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이더는 마치 “외국인의 침투”에 맞서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척해 왔지만, 의료 서비스와 조기 퇴직 예산을 20퍼센트나 삭감할 계획이다. 조기 퇴직 예산이 삭감되면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은 지금보다 5년 더 일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국민당 당수 쉬셀은 “연정을 막으려는 해외의 시도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며 자신이 수상으로서 하이더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또, 쉬셀은 자유당이 하위 파트너일 뿐이며 헌법으로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기만족적 주장은 히틀러가 수상이 됐을 때도 나왔다. 당시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와 그의 자문 파펜은 히틀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1933년 1월 그를 수상에 앉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듯이 헌법으로 히틀러를 막지는 못했다.
국민당 당수 쉬셀은 연립 협상 동안 자유당을 길들였다고 말했지만 이 기간 동안 쉬셀은 하이더의 반이민 정책을 전면 수용했다. 연립정부는 하이더의 자유당을 결코 무력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정부에 참여해 있는 동안 하이더의 자유당은 오스트리아 정치에서 용인될 수 있는 세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1930년대에 반노동자적 극우 정부들이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는 길을 닦아 주었듯이 말이다.
유럽과 전 세계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
하이더의 부상은 유럽과 전 세계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하이더가 부상한 배경은 비단 오스트리아만의 독특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나라마다 정도와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 그리고 이에 따를 사회·정치적 양극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특히 유럽의 좌파 정부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당이 이끈 연립정부와 마찬가지로 위기를 겪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좌파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 거부 덕분에 집권했는데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슈뢰더가 표방하는 ‘제3의 길/신중도’는 복지 삭감과 유연 노동 등 이전 우파 정부들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유럽 좌파 정부들의 ‘제3의 길’이 시장에 굴복하고 있는 데 대한 환멸이 다음 번의 세계적 경기 후퇴와 맞물린다면, 이는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경고하듯 극우파를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제3의 길’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사회민주당 안팎의 좀더 좌파적인 후보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확고한 반대를 표방하는 믿을 수 있는 좌파적 대안이 떠오른다면 인류를 야만으로 되돌릴 파시즘의 부상을 막을 수 있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외르크 하이더를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파악”이라고 생각한다. 《말》 3월호에 기고한 주정립 씨는 “하이더는 오스트리아의 다른 정치세력들과 180도 배치되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지껏은 단지 그들의 입장을 좀더 일관되게, 좀더 분명하게, 필요할 때는 과장과 왜곡을 섞어 가며 좀더 과격하게 주장할 뿐”이라고 썼다. 하이더가 유럽의 보수 정당 그리고 심지어 사회민주당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파시즘이란 과연 무엇이며 다른 정치세력과는 어떻게 다를까? 그동안 파시즘이란 말이 잘못 사용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파시즘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심지어 요즘에는 우리 안에 파시즘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도 있다. 《당대비평》은 8~9호에 걸쳐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특집을 실었는데 이에 따르면 모든 권위, 통제, 심지어 강경한 주장을 파시즘으로 본다.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영화 〈Z〉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러므로 그리스의 군부 정권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정보를 파시즘적으로 강요하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은밀한 영화 전략이다.”(임지현) 이런 논의는 파시즘을 아무 뜻도 없게 만들어 버렸을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는 이런 함의를 담고 있다. ‘네 안의 파시즘하고나 싸워라!’
파시즘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파시즘을 권위주의 독재와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을 “군사 파쇼”로 김영삼 정권을 “민간 파쇼”로 여겼는데 이것은 파시즘을 “독점 자본의 테러 독재”로 규정하는 스탈린주의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파시즘은 여느 독재 체재와는 달리 대중적 정치세력이고 그것도 중간계급 대중에 토대를 둔 정치 운동이다.
경제·사회적 혼란기에 파시즘은 대중운동으로 갑자기 부상할 수 있다. 파시스트들은 사회 전체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지만 대중적 파시스트 정당의 기반은 언제나 중간계급이었다. 그렇다면 중간계급의 어떤 성격이 그들을 파시즘에 이끌리게 하는가?
