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반정부 시위의 배경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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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시위가 2주 넘게 이란을 뒤흔들고 있다. “여성, 삶, 자유”를 외치는 시위대는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정권에 반대하고 있다.
시위를 촉발한 것은 한 젊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적 행실을 단속하는 ‘지도순찰대’ (율법 경찰)에 구금된 후 의문사한 사건이었다.
22세였던 쿠르드계 마흐사 아미니는 순찰대에 구금된 후 혼수상태에 빠져 9월 16일 사망했다. 유족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미니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순찰대에 끌려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고 말했다.
‘지도순찰대’의 탄압은 악명 높다. 길거리에서 행인들의 옷차림을 단속하며 뺨을 때리기도 하고, 폭행도 수시로 자행한다.
이란 정권은 지난 수년 동안 ‘지도 순찰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며 율법을 강요해 평범한 이란인들의 삶을 더 옥죄어 왔다.
대규모 시위에 이란 정권은 탄압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영 방송이 발표한 사망자 수만 41명(10월 1일 기준)이며, 현지 활동가들은 그 수가 실제 훨씬 더 많다고 전한다. 정권은 인터넷도 차단하며 시위 확산을 저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정권이 강요하는 “공포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한다. 수도 테헤란과 주요 대도시들을 포함해 이란 전역의 도시 수백 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시위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이란 정권의 오랜 억압의 역사와 경제 위기가 있다. 이란 정권은 반대파를 수감시키고 암살하는 등 민주적 자유를 매우 제약해 왔다.
현 이란 정권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집권해 반(反)서방을 자신들의 정당성 기치로 내세우며, 이슬람 율법을 앞세워 민주적 권리를 억압해 왔다.
하지만 8800만 전체 인구의 절반이 33세 미만으로, 오늘날 이란인들의 다수는 1979년 혁명의 경험이 없다.
이에 더해, 세계은행의 통계를 보면 이란의 청년 실업률은 2021년 기준 27퍼센트에 이른다. 여기에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해 의약품 등 기초 생필품조차 부족해 평범한 이란인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높은 실업률, 서방의 제재, 경제 위기, 물가 폭등과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과 억압이 복합적으로 현 시위의 배경에 얽혀 있는 것이다.
서방의 편견
한편 서방 정부와 주류 언론들은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찬양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위에 나선 용감한 이란의 시민들과 여성들을 지지한다”.
이것은 서방이 평범한 이란인들의 삶과 민주적 권리에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이 중동과 인근 지역에서 어떻게 관철될 수 있을지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란에 제재를 가해 왔다.
이로 말미암아 기초 의약품을 포함한 수많은 품목이 이란으로 수출되지 않아 평범한 이란인들의 삶에 고통이 배가됐다. 바이든 하에서도 이란 제재는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이란을 계속 압박하는 이유는 이란이 이스라엘과 달리 미국 주도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 정권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을 지원해 왔다.
그래서 서방의 지배자들과 주류 언론들은 현 반정부 시위를 친서방-반이슬람 성격을 띤 시위로 포장하며 지지 언사를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현 이란 정권이 약화되고, 더 나아가 친서방 정권으로 교체되기를 바란다.
서방의 주요 언론들은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히잡 착용에 반대하고 이슬람 종교에 반대하는 시위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은 후진적이며, 여성 억압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다.
한국 주류 언론들의 묘사도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는 부정확한 묘사다. 이 시위는 다양한 억압·차별 쟁점들이 근저에 놓인 저항이다.
시위대는 이제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고 있다. 또한 여성이든 남성이든 무엇을 입거나 입지 않을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슬람 종교에 반대하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과 비교함
그렇다면 대체 서방은 왜 이토록 이란 정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미국 등 서방에게 1979년 이란 혁명과 현 이란 정권의 집권은 중동 지배 질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핵심 산유국이자 친미 독재 왕정이었던 이란의 샤 왕정이 대중 혁명으로 타도됐고, 반서방과 반미를 내세운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집권했다. 미국은 이란 혁명이 중동의 다른 국가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혁명 당시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집권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석유, 철도, 항만 등 핵심 부문에서 강력한 파업이 일어나 샤 왕정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노동자들은 경제적 요구를 걸고 파업에 나섰지만, 점차 “계엄령 해제, 모든 정치수 무조건 석방, 석유 산업의 국가 통제, 여성 노동자 차별 철폐”와 같은 정치적 요구를 포함시켰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선출한 공장위원회와 민주적 권력 기구 “쇼라”가 곳곳에서 건설됐다. 하지만 호메이니의 임시 정부는 “쇼라”가 비이슬람적이라고 공격했다.
그럼에도 당시 이란 좌파는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을 반제국주의적 세력으로 보고, 이들의 집권이 진보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상당수 좌파는 노동자 혁명을 무한정 뒤로 미루는 단계론적 혁명관에 기초해 호메이니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했다.
호메이니와 그를 지지한 중간계급 상인들, 성직자들은 좌파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할 수 있었다.
이란 좌파의 실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9년 3월 호메이니가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법률을 선포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이란 좌파는 이 여성들이 중간계급과 상류층 소속이라며 좌파 지지자들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는 좌파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란 좌파는 사실상 와해됐다.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이래로 노동운동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매년 노동쟁의 건수가 증가하고, 파업의 규모도 커졌다.
그뿐 아니라, 고등교육 진학이 늘어나면서 대학가에서 학생 운동이 활발해졌다. 때로는 정권의 거센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좌파 서클들도 새로 생겨났다.
지금 거리에서 용감하게 반정부 시위에 나서는 많은 이들도 젊은 학생과 청년들이다. 이들이 주축이 돼 다양한 피억압 집단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쿠르드족이 주로 거주하는 이란 북서부 지역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 희생자 아미니가 쿠르드계인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쿠르드족은 이란 정권으로부터 오랜 차별과 억압을 받아왔다.
다만, 이 시위에는 아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더 광범한 서민층 대중의 참가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분석하면서,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결합을 강조했다. 즉, 혁명기에는 대중이 정치적·시민적 요구뿐만 아니라, 경제적 요구를 결합하며 투쟁을 더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이란에서도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부터 집단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정권에 커다란 압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