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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와 실상 ―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9월 9일 스웨덴 총선에서 파시스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극우 정당인 민주당이 약진했다. 민주당 성장의 한 요인은 주류 정당들의 이민자 배척 정서 부추기기였다.

그런데 국내에서 스웨덴을 대안 모델로 소개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사회민주당이 이민자 배척 정서에 타협한 덕분에 재집권을 할 수 있었다고 기회주의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극우가 성장하는 또 다른 배경은 불평등과 빈곤의 급속한 증가이고, 여기에 사회민주당의 책임도 크다. 이 글은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에 대한 신화에 도전하며 그 실정을 소개한다.

필자인 마데레이네 요한손은 스웨덴 출신으로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이다. 아일랜드 ‘사회주의 노동자 네트워크’ 회원이며 사우스더블린 주의회 의원이다. 

이 글은 2012년 가을 《아이리시 맑시스트 리뷰》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옮긴이와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삽입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와 긴축의 시대에 당신은 ‘노르딕 모델’은 이렇게저렇게 다르고 스웨덴은 나머지 유럽 곳곳에 빠르게 퍼지는 듯한 위기를 피하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들을 것이다. 2011년 10월 아일랜드의 진보적 경제 싱크탱크인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 싱크탱크’(TASC)는 ‘노르딕 모델: 변화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탄력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저명한 인사들이 스칸디나비아 방식을 어떻게 아일랜드에 들여올 수 있을지 발표했다. 노르딕 모델은 조화로운 자본주의 국가의 모습, 즉 시장의 광기를 길들일 수 있고 더 평등한 사회를 육성할 수 있는 복지국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을 옹호하는 많은 이들은 진정으로 개혁과 더 나은 사회를 바란다. 하지만 노르딕 모델은 그저 말과 미사여구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 특히 [아일랜드] 노동당 정부의 장관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긴축 정책이 사실은 진보적 개혁인 양 사람들을 속이려 할 때 그렇다.

스웨덴 등 노르딕 모델의 실상은 흔히들 생각하는 ‘지상천국’과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고, 실업률이 높고(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빈곤이 증가하고 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부의 40퍼센트를 통제하는 반면, 인구의 4분의 1은 어떤 형태로든 금융 자산이 전혀 없다.[1] 놀랍게도 이 수치는 아일랜드보다 높고, 심지어 미국보다도 높은 것이다. 2004년 스웨덴은 최고경영자들의 보수가 유럽연합에서 가장 높은 나라였다.[2] 이런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무상 급식, 보편적으로 [학자금] 보조금을 받는 무상 대학 교육, 20세 미만 무상 의료가 있는 한, [스웨덴 등] 복지국가가 더 나은 것 아니냐는 주장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런 제도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의 생활수준과 기대에 좋은 영향을 주므로,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글의 주된 목표는 [2012년] 현재의 [스웨덴] 우파 연립정부가 복지국가를 후퇴시키려 애쓰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스웨덴 복지국가의 성립 과정을 살펴보고 노르딕 모델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1971년 파업 중인 광산노동자들 전후 황금기가 끝나며 노동자 투쟁이 다시 고양됐다

복지국가의 기원

주류 친자본주의 평론가들은 노르딕 모델의 등장을 북유럽 사람들의 유전적 기질 때문인 듯 말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스칸디나비아적 심리가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적 탐욕보다는 평등과 조화와 동반자 관계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보통 선거권을 지지한 요한 아우구스트 그리펜스테트 같은 자유무역 선호 자유주의자들의 등장과 함께 1800년대 말 산업화 시기에 복지국가가 시작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3] 하지만 가장 중론(衆論)은 1930년대에 동반자 관계가 확립되고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스웨덴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복지국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시행된 노동계급 사람들을 위한 개혁은 보잘것없었다. 복지국가가 공공 정책에서 핵심이 된 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였다.

노르딕 모델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스웨덴 경제와 역사를 간략히 살펴봐야 한다. 스웨덴의 산업화는 매우 뒤늦었다. 19세기 초중반까지 스웨덴은 빈곤이 만연하고 많은 사람이 해외로 이주하는 극도로 낙후한 나라였다. 1848년 기근 이후 1860년대부터 1920년까지 100만 명이 스웨덴을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남부 시골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었고, 종교적 난민과 부랑자도 있었다.