노동자들은 경제 위기 때 노동조합에 의지할 수 있다. 자본가들은 거대 기업, 은행,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자본가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한다. 그러나 중간계급 — 자영업자, 중간 관리자, 의사, 변호사 등 — 은 노동자 같은 집단적 힘도, 기업주들 같은 경제적 힘도 없다. 그들은 사회가 산산조각나고 있다고 느낄 때 당황하고 분노한다. 이럴 때 중간계급은 노동자와 기업주 모두에 반대해 ‘별볼일 없는 소시민’을 옹호하겠다고 약속하는 파시즘에 이끌릴 수 있다.(늘 그런 것은 아니다. 노동자 운동이 사회 위기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면 중간계급은 노동자 운동을 지지할 수 있다.) 하이더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 자와 불만을 가진 자, 사회적 낙오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민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노동자와 기업주 모두에 반대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는 유색 인종 속죄양 삼기나 민족주의와 결합된다. 파시즘은 실업의 책임을 이민자들에게 돌림으로써 미조직 노동자들과 실업자에게 호소할 수 있다. 하이더의 이민 반대 정책처럼 말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당의 핵심은 오늘날로 치면 자영업자와, 노조로 조직되지 않은 전문 직업인 같은 사람들이었다.
우익 정치인들도 소수 민족을 속죄양 삼고 민족주의를 설교하지만, 파시스트는 이들보다 더 역겹고 더 위험하다. 아무리 독재적 통치 아래서도 노동조합 운동이 존재할 수 있지만 파시즘 아래서는 그럴 수 없다. 파시스트들의 목적은 모든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파시즘은 대자본에 대한 반대는 실행하지 못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모두 그랬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뒤 나치의 반자본 강령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당내 룀-슈트라서 분파를 숙청했다.
오늘날의 파시스트들은 자신을 선거에서 승리한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내세우려 한다. 세계적 비난에 부딪힌 하이더가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선거밖에 아무 일도 없었던 ‘소국’ 오스트리아가 제재 조치 논의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처음에는 선거를 통해 공직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지는 않았다. 히틀러가 수상에 올랐을 때도 그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제복 입은 암살자들의 준군사적 운동인 40만의 SA 돌격대 덕분이었다.
파시스트들에게 거리 행진과 폭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노동계급처럼 집단적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의 모든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외관상 ‘무적의 테러 부대’를 만들어야 했다. “중간계급 스스로 자신이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대중운동을 통해 ‘위대한 용’의 일부분임을 마음에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말한 바 있다.
경제 위기가 심각할 때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공격하는 ‘정상적인’ 방법이 더는 효과가 없음을 발견하고는 노동계급 조직을 싹쓸이하기 위해 파시즘의 테러 부대에 기대고자 한다. 유용성을 인정받은 파시스트들은 자본가 계급의 후원 속에 권력을 장악한다. 그들은 결코 인구 다수의 투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물론 하이더는 아직 군사 부대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SA 돌격대였던 자기 아버지의 경력을 옹호하고 전직 SS 친위대들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 하이더가 테러 부대를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이더의 선거 약진은 벌써 흑인과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암살단의 공격을 북돋고 있다.
다시 주정립 씨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가 신자유주의 교리를 따라 온 사회민주당에 대해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것은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설사 '제3의 길'을 따르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하이더가 부상할 길을 터주었다 해도 하이더나 사회민주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적 토대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조합을 토대로 삼는 반면 파시즘은 노동계급 조직들을 분쇄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주정립 씨 같은 시각은 파시즘의 위험과 파시즘에 맞서는 공동 투쟁의 시급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시각이다.
오스트리아의 반나치 저항 역사
대체로 기성 언론들은 오스트리아인 모두가 나치라도 되는 양 보도하고 있다. 기성 언론에 실린 글을 읽고 있노라면 모든 오스트리아인이 구제불능의 선천성 나치처럼 느껴진다. 진보적 언론을 자임하는 《한겨레21》이나 《말》에서도 이런 주장을 볼 수 있다.
《말》은 3월호에 주정립 씨의 글을 논평 없이 실었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적어도 6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는 데 상당수의 오스트리아인들이 직·간접적으로 협력, 동조 내지 방관하는 등 나치의 테러 지배체제가 남긴 혈흔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소매에도 배어 있었다.”
《한겨레21》에 실린 최연구 씨의 글에도 이런 취지의 주장이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스트리아인 자신들은 극우 준동에 대해 위기 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11일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연립정부 반대 시위대는 “우리들이 새 정부를 선출하지 않았다”는 깃발을 들었다. 이들 말마따나 오스트리아인 70퍼센트 이상은 총선에서 자유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또한 극우 준동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기는커녕 연립정부에 대한 반대는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돌아보면 주정립 씨와 최연구 씨 등이 주목하지 않는 반나치 저항의 역사도 있다. 오스트리아에 어떤 투쟁의 역사가 있었는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세기 초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현대적 산업 도시였다. 빈에는 체코인, 슬로베니아인, 헝가리인, 유대인, 그리고 다른 동유럽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사회주의 사상과 단체들이 빠르게 성장했고 혁신적 예술 운동도 성장했다. 1918년 11월 빈에서 혁명이 분출했다.
