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협약 비준으로 전교조·공무원노조 인정?:
정부 자신이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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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 의사를 밝혔다. 핵심협약에는 결사의 자유·단결권·단체교섭권 관련 협약(87, 98호)이 포함돼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정부가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마치 노동계에 대단한 선물 보따리를 내놓은 양 말이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은 이미 오래전에 비준했어야 마땅한 협약이다. 187개 회원국 가운데 4개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 중국, 마셜제도, 팔라우, 통가, 투발루 등 6개국뿐이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비준을 약속한 것이 처음도 아니다. OECD 가입,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에 출마할 때 비준 약속을 해놓고 이행하지 않았다.
문재인은 대선 전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합법화 문제 즉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선 후 태도가 달라졌다. 법외노조 철회 대신 ‘대법원 판결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전교조가 지도부 단식 농성, 조합원 연가 투쟁까지 벌였지만,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공무원노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는 공무원노조의 설립 관련 협의에서 규약 개정(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관련)을 요구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도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해직자를 배제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공무원노조 지도부는 이런 부당한 요구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공무원노조 설립 신고 인정은 정부가 의지가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ILO 협약 비준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결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은 줄이고 책임은 떠넘기는 전략이요,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보다 시간을 끌겠다는 계산일 수 있다. ILO 협약 비준은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고, 관련 국내법도 개정돼야 한다. 그런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ILO 협약 비준을 추진하더라도 정부는 지금 당장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철회하고, 공무원노조 설립 신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익의 눈치를 보며 적폐 청산과 기본권 보장의 문제를 차일피일 미룬다면 ‘촛불 정부’의 자격이 없다. ILO 협약 비준에 대해 정의당이 이러한 정부 태도의 모순과 무책임을 지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환영 논평을 낸 것은 아쉽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 정책이 말만 번지르르하지 실속은 형편없다는 점을 수차례 보아왔다. 비정규직 대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도 위안부 합의안에 대한 절충적 태도(말은 ‘피해자 중심’ 접근이라면서도)로 피해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말로는 ‘노동 존중 사회’를 표방하지만, 오히려 조속한 적폐 청산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이는 이영주 전 사무총장을 체포해 구속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합법화는 사회적 여론과 계급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민감한 쟁점이다. 김대중 정부는 전교조 합법화 카드를 파견법, 정리해고법 등을 민주노총에 수용하도록 요구하는 데 사용했다.
문재인 정부도 근로기준법 개악, 직무급제 도입 등 정부의 주요 노동개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전교조·공무원노조 합법화 문제를 활용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노동조합(지도자)과의 대화를 통해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 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동운동 진영은 ILO 협약 비준을 마냥 환영하고 정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다가 스스로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 정부가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독립적인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는 ‘지금 당장 합법화하라, 공을 딴 데로 넘기지 말고 정부가 책임지라’고 요구하며, 투쟁을 지속·확대해 나가야 한다.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의 규약시정명령을 단호히 거부하며 투쟁했지만, 아쉽게도 법외노조 조치에까지 완강히 저항하지는 못했다. 진보교육감과의 협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 교원노조법 전면 개정이라는 (당시로서는) 우회적인 합법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부와의 대결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ILO 협약 비준과 국회 논의에 발목 잡히지 말고, 앞으로도 이런 투쟁을 더 확대해 나가야 한다. 거대한 대중운동이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렸듯이, ‘촛불 정부’하에서의 진정한 개혁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