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인 학생과 중동 전문가가 말한다:
탄압에도 계속되는 이란 반정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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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1월 18일 노동자연대TV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와 연사의 정리 발언을 녹취·번역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팀이 첨가한 것이다.
앤 알렉산더의 발제: 항쟁의 배경과 전개
이번 시위는 22세의 쿠르드계 학생 마흐사 지나 아미니가 경찰 구금 중이던 9월 17일에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벌어졌습니다.
아미니는 테헤란의 친척들을 방문하던 중에 이슬람 공화국의 엄격한 의복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9월 13일에 경찰에 구금됐고,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당국은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아미니의 시신을 본 친척들은 아주 가혹한 학대와 폭행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미니의 이름과 정체성에 관해 잠깐 얘기하자면, 영어권에서는 흔히 그녀를 “마흐사 아미니”로 부릅니다. 이 이름은 이란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그 자신이 선호했던 이름은 쿠르드식 이름인 “지나”였습니다. 이란에서 쿠르드족의 언어에 대한 억압이 심해서 이름이 두 개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지나”라는 이름은 이란 항쟁의 구호인 “진, 지얀, 아자디”(쿠르드어), “잔, 자데기, 아자디”(페르시아어)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둘 모두 “여성, 삶, 자유”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시위가 이란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란 인권·활동가 통신’의 분석에 따르면, 9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최소 160개 도시, 143개 대학에서 시위가 1115건 벌어졌습니다.
시위는 이란의 31개 주 모두에서 벌어졌지만, 시스탄-발루체스탄과 쿠르디스탄에서 시위가 특히 더 격렬하고 사망자가 많았습니다.
국가 탄압
국가 탄압으로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체포됐고, 수십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그중 네 명에 대해서는 실제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시위 도중 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70명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지역별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이 항쟁의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시위 사망자가 가장 많은 곳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과 접경한 이란 가장 동쪽의 시스탄-발루체스탄과, 가장 서쪽의 쿠르디스탄이었습니다. 사망자가 세 번째로 많은 곳은 수도 테헤란이었습니다.
지나의 고향인 쿠르디스탄에서 가장 시위가 격렬하고 그에 대한 탄압도 극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쿠르디스탄에서의 저항은 지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반응일 뿐 아니라, 쿠르디스탄 지역과 쿠르드 사람들에 대한 오랜 종교적·문화적 억압, 국가 탄압, 경제적 배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란 반대편의 시스탄-발루체스탄에서도 비슷한 동역학이 작용했습니다. 이란 국가가 그곳의 수니파를 극심하게 탄압해 왔기 때문에 항쟁이 격렬했습니다.
테헤란의 사망자 수도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2019년 11월 이란에서 유가 보조금 폐지를 계기로 시위 물결이 일었을 때 테헤란은 비교적 잠잠했기 때문입니다. 이란 정권은 이번 항쟁을 마치 지역적 요구를 내세운 운동처럼 묘사하려 애쓰지만, 테헤란의 사망자 수가 많다는 것은 이번 항쟁이 이란의 중심지, 특히 수도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저항의 형태
저항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지는 하미드 동지가 학생 시위를 중심으로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 시위만이 아니라 파업도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일손을 놓는 파업도 있었고, 상인들이 상업 지구에서 일제히 상점 문을 닫는 ‘지역 철시’도 여러 곳에서 있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많은 시위들이 지나의 죽음에 대한 즉각적 항의로서 또는 경찰의 시위대 살해에 대한 항의로서 자생적으로 벌어졌지만, 조직적으로 조율되는 행동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사례는 12월 7일까지 이어진 12월 초의 전국적 행동이었습니다.
하미드레자 바셰가니파라하니의 발제: 이란 현지의 학생 항쟁 살펴보기
저는 청소년들의 항쟁 참가에 대해 발제하겠습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항쟁을 세대 차이나 문화적 변화의 결과로 설명하는 분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항쟁이 단지 문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이란 각지의 교사들·청소년들과 한 대화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와 대화한 많은 분들은 무엇보다도 차별과 공교육의 낮은 질이 항쟁 참가를 이끌어 낸 중요한 불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컨대 소외된 지역 출신의 가난한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굉장히 고압적인 학교 분위기도 불만을 키운 한 요인입니다. 학생들은 히잡 착용을 강요받고, 몸수색을 당하고,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지 못하고, 학교나 교육부의 이데올로기적 행사에 억지로 참가해야 합니다.
교과 과정도 굉장히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예컨대 교과서에서 여성은 항상 주부, 어머니, 집안일과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학생들은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이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은데’ 하고 느낍니다.
