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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탄생 150주년 기념:
개혁을 위한 투쟁은 혁명적 근육을 기르는 수단이 돼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사상에 맞서 투쟁하며 혁명을 옹호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정밀 타격해 마르크스주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주의에 기여한 바를 김인식이 살펴본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5일 폴란드의 소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고, 1918년 독일 혁명에서 사회주의 투쟁을 이끌었다. 1919년 1월 15일 혁명을 반대한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 지도부의 사주를 받은 자유군단(우익 의용군)에 체포돼 살해됐다.

1919년 6월 13일 룩셈부르크 장례 행렬 1월 15일 살행당한 지 거의 다섯 달 만에 시신이 발견되면서 장례가 치러졌다. 사진 배너에는 룩셈부르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쓴 기사(‘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에 있는 문장인 ‘나는 있었노라, 나는 있노라, 나는 있으리라!’가 씌어 있다

스탈린주의 전통에서는 룩셈부르크가 자발성을 강조하며 조직을 평가절하했다고 부당하게 깎아내린다. 이 때문에 얄궂게도 혁명적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자들이 반스탈린주의적(더 정확하게는 반레닌주의적) 맥락에서 룩셈부르크를 개혁주의적으로 채색하며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그람시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 전통에 있는 위대한 혁명가다.

중서부 유럽의 정치 환경

개혁주의 사상에 맞선 투쟁은 룩셈부르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물론 러시아 혁명가들인 레닌과 트로츠키도 개혁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개혁주의의 뿌리가 허약했다. 시베리아나 교수대 같은 국가 탄압이 모든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를 짓누르는 나라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꿈꾸기는 어려웠다. 노동조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곳에서 노동조합을 노동운동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할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중서부 유럽은 상황이 달랐다. 보수적 개혁주의가 훨씬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사상과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 독일 사민당의 당원은 50만 명이었고, 노동조합원은 125만 명에 이르렀다. 이런 환경에서 활동한 룩셈부르크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일찍 노동 관료에 대해 더 명확한 견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07년 독일 사민당 집회에서 연설하는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는 1898∼1899년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썼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이정표가 됐다. 책 제목에서부터 혁명적 정치와 대비되는 특정 정치 운동으로서 개혁주의의 존재를 지목한다.

물론 책 제목만 보고 룩셈부르크가 개혁을 반대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까 봐 룩셈부르크는 서문에서 개혁과 혁명 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함을 분명히 밝힌 뒤 주장을 개진한다.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며, 사회 혁명은 목적이다.” ‘노동자연대’ 기본입장은 ‘개혁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이 책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정면 비판했다. 룩셈부르크는 이제 막 독일에 정착한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 혁명가였고, 그가 비판한 상대인 베른슈타인은 사민당의 중견 이론가였다. 당시 독일이 여성에게 선거권조차 허용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룩셈부르크가 얼마나 당찬 혁명가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주의의 요지와 배경

베른슈타인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길들여지고 합리적인 제도가 됐다. 20년 넘게 번영하면서 마르크스의 10년 주기 위기론도 틀렸다. 1870년 이후 발칸을 제외하곤 유럽 땅에서 전쟁이 없었다. 노동운동은 이제 불법이 아니다. 사민당은 선거에서 점점 승리하고 있다. 노동조합도 강화되고 임금은 상승하고 있다. 따라서 혁명 없이 개혁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협력해 사회주의로 점진적 이행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를 배격하고 “독일 민족의 영예로운 임무” 따위를 강변했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노동자 국가) 개념이 “구닥다리”라고 비판했다. 이 개념이 스탈린주의에 의해 압제 정치로 오염돼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받기 훨씬 전에 그랬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자신이 기여한 결정적 개념이라고 밝힌 바 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사활적 전략이 됐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시 독일 사민당의 지배적 분위기를 나타낸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에는 모순이 있었다. 국가 탄압 때문에 급진적 야당의 성격을 유지해야 성장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정치적 행동에서 급진적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원칙에서는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이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단체탄압법이 폐지되자 사민당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실천에서는 더 많은 의원을 배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이를 두고 사민당 내에서 진지한 토론은 없었다. 사민당 사무총장 이그나츠 아우어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고 행할 뿐이다” 하고 말했다. 사회주의적 강령보다 실천이 훨씬 더 사민당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정당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제 노동조합 운동의 기회주의 조류들과 선거 득표에 대한 집착이 사민당 기구들에 만연했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관료적 보수주의를 대변했다.

