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망언 규제 논쟁 :
국가에 혐오 표현 규제를 요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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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하 자한당) 의원들의 5.18 망언을 계기로 혐오 표현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자한당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였다.
자한당 의원 박성중은 이렇게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면 특정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지배해 버리고 결국 공산주의가 될 것이다.” 원내대표 나경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는 가당찮은 말을 했다.
망언자들을 의원직에서 제명해야 마땅한데도, 자한당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이 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자한당이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는 것은 역겹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자한당의 뿌리인)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의 정치적 이견을 짓밟고자 광주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기까지 한 사건이다. 항쟁을 옹호할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자한당 전신 정당들의 정부들이 폭력·탄압·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특히, 자한당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강하게 반대한다. 학교에서 성소수자 교육을 하는 것도 맹렬하게 반대하고 억압한다.
물론 자한당 의원들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이들과 그 지식인 친구들은 날마다 방송에 출연해 역겨운 말들을 내뱉는다.
본디 표현의 자유는 권력자들을 위해 인정된 권리가 아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미 아주 큰 소리를 낸다. 미디어를 소유하고 통제하는 권력자들은 자기 의견을 개진할 일상적 연단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권리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 문제는 맥락이 중요하다.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것과 차별받는 사람들을 표적 삼아 공격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 신문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실으면서 언론(표현)의 자유를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가 한 일은 이미 가혹하게 억압 받고 차별 받는 무슬림 이민자들(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노동계급 소속인)의 믿음을 조롱해 그들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슬림과 이민자 차별을 더 쉽게 하고, 이슬람 혐오를 더 광범하게 유포시켰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동 개입을 정당화하고, 인종차별주의를 촉진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에 본질적인 제한이 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가령 〈조선일보〉조차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아동 포르노를 싣지는 않는다.
5.18 망언자들이 북한군 광주 침투설, 광주교도소 습격설, 5.18 유공자 귀족 예우설을 쏟아 내는 것도 피억압 대중으로서는 단순한 표현의 자유로 인정할 수가 없다. 특히, 오늘날 대중의 민주주의 염원을 송두리채 부정하고픈 그들의 반동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언자들은 편견과 차별과 배제 등을 강화해 천대받는 사람들의 민주주의 염원을 공격하고 싶어 한다.
유럽은 어떤가?
광주항쟁에서 자식 등을 잃고 억장이 무너진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5.18 망언은 인격 살인 행위일 것이다. 5.18 망언만이랴. 세월호 유가족들, 무슬림 예멘 난민, 성소수자 등도 혐오 발언의 대상이었다.
우파 정치인들의 망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문재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표현의 자유와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거나 침해하는 주장과 행동에까지 허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당도 이 사태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지난번 민주당 정부들이 광주 학살의 원흉들에게 유화적이고 관대한 탓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당선되자마자 전두환·노태우를 석방하고, 노무현은 두 번이나 전두환·노태우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런 관용을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적잖은 사람들이 혐오 표현을 법으로 금지(규제)하라고 주장한다. 진보 정당인 민중당도 최근에 그런 입장을 밝혔다. 물론 민중당은 훌륭하게도, 망언 직후 신속하게 규탄 행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혐오 표현 규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럽의 사례를 든다. 독일과 프랑스에는 역사 부정(독일의 홀로코스트 부인 죄)이나 소수자 혐오 표현(프랑스의 외국인혐오 처벌법)을 처벌하는 별도의 법률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이게도, 독일과 프랑스는 인종차별적 파시스트들이 위협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나라들이다. 법으로는 파시스트들의 세력 형성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역사적 경험이 이를 말해 준다.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당이 부상하자, 바이마르공화국의 주류 정당들(사회민주당, 자유주의 정당 등)은 모두 나치를 비난하면서도, 대규모 거리 시위와 행진보다는 헌법적 수단을 통해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권력을 잡자마자 비헌법적이게도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 처넣었다.
한편, 혐오 표현을 법으로 규제하자는 것은 말과 출판을 할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할 권한을 국가에 더 많이 주자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좌파와 차별받는 사람들도 더 쉽게 단속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을 공적 공간에서 쫓아내기 위해 법으로 규제하라고 국가에 요구하지 않는다. 우파 정치인의 혐오 표현에 맞서기 위한 가장 좋은 대응은 대중에게 권능(힘)을 주는 것이다.
오늘날 영국의 혁명적 좌파는 파시스트(나치)에 대해 ‘노 플랫폼’(발언 기회 주지 않기) 전술을 구사한다. ‘노 플랫폼’은 파시스트가 정치적 공론의 장에서 발언할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방침이다. 파시스트들은 노동계급의 권리와 의회제 민주주의를 전부 파괴하는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대중 시위, 맞불 집회 등 힘의 과시를 통해 정치 공론의 장에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노 플랫폼’은 파시스트들의 성장을 막는 데서 효과를 입증한 특수한 전술이다. 가령 영국 좌파 대학생 단체들은 ‘노 플랫폼’ 정책을 통해 나치가 대학 캠퍼스에서 조직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시스트가 아니고 단지 반동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노 플랫폼’ 전술들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국가가 검열하라는 요구는 더더욱 안 된다. 사람들의 보수적 생각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함께 투쟁하면서 그 속에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금지나 규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대중 행동을 통해 우파 정치인들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이 더한층 정치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표현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하고자 노력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중이 권력자들에게 맞서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