또, 교사들이 학생들의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노동조합에 소속된 교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교사들은 학생의 권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학생들의 권리 의식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이 역시 학생들의 의식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경제난이 이란 전체를 강타하고 있는데, 어떤 지역들은 생활고를 더 심하게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고는 청소년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들도 가족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족이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그들도 그것을 경험합니다. 이 또한 불만을 키우는 요인입니다.
이란의 교육 시스템 전반에 여성, 소수자, 소외 지역 출신자들에 대한 체계적 차별이 만연합니다.
바하이교도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발루체스탄이나 쿠르디스탄에 사는 청소년들은 모국어가 페르시아어(이란의 공식 언어)가 아닌데, 자신들의 모국어로 문학과 역사를 교육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몇몇 지역, 특히 발루체스탄에는 학교 자체가 모자랍니다. 그뿐 아니라, 신분을 증명할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입학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고, 학교와 사는 곳이 너무 멀어서 공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지속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들과 대화하면서 접한 항쟁 참가 이유는 이상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학생 저항과 정권의 탄압
이제 그들이 어떻게 항쟁에 참가하고 투쟁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항의의 한 형태는 여학생들이 강제로 착용하는 히잡을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벗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검색만 해 봐도 접할 수 있습니다.
교육 관료들이 암송하라고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구호들을 따라하지 않는 식으로 저항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요구가 담긴 구호나 노래를 제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이란 공화국 지도자들인 하메네이와 호메이니의 사진을 교과서에서 찢어내거나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항쟁 중에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파업을 벌이자, 학생들이 그 교사들을 지지하며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죠. 학생들은 항쟁 중에 사망한 청소년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정권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시위 진압 병력을 학교에 투입했습니다. 이 병력은 학교 안과 운동장에서 최루탄을 쏘았습니다.
경찰은 시위 참가 학생·교사들을 색출하려고 학교에 CCTV 영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교장들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며 경찰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겁을 주려고 학교를 포위하기도 했습니다. 앤 동지가 말했듯이 많은 아이들이 항쟁 와중에 사망했는데, 많은 수가 그저 등·하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동·청소년의 항쟁 참가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문제는, 많은 문화권에서 청소년들을 수동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대개 미성숙하고 취약하고 의존적이며, 어른들이 정태적으로 예단해 놓은 욕구를 갖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항쟁에 참가하고 있는 아동·청소년들을 보면, 이들이 교육 상품화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그런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문제를 우려하며 ‘왜 교육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하는가’ 등의 물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아동·청소년기에 대한 동태적 이해는 학생들과 아이들의 능력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배우고, 세계를 경험하고, 권리 의식을 갖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탐색하는지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아동·청소년은 취약하기도 하지만 능동적이기도 한 존재인 것입니다.
앤 알렉산더의 발제: 노동계급의 구실
이제부터는 이번 항쟁이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진 다른 항쟁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안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란 노동자들은 ‘시위하는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을 형성해,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걸고 싸워 왔습니다.
몇몇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민주 노조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작업장 조직이나 파업 기구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조직들은 친정부 노동자 기구의 통제를 벗어난 조직들입니다.
석유 노동자, 교사, 제당 노동자, 테헤란 버스 기사들 같은 운수 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정권은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파업 조직자들을 투옥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파업을 부추긴 커다란 요인 하나는 계속 악화되는 보통 사람들의 경제 상황입니다. 경제 위기로 인해 생활 수준이 악화됐는데, 미국이 부과한 혹독한 대(對)이란 제재가 이를 더한층 악화시켰습니다.
이란 정권은 이것을 전적으로 서방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만, 많은 이란 노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동안에도 이란 지배자들이 갈수록 부유해지는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이란 정권은 ─ 그들의 반(反)서방 언사가 무색하게도 ─ 세계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행한 것과 비슷한 조처들을 도입했습니다. 고용 안정을 공격하고, 계약직을 크게 늘리고, 긴축을 시행하고, 공공 서비스를 삭감하고 민영화를 추진했습니다.
아랍 혁명의 경험
그렇다면 이 항쟁에서 노동자들의 구실이 왜 중요할까요?
중동·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다른 대중 항쟁들, 예컨대 2011년 튀니지·이집트·시리아의 혁명과 2018년 12월에 시작된 수단 혁명의 경험을 보면, 조직 노동자들의 개입이 국가 기구의 지배력에 균열을 내는 데에서 핵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튀니지·수단에서 거리 시위와 결합된 대중 파업은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등 중요한 성과를 얻어내는 데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습니다. 거리 시위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이뤄낼 수 없었습니다.
튀니지에서는 1주일에 걸친 지역적·전국적 총파업의 결과로 2011년 1월 14일에 독재자 벤 알리가 쫓겨났습니다. 그 전에 시위는 이미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었죠.
