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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 혁명부터 최근까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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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위기는 뿌리 깊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1979 년 이란 혁명의 결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미국의 주요 동맹이자 독재자였던 이란의 샤 정부를 타도했다. 샤가 지배하는 이란 사회는 매우 불평등했다. 극심한 빈곤층과 엄청난 부유층이 공존했다.
하지만 1977년 경기침체로 인해 수많은 빈민가 주민들이 샤에 맞선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 반란으로 발전해서 파업이 벌어지고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하고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혁명의 지도력을 두고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이란 중간계급을 대변하는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국가 원수를 자칭했다.
호메이니는 노동자 평의회를 반대했다. 대신 미국에 맞서기 위해 계급을 가로지르는 “민족 단결”을 요구했다. 이란의 좌파들은 대체로 이에 동조했다. 그렇지 않은 좌파들은 살해됐다.
샤가 타도되자 제국주의는 타격을 입었지만 그에 따라 이란은 고립됐다. 이란의 새로운 지배계급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보다 더 강력하게 경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대(對)이라크 전쟁에 쓸 자금도 필요했다. 미국에서 무기와 자금을 지원 받은 이라크 지배자 사담 후세인은 1980년 이란으로 쳐들어왔다.
국가 산업의 막대한 부분이 국유화됐고, 국가가 이를 사기업과 다를 바 없이 운영했다. 국가 소유 독점기업이 경제를 지배했다.
새로운 복지제도가 등장해 의료비와 교육비를 지원하고 물가를 통제하고 필수품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해서 수백만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 소유 기업과 결탁한 부유한 지배계급도 새롭게 부상했다.
이라크와의 전쟁은 길었고 파괴적이고 유혈 낭자했다. 양측 모두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란 정부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1988년 종전 이후 이란의 경제를 “개방”하는 자유시장으로 나아갔다.
민영화
이는 민영화 실시, 보조금 삭감, 해외 투자를 위한 경제 개방을 수반했다.
이란 지배계급은 대체로 두 개의 분파로 분열했다. 경제적 변화를 추구하고 서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개혁파”와 옛 경제와 연관된 보수적인 “강경파”다.
하지만 민영화된 산업 대부분은 이란 혁명 수비대를 비롯해 국가와 연결된 사람들과 기관들에게 팔렸다.
민영화는 [오히려] “강경파” 출신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집권 이후 가속화됐다.
이란의 개혁파는 자신들의 개혁이 경제 성장, 더 높은 임금, 더 많은 일자리로 이어질 것이라 약속하며 지지를 결집했다. 하지만 이란 지배계급은 부유해졌지만, 평범한 이란 민중은 소외됐다.
노동자들은 보조금과 수당 삭감에 직면했다. 동시에 완화된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조건을 악화시켰다.
한편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 계획은 실패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은 더 높은 제재와 대립을 향해 나아가며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그만뒀다.
이란이 중동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이라크와 시리아로 팽창한 것 등은 서방과의 충돌을 불러 일으킨다. 오늘날 이란 정부가 평범한 사람들과 맺는 약속은 점점 더 무의미해 보인다.
때문에 니마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의회 앞 농성 등 작은 시위들을 벌여 왔습니다. 탄압도 받았습니다.
“지금 분노의 일부는 2013년 로하니가 당선했을 때 품었던, 변화에 대한 높은 기대에서 비롯했습니다. 그의 당선으로 항의 운동이 성장할 공간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활용해 시위를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