1800년대 말 수출이 크게 늘기 시작했는데, 주요 수출품은 철광석과 목재였다. 원자재는 주로 영국과 독일 같은 산업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들로 갔다. 그 나라들은 수천 킬로미터의 철로를 깔고 공장 기계를 만드는 데 양질의 철과 목재가 필요했다. 철광석은 팽창하고 있던 방위 산업에서 새로운 무기들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 수출 시장의 성장은 스웨덴 산업 발전의 속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 스웨덴은 공식으로는 중립을 취했지만, 해외의 무기 제조업을 위한 원자재 수출을 계속했다. 노동계급 남성 수백만이 끔찍한 전쟁의 참호 속에서 죽어 가는 동안 스웨덴 자본가들은 철광석 등을 판매해 이윤을 벌었다.

1929년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스웨덴 자본에 대단히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업가이자 금융업자였던 이바르 크뤼게르의 광활한 ‘제국’이 붕괴했고, 크뤼게르는 파리에서 자살했다. 이는 스웨덴과 미국 경제의 위기를 가중시켰고 계급투쟁이 증대했다. 1938년 사용자·국가·노동조합 사이의 동반자 관계가 처음으로 수립됐고, 그 시기 몇몇 작은 개혁이 시행됐다. 스웨덴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도 ‘중립’을 취했지만, 이때도 연합국과 나치 둘 다와 계속 교역했다. 나치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했을 동안, 스웨덴 정부는 나치가 스웨덴 내의 철로를 이용해 화물을 수송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유명한 사실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1940년에 사망했는데, 그전에 1930년대의 경제 위기와 전쟁을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라고 묘사했다. 체제가 그 위기에서 회복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종전 이후 거의 30년간 지속된 경제 호황은 트로츠키의 진단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자본주의는 대단히 크게 성장했다. 복지국가의 등장은 바로 이 성장의 시기와 관련지어 봐야 한다.

1985년 사민당 선거포스터(왼쪽)와 이를 패러디한 2010년 보수당(온건당)의 선거포스터(오른쪽) 사민당은 1980년대 이래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1990년대 이후 세 차례나 보수당에 정권을 내 줬다. 보수당은 2010년 선거에서 자신들이야말로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사민당의 포스터가 당시 젊은 기업 간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양복, 달마시안, 수상스키 등)로 채워진 반면 보수당 포스터는 전통적인 노동계급 이미지들(조끼와 청바지, 리트리버, 작업공구 등)을 활용한 게 인상적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 전후 호황

1945년에서 1973년 사이 자본주의 체제는 크게 팽창했다. 이 시기 전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8퍼센트로 추정된다.[4] 미국과 서유럽에서 실업률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마치 마르크스가 틀렸고, 호황과 불황의 순환이 끝난 듯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에서 어떻게 회복했는가?

첫째,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도시들이 파괴되고 광범하게 폭격당했으므로, 서유럽 나라들은 재건돼야 했다. 국가와 사기업들이 새로운 사회 기반 시설, 공장, 기계, 주택에 투자했다.

둘째, 전쟁 와중과 종전 이후에 모든 곳에서 국가 지출이 크게 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미국의 군비 지출은 GDP의 42퍼센트나 차지했다.[5] 보통 공황이거나 경기 침체일 때는 투자가 둔화하는 반면, 전시 경제에서 국가는 이윤율이 매우 낮은데도 투자를 추진했다. 종전 후에도 필요한 재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국가 지출이 계속됐다.

셋째, 군비 지출은 전후 시대에도 계속 많았다. 종전 후 8년이 지난 1953년에도 미국의 군비 지출은 GDP의 15퍼센트에 달했다.[6] 냉전 시절 내내, 군비 경쟁의 일부로서 엄청난 돈이 군사적 목적에 계속 쓰였다. 크리스 하먼은 어떻게 군비 지출이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투자를 고정자본에서 파괴 수단 생산으로 돌림으로써 그랬던 것이다. 전쟁 와중과 종전 후의 고정자본 파괴와 결합해서, 국가 지출 증가와 상시군비경제는 1973년까지 지속된 호황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스웨덴처럼 파괴 수단 생산이나 상시군비경제라는 면에서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어떻게 득을 볼 수 있었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체제를 전체로서 봐야 한다.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로서, 그 안에서 어떤 자본가는 득을 볼 수 있고 어떤 자본가는 파괴될 수 있다. 어떤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이 창출한 새 시장으로부터 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므로 어떤 자본가들은 이윤율이 떨어지며 궁지에 빠진다. 전후 시기에 스웨덴은 직접 전쟁에 연루된 나라들보다 유리했다. 파괴도 없었고 재건도 없었기에, 활용할 수 있는 여분의 잉여가치가 훨씬 더 많았다. 아래에서는 지배계급이 왜 그 여분의 이윤을 복지국가의 탄생에 쓰는 것을 지지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노동계급