이집트에서는 2011년 2월 8일에 노동자들이 대거 파업을 벌여 수에즈 운하 등의 핵심 교통 시설, 통신망, 공공 서비스를 마비시켰습니다. 그 덕에 사흘 후인 2월 11일에 독재자 무바라크가 그의 장군들에 의해 끌어내려졌습니다.
수단에서도 수도 하르툼의 육군 본부 앞에서 벌어진 대규모 광장 점거와 단호한 시위에 밀려 2019년 4월 장군들이 독재자 오마르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두 차례 총파업을 벌이고 나서야 군부는 민간 정당들과의 협상에 겨우 나섰습니다.
반면 시리아에서는 대중 시위와, 나중에는 무장 항쟁이 벌어졌지만 정권에 맞선 대중 파업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시리아 정권은 더 수월하게 군사적 해법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권에 반기를 든 도시들은 포위돼 미사일과 폭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난민이 됐고 시리아의 많은 지역이 폐허가 됐습니다. 시리아의 반혁명은 이런 무자비한 탄압을 지지한 이란 정권의 지원하에 진행됐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역사도 같은 패턴을 확인시켜 줍니다. 수개월의 대중 시위에도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에 결정타를 날리고 군대를 위아래로 분열시켜 결국 왕정이 무너질 조건을 조성한 것은 대중 파업, 특히 석유 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이었습니다.
교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경험에서 이끌어낼 교훈이 무엇인지 일반화된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현재 이란의 항쟁과 노동자 투쟁의 관계가 아직 꽤 초보적 수준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노동자들이 항쟁의 요구에 연대를 표하면서 파업을 통해 항쟁에 나서고 있다는 징후가 있습니다. 교사 노동자들이 그런 사례입니다.
이란 정권은 이들이 제기하는 사회·경제적 당면 요구에 일정한 양보 조처를 내놓으면서 노동자 투쟁이 항쟁과 연결되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예컨대 일부 공공 부문 노동자들에게 임금 인상안을 제시하고 사용자들에게 체불 임금을 지불하라고 지시했죠.
노동자들에게 정권을 타도할 잠재력이 있다는 점은 많은 이란 활동가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을 그저 무기나 도구로 이용한다는 관점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전략이 단기적으로 정권을 약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봐야 합니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통해 주장한 것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평범한 이란인들의 요구를 성취하려면 정권에 맞선 정치 혁명만이 아니라 이란 지배 계급에 맞선 사회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요구나 여성 차별의 특정한 형태를 폐지하라는 정치적 요구를 성취하는 과정은, 아래로부터 사회를 진정으로 변혁하는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혁명적 과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례를 하미드 동지가 앞서 보여 줬습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겪는 차별의 다양한 측면들을 정권의 경제 정책과 연결 짓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사회 전반으로 일반화될 때, 우리는 혁명이 진정 ‘억압받는 사람들의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정권에 맞선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에 놓인 장벽들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는 조직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조직은 우리의 적이 자본주의 지배계급과 그들의 체제임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그 지배계급이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둘렀든,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맸든 말입니다.
또, 그런 조직은 서방 지배계급이 아무리 이란 정권을 증오한다고 말한들 그들도 이란 정권과 마찬가지로 같은 체제의 일부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란에서의 해방은 아래로부터로만 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란 밖에 있는 사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무자비하고 억압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평범한 이란인들에게 반드시 연대를 표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계속 건설해야 합니다. 체제 변화는 언제나 국내에서 시작됩니다.
앤 알렉산더의 정리
질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동지들이 이란 상황을 꽤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해 보겠습니다. 이란의 정치 체제와 그것을 낳은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죠.
이에 관해 발언하신 동지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진정한 대중 항쟁이었습니다. 사회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가 모두 제기됐고,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 행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란 혁명은 어떤 반동적 세력이나 호메이니 같은 지도자들이 획책하거나 처음부터 그들이 지배했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 동지의 다른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호메이니와 그가 건설하는 데 일조한 이슬람주의 조직들이 어떻게 결과적으로 새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혁명을 중단시켰는지 말씀해 주셨죠.
