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와 실상 ―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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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스웨덴 총선에서 파시스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극우 정당인 민주당이 약진했다. 민주당 성장의 한 요인은 주류 정당들의 이민자 배척 정서 부추기기였다.
그런데 국내에서 스웨덴을 대안 모델로 소개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사회민주당이 이민자 배척 정서에 타협한 덕분에 재집권을 할 수 있었다고 기회주의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극우가 성장하는 또 다른 배경은 불평등과 빈곤의 급속한 증가이고, 여기에 사회민주당의 책임도 크다. 이 글은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에 대한 신화에 도전하며 그 실정을 소개한다.
필자인 마데레이네 요한손은 스웨덴 출신으로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이다. 아일랜드 ‘사회주의 노동자 네트워크’ 회원이며 사우스더블린 주의회 의원이다.
이 글은 2012년 가을 《아이리시 맑시스트 리뷰》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옮긴이와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삽입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와 긴축의 시대에 당신은 ‘노르딕 모델’은 이렇게저렇게 다르고 스웨덴은 나머지 유럽 곳곳에 빠르게 퍼지는 듯한 위기를 피하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들을 것이다. 2011년 10월 아일랜드의 진보적 경제 싱크탱크인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 싱크탱크’
스웨덴 등 노르딕 모델의 실상은 흔히들 생각하는 ‘지상천국’과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고, 실업률이 높고
복지국가의 기원
주류 친자본주의 평론가들은 노르딕 모델의 등장을 북유럽 사람들의 유전적 기질 때문인 듯 말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스칸디나비아적 심리가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적 탐욕보다는 평등과 조화와 동반자 관계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보통 선거권을 지지한 요한 아우구스트 그리펜스테트 같은 자유무역 선호 자유주의자들의 등장과 함께 1800년대 말 산업화 시기에 복지국가가 시작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노르딕 모델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스웨덴 경제와 역사를 간략히 살펴봐야 한다. 스웨덴의 산업화는 매우 뒤늦었다. 19세기 초중반까지 스웨덴은 빈곤이 만연하고 많은 사람이 해외로 이주하는 극도로 낙후한 나라였다. 1848년 기근 이후 1860년대부터 1920년까지 100만 명이 스웨덴을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남부 시골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었고, 종교적 난민과 부랑자도 있었다.
1800년대 말 수출이 크게 늘기 시작했는데, 주요 수출품은 철광석과 목재였다. 원자재는 주로 영국과 독일 같은 산업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들로 갔다. 그 나라들은 수천 킬로미터의 철로를 깔고 공장 기계를 만드는 데 양질의 철과 목재가 필요했다. 철광석은 팽창하고 있던 방위 산업에서 새로운 무기들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 수출 시장의 성장은 스웨덴 산업 발전의 속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 스웨덴은 공식으로는 중립을 취했지만, 해외의 무기 제조업을 위한 원자재 수출을 계속했다. 노동계급 남성 수백만이 끔찍한 전쟁의 참호 속에서 죽어 가는 동안 스웨덴 자본가들은 철광석 등을 판매해 이윤을 벌었다.
1929년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스웨덴 자본에 대단히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업가이자 금융업자였던 이바르 크뤼게르의 광활한 ‘제국’이 붕괴했고, 크뤼게르는 파리에서 자살했다. 이는 스웨덴과 미국 경제의 위기를 가중시켰고 계급투쟁이 증대했다. 1938년 사용자·국가·노동조합 사이의 동반자 관계가 처음으로 수립됐고, 그 시기 몇몇 작은 개혁이 시행됐다. 스웨덴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도 ‘중립’을 취했지만, 이때도 연합국과 나치 둘 다와 계속 교역했다. 나치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했을 동안, 스웨덴 정부는 나치가 스웨덴 내의 철로를 이용해 화물을 수송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유명한 사실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1940년에 사망했는데, 그전에 1930년대의 경제 위기와 전쟁을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라고 묘사했다. 체제가 그 위기에서 회복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종전 이후 거의 30년간 지속된 경제 호황은 트로츠키의 진단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자본주의는 대단히 크게 성장했다. 복지국가의 등장은 바로 이 성장의 시기와 관련지어 봐야 한다.