룩셈부르크의 베른슈타인 비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정책들이 노동계급에 이로운 개혁들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그 개혁들을 얻을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무장 해제시킨다고 비판했다.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을 비판한 내용은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 방법, 경제학, 국가 문제, 노동자 운동.

방법

룩셈부르크는 먼저 베른슈타인의 방법을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이 변증법을 거부하고 절충주의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소비자 협동조합 가게에서 계피나 후추의 무게를 재듯이, 베른슈타인이 사회 개혁과 혁명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계속 비교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강조했듯이,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은 투쟁과 모순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변화의 힘을 이해하거나 그 변화를 지도할 수 없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변증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에 이론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했다.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이론을 ‘교조’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혁명가들은 몽상적이고 자신들이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는 자본주의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개선하고 구조를 바꾸고 미래를 실험하자.’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정부들이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를 전혀 손상시키지 못하고 거듭 실패했다고 반박했다.

경제학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경제가 적응력을 키워 위기 없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저에 있는 모순을 밝힘으로써 위기가 재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베른슈타인이 틀렸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10년 주기 위기론’에 대해서도, 룩셈부르크는 ‘10년 주기’는 “순전히 외적이고 우연한 현상”일 뿐이고 위기는 자본주의의 경제 주기에서 필수적 일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1900년에 발생한 세계 경제 위기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증했다.

룩셈부크르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 규정도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 개념을 생산관계에서 소유관계로 뒤바꾸고” 자본가를 “생산 범주”가 아니라 “소유권 범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법률적 형태가 아니라 생산관계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열쇠임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일부 좌파가 자본주의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사회주의를 국유화로 잘못 이해하고는, 중국과 북한 등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이다.

자본주의 국가 문제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가 확대되면 의회에서 노동자 의원이 다수가 돼 사회주의로 평화롭게 이행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더욱더 직접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봤다.

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 형태를 취할지 아닐지는 특정 시기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미국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한 조건에서 번성한 것은 맞지만,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강화한다. 형식이 바뀔지 몰라도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면 자본주의는 그 형식(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1930년대 나치 독일이나 1973년 칠레 쿠데타 등에서 그런 사례를 봤다.

그렇다고 해서 룩셈부르크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가치 없다는 식으로 초좌파적 결론을 내린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을 던져 주지만,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는 필수적이라고 룩셈부르크는 주장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데 사용하게 될 정치 형태들(자치, 선거권 등)을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국가의 구실이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가 경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에도 개입해 통제를 늘려 간다는 것이다.

복지의 도입·확대가 그런 사례다. 룩셈부르크는 노동계급의 이해와 사회 발전이 일반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와 대체로 충돌하기 때문에 국가가 사회 발전에 필요한 기능들을 떠맡는다고 지적했다.

당시만 해도 복지 국가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룩셈부르크는 복지 국가의 등장을 사회주의의 도래로 보는 개혁주의자들의 문제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초좌파주의적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을 지키고 확대하는 것을 노동자 투쟁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다.

룩셈부르크는 국민 자본주의의 수호자로서의 국가와 경제 체제의 국제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지적했다. 사실, 이 점은 국민경제의 틀 내에서 개혁을 지향하는 개혁주의 정부가 부딪히는 근본적 한계다.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부하린(《세계경제와 제국주의》)과 레닌(《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이 이런 모순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그 무렵 자본의 집중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형태를 취했는데, 룩셈부르크는 이것들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줄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 커다란 혼란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했다. 신용의 발전도 베른슈타인의 주장과는 달리 위기를 약화시키기보다 그 위험을 강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룩셈부르크 시대 이래 계속되는 대형 무역 갈등과 경제적 충돌은 이런 진단을 확증해 준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군국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지적했다. 군국주의가 국가 간 경쟁에서 국민적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 수단이고, 자본과 국가 방위를 위한 자극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병폐”다.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15년 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룩셈부르크는 군비 지출이 특정 시기에 경제를 자극하면서도 궁극으로는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도 잘 묘사하고 있다.