그것은 투데당[이란 공산당] 등 이란 좌파들이 새로 들어선 이슬람주의 정권에 맞선 노동자 투쟁을 제지하는 실책을 범한 탓이기도 합니다. 이런 노선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 하나는 호메이니의 반제국주의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란에서 일어난 대중 항쟁과 혁명은 중동에서 미국 제국주의가 행사하던 패권에 큰 타격을 줬습니다. 당시 [혁명으로 무너진] 이란 왕정이 미국의 주요 동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호메이니와 그의 동맹자들은 반제국주의적 언사를 이용해 국가 기구에 진입하고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했습니다. 그 지배계급은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발전 모델을 바탕으로 국가를 이용해 경제 발전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당시 호메이니와 그의 동맹자들이 혁명 운동을 공격하고 기층의 단결을 깨뜨린 방법의 하나가 바로 여성 차별 문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당시 일부 이란 좌파들이 여성들이 독자적 요구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히잡 강제 착용에 반대해선 안 된다거나, 여성들을 일터에서 쫓아내 양육자 구실만 하도록 강요하는 것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죠. 그런 요구보다 서방 제국주의, 즉 미국에 맞서 새 국가와 새 지배계급을 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재앙적인 실책이었습니다. 호메이니가 추진한 히잡 강제 착용의 반혁명적 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란 혁명 이후 여성의 삶
그러나 또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다른 질문과도 관련이 있는 얘기입니다. 이란 혁명 이후에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질문이었죠.
여성은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호메이니의 이데올로기는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란 정권은 남성들을 전선으로 보내야 했고, 여성들을 ─ 예컨대 공공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 ─ 일터로 불러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 두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란 여성들은 노동계급의 일부가 됐고, 혁명 이전보다도 더 큰 일부가 된 겁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의복 규정이 갖는 중요성이 있습니다. 의복 규정은 정권이 공적 영역과 일터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미드 동지도 지적했듯이, 이번 항쟁을 낳은 중요한 요인 하나는 이것이 낳은 거대한 모순입니다. 특히 한 세대의 젊은 이란 여성 전체가 그 모순을 날카롭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정권은 여성의 역할에 관해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만 동시에 그들을 일터에서 착취하고 그러면서도 강제적 실업으로 유의미한 노동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물론, 이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상당히 저조합니다. 세계적으로 비교하면 꽤 저조하고 중동 전체와 비교해도 꽤 저조합니다. 그럼에도 파업 교사들을 찍은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란 여성들은 이란 노동계급의 일부입니다.
한 동지는 이란 여성들이 일상에서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경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이란 여성들이 지난 40년 동안 집에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시위에서도 능동적이고 일터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지난 10~20년 동안 벌어진 다른 시위에서도 여성들은 최전선에 있었고 그러다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란의 항쟁이 이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변화는 여성의 오랜 저항이라는 바탕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방 개입은 재앙 낳을 것
마지막으로, 서방 정부들이 하는 구실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동지가 지적했듯이 서방 정부들은 이번 항쟁에서 어떠한 긍정적인 구실도 할 수 없습니다.
서방 정부들의 위선을 잘 보여 주는 많은 사례들이 제시됐는데,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미국·영국 등 서방 정부들은 여성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반동적인 사우디아라비아 정권과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바로 3일 전[1월 15일]이 살마 샤하브가 체포된 지 2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샤하브는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인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권리 실태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저는 서방의 개입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서방의 개입은 항쟁이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고, 스스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을 것입니다.
서방 정부들이 여러 방법으로 이란 상황에 개입하려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꼭 군사 개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컨대 왕정복고를 추구하는 자들처럼 반동적이고 우파적인 목소리를 내는 망명자들을 지원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란인 활동가들이나 페이먼 자파리 같은 이란인 학자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란 내에서 왕정에 대한 지지가 별로 강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019년 11월 이란에서 유가 보조금 삭감에 따른 연료비 폭등에 반발해 자생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을 때, 페이먼 자파리는 당시 시위에서 제기된 요구와 슬로건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 일부가 왕정 지지 슬로건을 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매우 소수였다고 합니다.
또 자파리는, 평범한 사람들 중 일부가 정권이 악마화하고 적으로 삼는 정치 세력의 언어를 차용해 정권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그런 구호가 나왔던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왕정에 대한 지지가 광범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죠.
노동계급 저항과 국제 연대
여기서 다시 조직된 노동계급의 중요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노동계급이 독립적으로 조직돼 있을수록, 또 그들이 이란 지배계급과 국가 기구의 지배력을 마비시키고 분쇄할 조직적 저항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할수록, 왕정복고주의자들 같은 우익 세력이나 항쟁의 편을 자처하며 위선을 떠는 서방 정부들 같은 엉뚱한 세력이 항쟁을 자기들 뜻대로 끌고 가는 일을 더 잘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활동가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벌인 활동을 지속하면서 한국의 노동자 조직들에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국 정부에 맞서는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과 좌파 단체들의 국제적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란 정부도, 이란 정부와 대결하는 다른 정부도 아닌, 다른 대안이 있음을 이란인들이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연대와 국제주의를 고취하는 것이 이란인들을 돕는 길입니다.
예컨대 한국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 이란의 교사 노동조합과 학생들에게 간략한 연대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란인들에게 매우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하미드 동지와 같은 이란인 활동가들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이란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