자본주의의 황금기: 전후 호황
1945년에서 1973년 사이 자본주의 체제는 크게 팽창했다. 이 시기 전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8퍼센트로 추정된다.
첫째,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도시들이 파괴되고 광범하게 폭격당했으므로, 서유럽 나라들은 재건돼야 했다. 국가와 사기업들이 새로운 사회 기반 시설, 공장, 기계, 주택에 투자했다.
둘째, 전쟁 와중과 종전 이후에 모든 곳에서 국가 지출이 크게 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미국의 군비 지출은 GDP의 42퍼센트나 차지했다.
셋째, 군비 지출은 전후 시대에도 계속 많았다. 종전 후 8년이 지난 1953년에도 미국의 군비 지출은 GDP의 15퍼센트에 달했다.
문제는 스웨덴처럼 파괴 수단 생산이나 상시군비경제라는 면에서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어떻게 득을 볼 수 있었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체제를 전체로서 봐야 한다.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로서, 그 안에서 어떤 자본가는 득을 볼 수 있고 어떤 자본가는 파괴될 수 있다. 어떤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이 창출한 새 시장으로부터 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므로 어떤 자본가들은 이윤율이 떨어지며 궁지에 빠진다. 전후 시기에 스웨덴은 직접 전쟁에 연루된 나라들보다 유리했다. 파괴도 없었고 재건도 없었기에, 활용할 수 있는 여분의 잉여가치가 훨씬 더 많았다. 아래에서는 지배계급이 왜 그 여분의 이윤을 복지국가의 탄생에 쓰는 것을 지지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노동계급
아직 다루지 않은 사회적 요소가 있는데, 바로 계급투쟁이다. 스웨덴 노동계급의 힘이 없었다면 복지국가는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스웨덴은 평화의 땅이 아니라 언제나 계급투쟁의 온상이었다. 1800년대 말 산업이 대규모로 확장하면서, 농촌의 가난하고 땅 없는 사람들이 산업화하는 도시로 이동했다. 19세기 동안 스웨덴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과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1860년대에는 노동자 단체들이 상류 계급을 공격하며, 기근과 억압에 대응해 빵·정의·공화국·자유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매우 가까웠기에,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웨덴 노동자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지배계급에게는 극도의 걱정거리였다.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스웨덴 당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군사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 병사들 사이에서 반전을 선동했고, 러시아 상황이
이 계급투쟁의 시기는 결국 1938년 살쮀바덴에서 맺어진 사용자와 노동조합의 동반자 협정으로 이어졌다. 노동조합을 포섭하기 위해 산업 평화의 대가로 몇몇 개혁들이 선사됐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자, 스웨덴노총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경제 호황은 완전 고용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을 강화했다. 전쟁과 전후 호황 동안 축적된 잉여가치 덕분에, 지배계급은 동반자 관계의 유지를 대가로 노동계급에게 주요 개혁들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황금기가 끝나면서 계급투쟁이 귀환했다. 1971년 한 해에 일어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가 9만 명이었는데, 그중 1만 6000명 이상이 비공인 파업을 벌였다. 1971년 파업손실일은 80만 일을 넘겼다.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과 기업주들의 협력으로 임금이 억제되는 동안에 산업 평화는 생산성의 막대한 증가를 가능케 했다. 1968년 세계적 급진화 이후 노동자들은 동반자 관계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에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 간부들은 대부분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당원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급진좌파가 성장했다. 대부분 스탈린주의자와 마오주의자였지만, 트로츠키주의 정파도 소수 있었다. 1970년대 초중반에 일어난 산업 쟁의로 새로운 입법이 이뤄져야 했다. 고용 보호와 포괄적 의사 결정에 관한 법률이 운동을 잠재우려고 고안됐다. 다시 한 번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밀려 물러서야만 했지만, 새 법률은 임금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 압박을 줄이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들어주면서도, 자본가들의 이윤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이 모든 요구를 성취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혁명적 조직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불행히도 극좌파는 너무 작았다. 스탈린주의 정당인 좌파당과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은 파업을 배신하고, 노동자 투쟁들이 성장하고 있던 정치 운동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 1991년부터 지금까지
1970년대의 투쟁이 1980년대에 끝나게 됨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영국 마거릿 대처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의 주도 하에 세계적 이데올로기이자 정책이 됐다. 하지만 스웨덴의 공공부문은 1980년대에도 계속해서 성장했으며 조세 수익은 GDP의 51퍼센트까지 증가해 역사상 가장 높았다.