아직 다루지 않은 사회적 요소가 있는데, 바로 계급투쟁이다. 스웨덴 노동계급의 힘이 없었다면 복지국가는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스웨덴은 평화의 땅이 아니라 언제나 계급투쟁의 온상이었다. 1800년대 말 산업이 대규모로 확장하면서, 농촌의 가난하고 땅 없는 사람들이 산업화하는 도시로 이동했다. 19세기 동안 스웨덴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과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1860년대에는 노동자 단체들이 상류 계급을 공격하며, 기근과 억압에 대응해 빵·정의·공화국·자유를 요구했다.[7] 1900년대 초 노동계급 운동과 노동조합은 힘이 커졌고 두 번의 총파업을 벌였다. 첫 번째는 선거권을 요구한 1902년이었고, 두 번째는 1909년이었다.

러시아가 매우 가까웠기에,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웨덴 노동자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지배계급에게는 극도의 걱정거리였다.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스웨덴 당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군사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 병사들 사이에서 반전을 선동했고, 러시아 상황이 [스웨덴으로] 번질까 봐 조심스러워 한 지배계급은 노르웨이의 독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8] 1930년대 대불황 때 자본가들이 이윤 수준을 유지하려 함에 따라 노동계급 투쟁이 다시 일어났다. 주로 임금 방어와 노동조합 조직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1931년 조선소들에서 파업 물결이 일었다. 오달렌이라는 마을에 파업 파괴자들이 들어왔고, [이를 막기 위한] 노동자와 지역 사회의 대규모 투쟁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파업 파괴자들의 숙소로 가지 못하도록 군대가 막았고, 노동자들의 행진이 그곳을 향해 계속 나아갈 때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다섯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 주류 언론들이 폭력의 책임을 ‘공산주의·급진주의자들’에게로 돌리려 했는데도, 이 사건은 전체 노동계급 사이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계급투쟁의 시기는 결국 1938년 살쮀바덴에서 맺어진 사용자와 노동조합의 동반자 협정으로 이어졌다. 노동조합을 포섭하기 위해 산업 평화의 대가로 몇몇 개혁들이 선사됐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자, 스웨덴노총(LO)은 산업 성장 약속의 대가로 파업을 자제하기로 했다.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한 1932~1976년의 특징은 계급투쟁 감소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경제 호황은 완전 고용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을 강화했다. 전쟁과 전후 호황 동안 축적된 잉여가치 덕분에, 지배계급은 동반자 관계의 유지를 대가로 노동계급에게 주요 개혁들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었다. [지배계급이] 이윤의 일부를 지불해 얻은 산업 평화와 개혁들은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에 통합시키고 노동계급이 이웃 나라 소련의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공공 보건 시스템 도입, 공교육 도입, 노동계급을 위한 주택 100만 호 건설과 함께 ‘폴크헴메트’(문자 그대로는 ‘민중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복지국가를 가리키는 용어다)가 발전했다. 노동계급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좋아졌고, 교육 기회 증가로 사회적 이동성이 어느 정도 생겨났다.

1970년대 초 황금기가 끝나면서 계급투쟁이 귀환했다. 1971년 한 해에 일어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가 9만 명이었는데, 그중 1만 6000명 이상이 비공인 파업을 벌였다. 1971년 파업손실일은 80만 일을 넘겼다.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과 기업주들의 협력으로 임금이 억제되는 동안에 산업 평화는 생산성의 막대한 증가를 가능케 했다. 1968년 세계적 급진화 이후 노동자들은 동반자 관계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에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 간부들은 대부분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당원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급진좌파가 성장했다. 대부분 스탈린주의자와 마오주의자였지만, 트로츠키주의 정파도 소수 있었다. 1970년대 초중반에 일어난 산업 쟁의로 새로운 입법이 이뤄져야 했다. 고용 보호와 포괄적 의사 결정에 관한 법률이 운동을 잠재우려고 고안됐다. 다시 한 번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밀려 물러서야만 했지만, 새 법률은 임금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 압박을 줄이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들어주면서도, 자본가들의 이윤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이 모든 요구를 성취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혁명적 조직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불행히도 극좌파는 너무 작았다. 스탈린주의 정당인 좌파당과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은 파업을 배신하고, 노동자 투쟁들이 성장하고 있던 정치 운동(공장에서 노동계급 투쟁이 벌어지던 때,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 학생들의 점거 운동, 여성 운동이 수많은 청년을 거리와 투쟁으로 끌어들였다)과 연결되지 못하도록 할 만큼은 영향력이 있었다.

