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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총리의 목요대화 :
이번엔 스웨덴 식으로 하겠다고?

정세균 총리는 “사회갈등 해결을 위한 새로운 협치모델인 목요대화를 운영”해 “노사정 등과 폭넓은 대화를 나누겠다”고 밝혔다. 목요대화는 스웨덴에서 1946년부터 1969년까지 23년간 진행된 노·사·정 만찬 모임(목요클럽)에서 따온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새 모델을 꺼내든 것은 네덜란드, 덴마크를 들먹이며 추진했던 “사회적 대화”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1기 경사노위(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파탄났다. 탄력근로제 확대안 ‘합의’ 과정은 경사노위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요하며 정부 정책을 추진하는 도구일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ILO 기본협약 비준 좌절은 경사노위가 시간을 끌면서 후퇴를 강요하는 기구임을 보여 준 또 다른 사례다.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의 불참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책임 전가일 뿐이다. 민주노총이 경사노위에 참여했다면 알량한 차악안에 합의하는 배신적 타협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그런 타협을 거부하면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경사노위에 참여했던 계층(여성·비정규직·청년) 대표 3인이 겪은 수모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계층 대표 3인이 탄력근로제 확대안에 반발하자 경사노위는 그들을 해촉해 버리고 물갈이를 한 뒤, 탄력근로제 확대안을 통과시켰다.

총선 환심 사기

1기 경사노위가 문재인 정부의 약속과 달리 ‘도로 노사정위’로 막을 내리자, 경사노위 2기가 출범했음에도 별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그러자 정세균 총리는 사회적 대화를 회생시키는 펌프질의 일환으로 스웨덴 목요클럽 ‘모델’을 들고 나온 것이다.

노동운동의 일각에서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경사노위가 아닌 새로운 사회적 대화 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민주노총 집행부의 핵심은 산별과 지역 차원은 물론 중앙 단위에서도 (경사노위가 아닌) 사회적 대화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목요대화도 “제안이 오면 적극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가 기대를 잃은 것은 단지 경사노위 운영 파탄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라는 더 큰 맥락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사회적 대화 모델을 바꾸거나 새 틀을 만든다고 해서 그 난점이 해소되기는 어렵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애초 사회적 대화 참여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사안들은 지난 2년 반 동안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후퇴했다. 최저임금 개악이 거듭 추진됐고, 주 52시간제도 시행 유예와 연장근로 인가사유 추가로 무력화됐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아직도 철회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후퇴를 멈추지 않고 ‘모델’만 바꿔 사회적 대화를 제의하는 것 자체가 대화의 기만적 성격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고 싶을 것이다.

하나는 총선 전에 민주노총 위원장과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서 표를 얻으려는 것이자, 노동자들의 불만을 관리하는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사용자들의 신뢰를 얻으려는 것이다.

말만 새롭지 노동자 양보 압박하는 알맹이는 그대로 친기업 본색 노골화하며 노동자 뒤통수 쳐 온 문재인 정부에 맞선 투쟁이 필요하다. 2019년 1월 기업인과의 대화(왼쪽), 2018년 6월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오른쪽)

양보 압박

다른 하나는 총선 후 본격화될 반노동적 정책 추진에서 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잡고 양보를 얻어 내는 것이다. 정세균 총리는 “성장동력 저하와 양극화, 인구절벽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양보와 협력”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이런 문제들(성장동력 저하와 양극화, 저출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파격적인 기업 투자 지원, 규제 완화, 구조조정, 임금 양보, 단시간 일자리 양산 등이 그것이다. 이런 내용이 문재인 정부의 〈2020년 경제정책방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세균 총리는 특히, “획기적인 규제 혁신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강조한다. 요컨대 그는 이를 위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양보와 협력”을 목요대화에서 압박할 생각이다.

그러나 “양보와 협력의 정신”으로 “성장동력 저하와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계급을 떠나) 모두에게 이롭다는 주장은 기만일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이 강요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문제를 일시 극복하더라도 노동자들은 그 결실을 나누지 못한다.

1998년 노·사·정 대타협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사회 개혁과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법제화 같은 양보를 수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재벌은 더 거대하고 부유해진 반면, 비정규직과 빈곤층은 더 늘고 더 가난해졌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대타협 모델로 애초에 제시한 네덜란드 바세나르 협약은 이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네덜란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여성과 청년 일자리 확충을 위해서라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를 수용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득을 보지 못했다. 시간제 일자리와 저임금층 증가, 여성 빈곤 확대로 노동계급의 처지는 더 나빠졌다.

번지수 틀린 모델

문재인 정부를 (무비판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진보진영 내 개혁주의자들은 스웨덴에서 목요클럽(노·사·정 만찬 모임)이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노·사가 윈윈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스킨십, 대화, 참여 등을 그 비결로 꼽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1946~1969년 스웨덴 목요클럽이 다소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그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지속된 장기 호황이었다. 스웨덴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산업 기반이 손상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였던 데다 유럽 재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전후에 탄탄한 경제 성장을 구가했다.

이런 경제 상황 덕분에 스웨덴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에 기꺼이 주요 개혁(의료, 교육, 주택)을 제공할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이윤의 일부를 제공해 노동계급을 포섭하고 산업 평화를 얻는 것이 경제 성장(곧, 자본 축적)에 더 이롭다고 봤다. 후발 산업국인 스웨덴은 1930년대 말까지만 해도 노동자 투쟁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었고,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가까워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또, 경제가 확장되는 조건 덕분에 노동자들의 처지 개선(저임금층의 임금 인상)과 자본가 계급에게도 이익인 조처(특히, 생산성 낮은 기업의 퇴출)가 맞물려 진행될 수 있었다. 경쟁력이 높은 기업들은 임금 통제(고임금 노동자 임금 억제)라는 이득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연대임금 정책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무한정 지속될 수 없었다. 임금 억제와 산업 평화가 지속되면서 막대한 이윤을 쌓은 기업들은 더 거대해졌고, 노동자들 편에서는 불만이 쌓였다. 결국 1970년대 초 장기 호항이 끝나면서 노동자 투쟁이 증대했고, 노·사·정 동반자 관계에 균열이 시작됐다.

개혁을 위한 투쟁

제2차세계대전 이후 25년 넘게 지속된 장기 호황과 유럽을 향한 수출 시장을 가진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라는 특수성이 결합돼 가능했던 목요클럽 모델을 오늘의 한국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나 속임수이다. 노·사·정이 만나 대화를 할 수 있지만, 그로부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지금처럼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는 경제 회복을 위해 노동자가 희생하라는 주문이 ‘상식’이 된다. 노동자 편에 서고자 하는 개혁주의자들도 지금 같은 경제 상황에서는 결국 노동자 양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지금, 여기(경제 침체와 모순 많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개선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노동자 투쟁에 기대야 한다.

문재인 정부 집권 2년 반 동안에도 작더라도 진정한 개선을 가져온 것은 바로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이었다. 사회적 대화 기구들 안에서는 공허한 말이 오가고, 시간 끌며 후퇴와 양보를 강요받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대화의 새 ‘모델’이 아니라 효과적인 투쟁 모델이다.