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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양적완화 축소를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지배자들

유럽 지배자들은 양적완화를 마무리할 계획을 발표했지만 자칫 경제적·정치적으로 새로운 위기를 촉발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는 14일 계획을 발표하면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고 누차 말했다.

양적완화는 경기부양책의 일종으로, 중앙은행의 통상적인 금리 인하 정책으로는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주요 은행에 직접 화폐를 주입하는 특단의 정책이다. 2008년 경제 위기가 닥치자 여러 국가들이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유럽 지배자들은 경제 성장을 유지하려고 양적완화 종결 계획을 발표했지만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출처 유럽중앙은행

그런데 미국은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며 2014년에 양적완화를 종료했고 최근에는 금리도 잇따라 올리고 있다. 미국의 이런 행보는 유럽도 양적완화를 종료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유럽연합이 기껏 돈을 풀어 봐야 그 돈은 금리가 높은 미국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 유로화의 가치가 지나치게 낮아질 수 있다. 그리 되면 지금도 불충분한 유럽 경제의 회복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유럽 지배자들은 우려한다. 그래서 양적완화 ‘출구 전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 지배자들은 양적완화 종료가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도 우려한다.

양적완화를 멈추는 것이 되레 경제 회복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양적완화를 종료하고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자 기업들의 파산 신청이 크게 늘어난 바 있다. 유럽은 미국보다 경제의 회복세가 약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이런 딜레마는 2008년에 경제 위기를 촉발한 낮은 이윤율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데서 생겨난다. 불투명한 경제 전망 탓에 자본가들이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중앙은행이 돈을 푼다고 해도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수익성이 낮지만 소생하지도 않고(이윤율이 계속 낮으니까) 파산하지도 않는(돈을 빌려 부도는 막으니까) ‘좀비 기업’들이 늘었다.

즉, 양적완화는 병을 치료하지는 못 해도 “생명 유지 장치” 구실은 해 왔다. 이를 섣불리 제거했다가는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양적완화를 하면서 정부와 기업 부채가 몹시 커진 것도 부담이다.(더 자세하면서도 쉬운 설명으로는 조셉 추나라, ‘장기 불황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21》 22호를 권한다.)

유럽 지배자들은 정치적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바로 유럽연합이 평범한 유럽인들에게 지독하게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평범한 유럽인들에게 ‘시장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는 얘기는 다른 별의 얘기처럼 낯설다. 경제가 회복하고 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10년 가까이 그들이 들은 말은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것뿐이었다.

유럽 지배자들이 풀었다는 돈은 평범한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돈의 태반은 독일이나 프랑스의 은행들을 보호하고, 생산적이지 않은 투자에 쓰였다.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은행들이 오히려 재무건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정부들에 복지 삭감을 요구하고, 기업들에 임금 삭감을 요구하고, 집을 압류해서 사람들을 내쫓는 것이 일상이었다.

‘돈을 너무 풀었다’는 유럽 지배자들의 생각과 ‘돈이 너무 부족하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볼 수 있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미친 체제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더욱이 이런 모순은 이미 수년 동안 정치적 폭풍을 낳아 왔다.

굵직한 것들만 나열해도 2015년에 그리스에서 좌파 개혁주의 정당인 시리자가 집권한 것(그러나 불과 몇 달 만에 유럽연합에 굴복했다), 2016년 영국이 국민투표로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것, 2017년 프랑스·독일 선거에서 주류 양당의 지지율이 대폭 쪼그라든 것, 2018년 이탈리아에서 오성운동 등 우익 포퓰리스트 세력이 집권한 것을 들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유럽연합이 긴축을 강요하고 경제 위기의 고통을 떠넘겨 온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수십 년 동안 유럽연합을 추종한 기성 정당들을 심판하려는 의사를 보였다.

유럽연합의 양적완화 축소 계획은 이런 불만을 더 키울 소지가 있다. 유럽연합이 국채 매입을 줄이면 각국 정부가 돈을 마련하는 것이 더 어려워져서, 재정을 더 옥죄야 한다는 긴축 압력이 더 커질 것이다. 그럴수록 ‘유럽연합이 더한층 우리를 못살게 군다’는 사람들의 불만은 커질 것이고 정치 위기와 불안정도 더 커질 것이다.

최근 G7 정상회의에서 표출된 세계적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2008년의 경제 위기와 뒤이은 장기불황이 정치 위기를 낳고, 그 정치 위기가 다시금 지배자들의 경제 정책 역량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