그 결과 군주제,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됐다. 러시아에서처럼 노동자 혁명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빈 혁명은 풍족한 유산을 남겼다.
1920년대 “붉은 빈”의 노동자 계급은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주의 조직과 노동조합 조직을 갖고 있었다. 유권자 셋 가운데 둘이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빈 사람 셋 가운데 한 명이 사회민주당의 정식 당원이었다.
오스트리아 자본가 계급과 중간계급은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궤멸시키기를 바랐다. 1930년대 초반에 대공황이 확산되자 그들의 열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이를 위해 그들은 무솔리니 숭배자인 돌퍼스 독재를 후원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돌퍼스는 나치 모델을 따라 더한층 극심한 독재 체제를 수립하려 했다.
1934년 2월 12일 돌퍼스는 노동계급 조직들을 파괴하는 데 착수했다. 그는 파시스트 군사조직인 하임베르의 고삐를 풀어 노동자 지구에 들여보냈다. 하임베르의 살인과 파괴가 계속되는 동안 군대와 경찰은 노동자 지구를 봉쇄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영웅적으로 싸웠다.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 2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비극이게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기하라”며 즉각 투쟁에 나서기를 꺼렸다. 그들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무장 저항을 명령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화약을 너무 오랫동안 축축하게 놓아 두었던 것이다. 결국 파시스트가 승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반란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완전히 항복했던 독일과는 달리 빈 노동자들은 싸웠던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 사이에는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다. “베를린에서 항복하느니 빈에서 죽는 게 낫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빈 노동자들의 투쟁은 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심어 주었다. 1934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실질적인 위협이었던 파시즘의 부상을 막아 냈다.
그러나 돌퍼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는 급격하게 우경화됐다. 노동조합들과 여성연맹, 심지어 음악협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치 조직들이 파괴됐다. 오스트리아의 자본가들과 중간계급은 1938년 히틀러 독일과의 합병을 환영했다. 1945년까지 약 60만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런 암흑 같은 시절에조차 저항의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나치 독일과의 합병을 반대했고 시위를 하기까지 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 첩보기관의 보고서는 “붉은 빈”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철저한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승리한 연합군이 동유럽과 인접한 오스트리아에서 하루빨리 안정된 자본주의 정부를 세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지배자들의 나치 경력을 모른 체했다. 서독에서보다 더 많은 나치가 권좌에 다시 앉았다.
유감스럽게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도 이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동참했다. 심지어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경력자들이 당에 가입하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주류 정치 세력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도 1930~1940년대 오스트리아 기성 체제의 나치 전력을 들춰내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극우가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성공적일 수 있었던 한 요인이다.
그러나 저항의 전통이 죽은 것은 아니다. 하이더는 기성 정치에 환멸감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조금 획득하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원이 하이더를 지지하는 비율은 전체 국민으로 따졌을 때보다 훨씬 낮다. 최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 투쟁은 결정적 패배를 맞은 적도 없고 사기가 저하돼 있지도 않다. 오스트리아인 모두가 파시스트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에는 돌퍼스와 나치로부터 영감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1934년 반란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1934년 반란 등 저항의 역사로부터 배워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은 오늘날에는 하이더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이더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외르크 하이더가 제2의 히틀러가 되고 인류가 1930년대 야만주의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
아직 오스트리아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당이 새 연립정부에서 6명의 장관을 갖게 된 것은 하이더에게 거대한 진일보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됐을 때 히틀러도 소수파였다. 히틀러는 이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돌격대에 합법적 외피를 씌우고 단 몇 주 만에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분쇄했다.