스웨덴 파시스트의 거리 행진 빈곤과 불평등의 급속한 증가가 극우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출처 Carl Ridderstråle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 1991년부터 지금까지

1970년대의 투쟁이 1980년대에 끝나게 됨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영국 마거릿 대처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의 주도 하에 세계적 이데올로기이자 정책이 됐다. 하지만 스웨덴의 공공부문은 1980년대에도 계속해서 성장했으며 조세 수익은 GDP의 51퍼센트까지 증가해 역사상 가장 높았다.[9] 1970년대 동안 공공 부문의 팽창으로 스웨덴은 세율이 높은 경제가 됐다. 부가가치세와 소득세의 증가 등 많은 새로운 세금이 노동계급에게 부과됐지만, 법인세가 오르고 피고용인 임금의 35퍼센트만큼을 사용자가 세금으로 내는 제도(사용자가 부담하는 사회보험료)가 도입되면서 자본도 압박을 받았다. 이 세금은 여전히 전체 세금 수익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스웨덴 공공부문은 1980년대에 감축을 피했지만, 몇몇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도입되고 금융과 은행 부문의 규제가 완화돼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대출 관련 법률이 바뀜에 따라, 금융 기업과 부동산 회사들은 상업용·주거용 부동산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1980년대 내내 커진 부동산 거품은 1990년대 초 거대한 붕괴와 위기를 초래했다. 2008~2009년 아일랜드 금융 위기 때처럼 스웨덴 은행들도 무너져 내렸고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 금융을 받았는데, 그 돈이 무려 670억 크로나(약 8조 6000억 원)에 달했다. 투기꾼과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초래한 막대한 은행 부채는 국가 부채로 전환됐다. 스웨덴 통화에 대한 막대한 투기로 문제가 계속됐다. 위기는 대량 실업을 낳았고 공공부문과 복지국가에도 대규모 공격이 가해졌다. 지배계급은 위기가 ‘비대한’ 공공부문 탓이라고 비난하며 사적 금융 투기가 낳은 경제 위기를 학교·병원·복지를 줄이는 데 이용했다. 오랫동안 스웨덴 지배계급은 공공부문을 줄이고 에너지와 통신 같은 많은 국유 부문을 민영화하고 싶어 했다. 위기가 좋은 핑계가 됐다. 위기는 실업에 대한 공포로 노동계급을 무장해제시키는 데서도 유용했다. 1990년대 초 공공부문 일자리 9만 개가 사라졌다.[10] 1991년 소련 붕괴도 공공부문에 대한 새로운 공격 소재가 됐다. 공산주의가 몰락했으니 ‘대안은 없다’는 마거릿 대처의 신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혁명이나 노동계급 반란에 대한 공포는 과거지사가 됐고 신자유주의는 무제한의 자유를 얻었다.

스웨덴 경제는 1990년대 말 회복했으나 여전히 실업률이 비교적 높았다. 스웨덴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서 회복한 요인의 하나는 닷컴 거품이 성장하며 세계경제가 꽤나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 등 다른 나라들로의 원자재·생산수단 수출이 계속됐으며, 심지어 증가하기까지 했다. 공공부문 감축, 노동계급 생활수준의 저하, 시장 개방 확대로 자본가들이 다시 투자할 유인을 얻었다. 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자본가들이 금융과 부동산에서 막대한 손실을 봤다는 사실도 회복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2년간 중소기업 거의 6만 개가 파산해, 자본의 집중도가 더 커졌다.[11] 복지국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 회복에도 불구하고 삭감과 민영화가 계속됐다.