노동자 운동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자체가 변화의 수단(의회 등)을 제공했고 노동자 운동이 이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다음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나에게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노동조합원이 계속 증가하고 사민당에 투표하는 것이 필요한 전부라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이 “필수불가결”하지만, 자본가들의 모든 이윤을 점진적으로 장악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운동을 “시시포스의 노동”으로 묘사했다. 이 표현은 노동조합 운동을 단순히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작고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시시포스의 근육이 틀림없이 튼튼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룩셈부르크의 지적은 전략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한편에서는 노사 대표자들의 협상을 통해 영구적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개혁주의 사상을 반박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전복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신디컬리즘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정치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예지적인 주장을 했다. 수정주의를 따르면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혁이 될 것이라고 옳게 예측했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 혁명 대신에 그리고 그것과 대비시켜 입법 개혁이라는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목표를 향한 더 평온하고 느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1919년 베를린의 대중 시위 플래카드에는 ‘모든 권력을 노동자·병사평의회로’라고 씌어 있다

개혁주의의 근원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독일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룩셈부르크의 운동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했다. 1898년과 1899년, 특히 1901년에 베른슈타인의 이론은 독일 사민당 당대회에서 철저하게 반박당했다.

사민당의 핵심 지도자인 카를 카우츠키도 처음에는 룩셈부르크를 편들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1910년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지향성이 독일 사민당 내에서 주변화되도록 작업했다. 이 무렵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노동계급이 권력에 이르는 길을 놓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다.

그 결과, 독일 사민당은 점차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개혁주의자, 말로는 급진주의를 유지했지만 의회적 투쟁 방식에 머무른 카우츠키가 이끄는 중간주의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진영 등 세 경향이 존재하게 됐다.

원천

아무튼 독일 사민당 안에서는 혁명적 입장이 최종 패배했다. 이것은 기회주의의 뿌리가 룩셈부르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숙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기회주의 이론이 “우리 당에 들어 온 프티부르주아 요소가 우세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외부로부터의 감염은 쉽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개혁주의를 발명하지 않았다. 베른슈타인은 개혁주의를 출판한 잘못만 저질렀을 뿐이다. 이그나츠 아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사민당 내 혁명적 좌파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알렉산드르] 파르부스 때문에 조용해진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들이 설파한 엄격한 전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단 한 명도 없다.”

개혁주의의 뿌리는 두 원천이 있었다. 첫째, 베른슈타인은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이었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들은 4000명에 이르는 독일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였다. 이것은 개혁주의적 오염의 주된 원천이 사민당 조직 밖이 아니라 그 조직의 핵심에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개혁주의가 프티부르주아지나 노동조합 관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관료가 노동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민당의 타락 과정은 지속됐고,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 황제를 편든 1914년 8월 4일에 극도에 달했다.

불균등

룩셈부르크도 이런 사민당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수정주의의 원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에 이론적으로 도전하는 것에 더해 그 주장에 맞서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론적 비판과 대중 투쟁의 급진화 효과가 결합되면 개혁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룩셈부르크는 (너무 늦게까지) 사민당이 아닌 다른 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잘못됐다. 무엇보다, 노동 관료 집단의 특수한 이해관계와 지위가 사민당을 혁명적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18∼1923년 독일 혁명에서 입증됐다.

둘째,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대중에 대한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즉, 노동자 대중이 투쟁 경험을 통해 과거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은 훨씬 불균등하다. 그래서 혁명적 대안은 혁명적 소수를 조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레닌주의 노선에 따른 혁명적 정당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룩셈부르크는 개혁과 혁명의 관계를 분석해, 노동계급이 벌이는 일상적·구체적 투쟁에 정치적 의미와 중요함을 부여했다. 또, 룩셈부르크는 노동운동의 주류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반대했다. 종파주의에 맞선 룩셈부르크의 투쟁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안착된 한국의 노동운동 속에서 활동하는 혁명가들에게 초석이 될 수 있다. 개혁주의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개혁주의에 맞서 원칙 있게 투쟁하자.

[더 읽을 거리]

*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마이크 곤살레스, 이언 버철, 샐리 캠벨, 에스미 추나라, 크리스 뱀버리, 책갈피, 2015, 352쪽, 14000원

* 《사회민주주의 전통과 사회주의》, 최일붕, 노동자연대, 2015, 71쪽, 3000원

*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토니 클리프, 책갈피, 2014, 160쪽,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