하이더가 이것을 성취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렇게 하려면 자유당을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으로 바꿔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도 걸리고 연립정부와 자유당을 분열로 몰고 갈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집권해 있는 동안은 모든 것이 하이더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하이더 같은 인간 쓰레기를 일찌감치 없애 버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이더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의 외교적 제재에 기대를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러 정부들과 정치인들이 예상보다 비교적 강경하게 반응했다. 지난 1994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동맹이 베를루스코니 연립정부에 참여했을 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체하고, 여러 회의에서 파시스트 장관들을 환영했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기민련 지도자들이나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같은 보수 정치인들은 하이더의 성공이 자기 나라 극우를 자극해 자신의 표를 빼앗아 가지나 않을까 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하이더 비난에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정치인 가운데 하나인 자크 시라크는 평생 드골주의자로서 결코 인종차별에 대한 원칙 있는 반대자가 아니다. 게다가 그는 지난 1990년대 초반에 “이민자 지역의 소음과 악취”를 언급하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표를 호소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라크 같은 주요 보수 정치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어느 정도 자신의 지지자 속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하이더나 르 펜 같은 극우의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의 보수 정당들은 지금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은 1990년대 초반에 붕괴했고, 헬무트 콜의 뇌물 추문은 독일의 기민련을 혼란 속에 밀어 넣으며, 프랑스 우익도 깊은 분열에 빠져 있다. 이럴 때 극우 정당은 보수 정당의 지지 기반을 잠식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보수 정치인들은 외교적 제재 같이 극우를 고립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 있지만, 똑같은 동기에서 극우 정당과의 동맹 등 협력도 모색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지금 이런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유럽 정치인 가운데서는 독일 기사당 총재이자 바이에른 주지사이기도 한 에드문트 스토이버가 오스트리아 새 연정을 지지함으로써 그 서두를 장식했다.
한편, 유럽연합 강경 노선의 또 다른 배경은 현재 유럽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고 있는 사회민주당 정부들이다. 유럽의 노동자 운동은 파시즘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사회민주당 정부들은 얼마 전까지 “인권”의 이름으로 나토 전쟁을 지지해 왔기 때문에 하이더가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도 점점 후퇴하거나 제재가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유럽연합 안에서는 이번 제재 조처로 ‘성급하고 앞뒤를 못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여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국 노동당 외무장관 로빈 쿡은 하이더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며 좀더 지켜보자는 취지로 말한다. 그러나 하이더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기를 사람들이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하이더에 대한 반대는 지금 당장 더 강력하게 전개돼야 한다. 하이더가 자신의 말을 실천으로 옮기기 전에 말이다.
어쨌든 오스트리아를 고립시키려는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의 캠페인이 환영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외부의 압력만으로는 하이더를 제거할 수 없다. 파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는 두 가지로부터 나올 수 있다.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동을 통일해 반파시즘 대중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90년대에 영국의 반나치동맹(ANL)은 국민전선과 국민당의 부상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ANL은 국민전선과 국민당이 북과 깃발을 내세운 거리 행진을 하려 할 때마다 그들과 정면 대결해 그들을 거리에서 몰아냈다. 오늘날 영국 나치는 거의 찌그러들었다.
가장 강력한 반파시스트 세력은 조직 노동자 계급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째, 1994년 5월 파시스트인 국민동맹이 참여한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보수 연정이 출범했지만 채 1년도 못 돼 무너졌다. 베를루스코니 연정은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994년 12월 총파업은 이탈리아 전체를 멈추게 했고, 노동조합의 대규모 시위가 로마를 휩쓸었다. 이런 저항에 직면한 정부는 급속히 와해됐다.
둘째,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파시스트로 알려졌던 장마리 르펜이 지금은 아주 약화됐다. 1990년대 중반에 르펜은 선거에서 15퍼센트 이상 득표했고, 남부 프랑스 위원회를 통제하고 있었다. 1995년 12월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공공부문 대중파업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이 파업으로 보수 정부가 무너지고 프랑스 정치가 좌경화하자 르펜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처음에 르펜의 반이민 슬로건에 속아넘어가기도 했지만, 보수 정부의 공격에 맞서 파업하면서 이민자들과 함께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르펜에 대한 저항과 성공적인 노동자 투쟁을 통해 프랑스에서 나치 세력은 정치 변두리로 밀려났다. 지난해에 르펜의 국민전선은 위기에 빠져 심각한 분열을 겪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이와 똑같은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 외르크 하이더를 막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통치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산업과 정부를 마비시키는 대중 파업을 뜻한다. 단결된 노동자들의 행동은 파시스트를 패퇴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파시스트의 부상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더의 부상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파시스트의 부상을 고무한다면, 그리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와 결코 무관한 일일 수 없다.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오스트리아 새 연립정부에 반대하고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이 외르크 하이더를 몰아낼 수 있도록 반파시즘 운동에 지지를 보내야 한다. 반파시즘 투쟁은 노동자 운동 역사의 일부를 이뤄 왔고 미래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직면할 수 있는 위협이라는 점에서 파시즘의 본질과 그것을 초기에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