1994년 국민투표에서 근소하게 승리해 얻어 낸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 덕분에, 스웨덴 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정부는 계속 신자유주의적 경로를 밟아 나갈 또 다른 명분을 얻었다. 공공부문과 민영화에 대한 유럽연합의 규정은 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정부에게 자기 책임은 회피하면서도 자신들의 계획을 실시할 핑계를 제공했다. 2006년 우파 연립정부가 선출됐다. 1990년대 초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파 정부는 집권 초부터 전임 사회민주당 정부가 시작했던 일을 계속했다. 더 악랄하게 밀어붙였다. 국유 제약회사들이 매각되고 시장에 개방됐으며, 교육과 보건 분야는 민영화됐고, 사회보험과 복지 제도의 변화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겼다. 법인세는 계속 낮아지고 재산세와 부동산세도 낮아진 반면, 부가가치세는 올랐다. 쓰레기 수거 비용, 학교 급식비, 병원비 등이 신설됐다. 불평등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빈곤도 증가하고 있다.[12] 노동계급은 이런 조처들을 지지하지 않지만, 좌파적 대안이 부재한 탓에 사기 저하된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스웨덴 현지에서는 삭감에 맞선 저항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간호 실습생들은 임금 인상 운동을 벌였고, 복지 체계의 개악에 맞선 거대한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파시즘 반대나 팔레스타인 [연대] 같은 정치적 쟁점은 가장 큰 조직화 쟁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청년들을 대상으로 그렇다.

결론

경제 위기와 긴축의 시대에 좌파 개혁주의와 케인스주의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스 시리자와 프랑스 좌파전선의 멜랑숑이 부상하며 좌파 개혁주의 정치의 새 무대를 열었다. 전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경제 위기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해법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에서 혁명가들에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국가의 노르딕 모델을 역사적 맥락 속에 놓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대량 파괴의 산물인 자본주의 호황의 시기에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동일한 상황이 유력하게 전개되지 않는 한, 복지국가는 간단히 재현될 수 없다. 진정으로 ‘옛’ 사회민주주의나 좌파 개혁주의의 이상에 따라 국가를 개혁하고자 한 이들이 ‘건강한’ 자본주의로 돌아가기 위해 내핍 조처를 시행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이유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스웨덴 국가의 부가 전 세계 노동자들을 억압했던(그리고 여전히 억압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으로의 수출에 의존했다는 것도 간과돼 있다. 스웨덴 경제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에 무기를 수출하는 데 점점 더 의존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바레인 시위대를 학살하고 자국민을 억압하는 데 스웨덴 무기를 사용한다.[13] 복지국가에 관한 신화 중 하나는 복지국가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평화로운 동반자 관계 덕분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노동자 투쟁이 자본가들이 이윤 중 일부를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쓰도록 강제했고, 이조차 자본가들이 견딜 만한 충분한 이윤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가능했다. 현재의 수익성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임금, 권리, 복지국가를 계속 공격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반격이 없는 한 말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이 언제까지고 경제 붕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경기가 둔화함에 따라, 수출이 줄어들 것이다. 유럽연합 주변부 국가들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 핵심국 은행들이 그 국가들에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북유럽 국가들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전 세대가 힘들게 투쟁해서 성취한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을 포함해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와 더불어, 이 체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로 나아갈 필요성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은 이 체제 하에서 노동자들이 획득한 개혁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으며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전복만이 위기와 억압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1] B.Ericson, Den nya överklassen (Fischer & Co, 2010), p.11-12, p.313

[2] 같은 책, p.288

[3] D. Ankarloo, Välfärdsmyter (ETC Frlag, Stockholm, 2010), p.55

[4] Stephen A. Marglin, Juliet B. Schor. The Golden Age of Capitalism. (Google Books. 2009-03-12 검색)

[5] http://www.usgovernmentspending.com/past_spending, (2012-08-22 검색)

[6] 같은 링크

[7] H. Blomqvist, http://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social-democracy/sweden/ red-thread.htm

[8] 같은 링크

[9] OECD and SCB (Statistiska Centralbyrån), www.ekonomifakta.se/printDiagram.aspx?pid= 16031&epslanguage=sv&from16031=&to16031=

[10] D. Ankarloo, Välfärdsmyter (ETC Frlag, Stockholm, 2010), p. 120

[11] M. Nyberg, Kapitalet.se (Ordfront, Stockholm, 2001), p.207

[12] D. Ankarloo, Välfärdsmyter (ETC Frlag, Stockholm, 2010), p. 61

[13] http://www.ofog.org/node/1196, (2012-08-2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