스웨덴 공공부문은 1980년대에 감축을 피했지만, 몇몇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도입되고 금융과 은행 부문의 규제가 완화돼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대출 관련 법률이 바뀜에 따라, 금융 기업과 부동산 회사들은 상업용·주거용 부동산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1980년대 내내 커진 부동산 거품은 1990년대 초 거대한 붕괴와 위기를 초래했다. 2008~2009년 아일랜드 금융 위기 때처럼 스웨덴 은행들도 무너져 내렸고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 금융을 받았는데, 그 돈이 무려 670억 크로나
스웨덴 경제는 1990년대 말 회복했으나 여전히 실업률이 비교적 높았다. 스웨덴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서 회복한 요인의 하나는 닷컴 거품이 성장하며 세계경제가 꽤나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 등 다른 나라들로의 원자재·생산수단 수출이 계속됐으며, 심지어 증가하기까지 했다. 공공부문 감축, 노동계급 생활수준의 저하, 시장 개방 확대로 자본가들이 다시 투자할 유인을 얻었다. 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자본가들이 금융과 부동산에서 막대한 손실을 봤다는 사실도 회복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2년간 중소기업 거의 6만 개가 파산해, 자본의 집중도가 더 커졌다.
1994년 국민투표에서 근소하게 승리해 얻어 낸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 덕분에, 스웨덴 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정부는 계속 신자유주의적 경로를 밟아 나갈 또 다른 명분을 얻었다. 공공부문과 민영화에 대한 유럽연합의 규정은 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정부에게 자기 책임은 회피하면서도 자신들의 계획을 실시할 핑계를 제공했다. 2006년 우파 연립정부가 선출됐다. 1990년대 초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파 정부는 집권 초부터 전임 사회민주당 정부가 시작했던 일을 계속했다. 더 악랄하게 밀어붙였다. 국유 제약회사들이 매각되고 시장에 개방됐으며, 교육과 보건 분야는 민영화됐고, 사회보험과 복지 제도의 변화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겼다. 법인세는 계속 낮아지고 재산세와 부동산세도 낮아진 반면, 부가가치세는 올랐다. 쓰레기 수거 비용, 학교 급식비, 병원비 등이 신설됐다. 불평등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빈곤도 증가하고 있다.
결론
경제 위기와 긴축의 시대에 좌파 개혁주의와 케인스주의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스 시리자와 프랑스 좌파전선의 멜랑숑이 부상하며 좌파 개혁주의 정치의 새 무대를 열었다. 전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경제 위기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해법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에서 혁명가들에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국가의 노르딕 모델을 역사적 맥락 속에 놓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대량 파괴의 산물인 자본주의 호황의 시기에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동일한 상황이 유력하게 전개되지 않는 한, 복지국가는 간단히 재현될 수 없다. 진정으로 ‘옛’ 사회민주주의나 좌파 개혁주의의 이상에 따라 국가를 개혁하고자 한 이들이 ‘건강한’ 자본주의로 돌아가기 위해 내핍 조처를 시행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이유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스웨덴 국가의 부가 전 세계 노동자들을 억압했던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이 언제까지고 경제 붕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경기가 둔화함에 따라, 수출이 줄어들 것이다. 유럽연합 주변부 국가들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 핵심국 은행들이 그 국가들에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북유럽 국가들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전 세대가 힘들게 투쟁해서 성취한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을 포함해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와 더불어, 이 체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로 나아갈 필요성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은 이 체제 하에서 노동자들이 획득한 개혁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으며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전복만이 위기와 억압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