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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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문재인 정부의 우경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노동자 연대〉 225호 기사에서 김문성 기자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불충분하고 그나마 후퇴하고 있으며 심지어 개혁을 공격해 도로 빼앗아가고 있다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최저임금 삭감법 통과,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방식(자회사 고용 등) 고수, 근로기준법 개악해 장시간 노동 관행 합법화, 양승태의 사법거래에 침묵, ‘전교조 노조 아님’ 통보 철회 거부, 국민연금 개악 기회 노리기, 학생들에게 여전히 입시 부담을 지울 대입제도 개편안, 간판만 바꾼 기무사 개혁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북 사업가 구속, 미적거리는 몰카 방지 대책 등.
문재인 정부가 (평범한 대중의 염원인) 개혁보다는 (지배자들의) “통합”에 치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례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행보를 보면,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명언이 실감 난다.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소속 대통령 김영삼(1993∼1997년 재임)이 맨 처음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원작자는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만큼 오래된 말이다.
김영삼은 ‘개혁가’를 자처했지만, 일부 인적 청산(군부 내 엘리트 사조직인 ‘하나회’ 해산 같은)만을 했다.
더 중요한 개혁인 법·제도 개혁은 구질서 수혜자들의 적대에 부딪혀 거의 하지 못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측(수구 세력)은 이해관계 때문에, 살기를 드러내며 강하게 저항했다.(김영삼이 한 거의 유일한 ‘제도 개혁’인 금융실명제는 노동계급의 이익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에서 뿌리 깊게 형성돼 온 관행의 개선(비제도적인 부분으로, 가장 어려운 종류의 개혁)은 손도 못 댔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 교체로 등장했는데도 인적 청산마저 미흡하다. 대표적으로, 김동연 같은 시장 지향적 관료가 경제 수장이다.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같은 일부 제도들은 박근혜 정부 이전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달리 말해, 이명박 정부 시절로 돌아갔다.
난장판인 자본주의
개혁을 제공하겠다던 정부가 그 약속을 배신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번에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당시 민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민영화, 한미FTA, 규제 완화, 비정규직 양산, 노동자 대량 해고 등)을 추진하고, 제국주의적 전쟁(조지 부시 2세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해 한국군을 이라크 등 중동 지역에 파병했다.
왜 대중에게 개혁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해 집권한 정부가 개혁을 배신하는 일이 반복되는가?
개혁은 기존 질서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자는 것이다.(반면, 혁명은 기존 질서를 분쇄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자는 것이다.)
‘개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은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한다. 혁명을 통한 세계 변혁은 공상일 뿐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민주적으로 개혁해 가면 평등과 민주주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개혁주의자들의 전략은 20세기 내내 실현되지 못했다. 전형적으로,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 전략을 추진했다. 하지만 집권하면 오히려 어김없이 노동계급을 공격했다.(문재인 정부는 사회민주주의 개혁 정부도 되지 못하는, 자본가 계급의 개혁주의 정부이다.)
가장 최근 사례는 그리스 시리자다. 시리자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으로,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적 전쟁을 지지한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다를 것이라는 광범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시리자는 집권(2015년 초) 반 년 만에 여느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을 공격하면서 흔한 개혁주의 정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사례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해서 노동계급 등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기는커녕, 반대로 그런 전략을 추진한 개혁주의 정당이 체제의 포로가 될 뿐임을 재확인시켰다.
자본주의는 무계획적이고 난장판이다. 이윤 추구는 비합리적이며 모순된 결과를 낳는다. 2011년 후쿠시마 핵 재앙은 핵발전 확대 정책을 추진해 온 일본 정부와 이윤을 위해 기본적인 안전 설비조차 마련하지 않은 도쿄전력이 만든 인재였다. 2009년 쌍용차가 265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던 날 쌍용차 주가는 주식시장에서 상한가를 쳤다.
또, 자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저절로 붕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체제가 위협당할 때는 무솔리니(이탈리아 파시스트), 히틀러(독일 나치), 피노체트(칠레 군부 독재자) 같은 독재자들을 내세워 체제를 수호했다.
지배계급은 결코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리면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핵 전쟁의 위험도 불사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말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대지 위에 ‘합리적인’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늪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무역전쟁
당면해서는, 엄습해 오는 경제 위기의 심화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빠른 속도로 개혁을 배신하고 우경화하고 있다.
2008년 경제 공황은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만큼 재앙적이지는 않았지만(1931년 독일과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였고, 세계경제 생산량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현재의 경제 회복은 1930년대보다 더디다.
그나마 이 더딘 회복도 트럼프가 촉발한 무역전쟁이라는 새로운 장애물에 부딪혔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전면적인 무역전쟁이 벌어지면, 세계 무역이 70퍼센트가량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세계 성장의 절반을 파괴할 수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은 수출 지향적인 한국 경제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희생시켜 자본가들의 이윤을 지켜 주는 쪽으로 신속하게 가닥을 잡았다. 사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일들의 일부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그룹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해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보다 더 많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가져간다고 지적했다. “1995∼2014년 평균 실질임금이 생산성 증가를 고스란히 따라갔다면 2014년 말에는 평균 실질임금이 13퍼센트 인상됐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기존 기구들, 특히 국가기구들을 통해 개혁을 제공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근원적인 문제들에 부딪힌다.
자본주의 국가는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변화일지라도) 변화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국가는 껍질을 벗겨도 가만히 있는 양파가 아니다. 국가는 호랑이 같은 것이다. 1930년대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 R H 토니는 이렇게 말했다. “양파는 한 꺼풀씩 벗겨서 먹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호랑이의 발톱을 하나씩 뽑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호랑이에게 먼저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국가 기관은 대부분 비민주적이다. 판사, 군 장성, 국정원장, 검찰총장, 고위 공무원, 고위 경찰, 공기업 사장, 교도소장 등 국가 기관(장)들이 대다수 국회의원들보다 노동자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법을 해석하고, 규칙을 만들고, 경제 활동에 영향을 미치며, 공무원 노동자나 교사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며,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비민주성이 민주주의를 압도한다.
이는 기존 국가가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사용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 기구가 아니다.
물론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노동계급의 일부다. 그러나 결정은 이들이 내리지 않는다. 사병은 자신이 어디에서 싸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사병이 장교의 명령이 아니라 국회의원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명령 불복종이다.
그래서 국가 기관들의 가장 비민주적인 특징만을 제거하면 된다거나, 국가 기관에 침투해 그 기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심각한 오류다. 국가 기관들은 해체돼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권력 기관들로 대체돼야 한다.
혁명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노동계급에 이롭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혁주의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이런 견해가 옳음을 확인시키고자 한다.
그러자면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투쟁에 의지할 수 있도록 고무해야 한다. 그것이 당면한 개혁을 성취하는 데서도 가장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